렉서스와 올리브나무 - KI신서 1686
토머스 L. 프리드먼 지음, 장경덕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쓰레기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장의 모순이다. 편파적 저널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원저자(토머스 프리드먼)는 물론이려니와 옮긴이(장경덕)의 사고구조는 오직 경제적관점만이 세계의 현상을 파악하는 유일한 도구라는 인식수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반대시위대의 파괴행위로 인해 저녁거리에 대한 고민에 빠진 역자는 당장 자기 손을 벗어나버리게 된 맥도널드 햄버거에 깊은 애착을 가진다. 그러나 이 역자의 "참으로 단순한" "걱정"은 단지 그의 선택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잠깐 동안 중단된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맥도널드 매장의 유리를 파손한 시위대의 행동은 생존에 대한 경고를 도외시하면서 역자의 손에서 햄버거를 뺏아버린 넋나간 폭도일 뿐이다.(p5~6)

경제학이 학문이라기보다는 노스트라다무스를 추종하는 예언자들의 밀교가 되어버린 현재에, 그러나 어찌되었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 아니 더 나가 살아남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더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예언하는 자들은 무수히 많다. 이제 그 예언자집단에는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저널리스트도 동참한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자신의 책을 통해 그 예언을 웅장하게 풀어낸다.

그 예언의 중심 뼈대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다. 세계화에 동참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아든 십계는 신의 법률이었지만, 세계화된 지구 위에서 토머스 프리드먼이 받아든 석판엔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이 시장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신이 되어버린 시장은 전 지구인에게 십계명에 버금가는 황금률을 제시한다.

▷ 민간부문을 경제성장의 주력 엔진으로 삼아라
▷ 낮은 인플레션과 물가안정을 유지하라
▷ 정부 관료조직을 줄여라
▷ 재정흑자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균형에 가깝게 재정을 운용하라
▷ 수입관세를 낮추거나 없애라
▷ 외국인 투자 제한을 없애라
▷ 수입물량 제한과 내수시장 독점을 철폐하라
▷ 수출을 늘려라
▷ 정부소유산업과 공익사업을 민영화하라
▷ 자본시장의 규제를 완화하라
▷ 외환거래를 자유화하라
▷ 기업과 주식, 채권을 외국인들이 직접 소유할 수 있도록 개방하라
▷ 국내시장 경쟁을 최대한 촉진하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라
▷ 정부부문의 부패와 보조금, 뇌물관행을 없애라
▷ 은행과 통신을 민간이 소유하고 이 부문의 경쟁이 이뤄지도록 개방하라
▷ 국민들이 상호 경쟁하는 연금 가운에 자신이 가입할 연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외국의 연금과 뮤추얼펀드에도 가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
(pp. 162~163)

매우 낯익은 신의 말씀들이다. 1997년 IMF가 경제신탁을 하면서 한국정부에 요구했던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황금률은 단 두 가지 주요 내용으로 축약되는데, 하나는 작은 정부, 둘은 사유화. 이 두 가지 요소는 다시 단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합쳐지는데, 그것은 완전자유시장이다.

대처와 레이건을 모세와 세례요한쯤에 비유하는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 황금률이 냉전을 종식시킨 핵심이며,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을 입을 수 있는 신체조건이라고 강변한다. 그에 따르면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은 오직 한 종류밖에는 없고 그 사이즈도 정해져 있으므로 이것을 입으려면 몸을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 각국의 정부, 그리고 그들이 천명하고 있는 정치는 모두 이 재킷의 규격 내에서 가능하며, 정부는 기껏해야 이 재킷에 소매를 약간 덧댄다거나 품을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입을 통해 구연되는 시장신의 황금률은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신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끌고 온 것일 뿐이다. 다만 침대 옆의 프로크루테스는 도끼를 들고 있으나 황금재킷의 실소유주인 시장신은 이 옷을 입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굶겨 죽일 수 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보여주는 유일한 가치관은 오직 부의 축적일 뿐이다. 거기엔 어떻게 하면 더 뷰유하게 살 수 있나만이 관심의 대상이고 그 이외에 삶의 가치관은 부(富)에 수반한 부산물일 뿐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돈에 환장한 속물근성 이외에 이 책에서 평가되는 가치라는 것은 없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는 부의 신전에서 시장신에게 바쳐진 세계화주의자들의 바이블이다.

문제는 이 속물근성으로 가득찬 쓰레기같은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것.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토머스 프리드먼이 원하는 것처럼, 이 책은 "시사관련코너"가 아니라 "역사서 코너"에 자리잡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가 얼마나 속물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서이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 책을 들여다보면서 오늘의 역사를 돈에 미친 역사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바로 이 점이 이 책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적하는 것처럼 세계는 이제 하나의 네트워크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승자와 패자는 세계화에 적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서 판가름난다. 더 정확히는 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혹은 돈을 만들 방법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이 네트워크를 그대로 수용하는 한, 올리브나무는 대지의 한 복판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올리브나무가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판단받게 된다.

네트워크 안에서 순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황금률을 거부할 수 없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이 네트워크에 순응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즉 부를 기준으로 삶의 질을 판단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이상, 황금률은 여전히 황금률일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적응한 자는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을 입을 것이고 적응하지 못한 자는 상대적 박탈감에 떨어야 한다. 패배한 자들은 "이렇게 얻은 황금은 사회를 위해 쓸 수도 있다"(p.164)는 승리자들의 후덕한 인심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은 그 화려한 외양으로 인하여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연상시키기 어렵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빛나는 재킷의 안쪽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피가 엉겨붙어 있다. 재킷을 입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을 위해 희생당한 수천만, 수억명의 피가 고여 썩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버트란트 럿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논지를 완전히 무로 돌려버리는 수작이다. 배게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만큼 두꺼운 책 속에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돈 많으면 장땡"이라는 달랑 한 줄로 요약될 것을 늘리고 불려놓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 비할 때, 달랑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두고 두고 씹고 불리면서 되새김을 해도 모자랄만큼의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세계화라는 네트워크를 순응할 것인지를 판단하게 해줄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네트워크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지 생각하게 한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읽는 동안 내내 인간의 영혼을 고려하던 럿셀이 생각나는 이유는 지독한 가치관의 차이가 가져오는 위화감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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