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생활고 때문에 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는 비극이 계속 벌어진다. 사회안전망과 복지정책이 미흡할 때 가족은 존재의 최후 보루가 된다. 국가가 그 구성원에게 주거, 의료, 교육 등의 인간다운 삶의 최소 조건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개인과 가족과 국가의 관계를 되묻게 된다. 경쟁주의나 학벌주의의 폐해를 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 삶의 제도적 울타리로서의 국가가 ‘나’와 가족의 삶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불신 때문이다. 불신에서 공포와 두려움의 정념이 탄생하고 전염병처럼 퍼진다. 끔찍한 입시경쟁은 자식의 불안한 미래와 연동된 부모들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을 애써 가리려는 안간힘의 결과다.

좋은 영화와 문학은 가족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새롭게 궁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한 예다. 병원에서 자신들의 아이가 뒤바뀐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부모, 특히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영화는 천착한다. 영화는 ‘기른 정, 낳은 정’ 같은 안이한 이분법을 벗어난다. 부모-자식 관계는 ‘피’나 ‘사랑’이라는 상투어로 규정될 수 없다. 부모의 시각이 규정하는 ‘사랑’과 ‘보살핌’의 그럴싸한 말들이 아이에게는 다른 뜻으로 다가온다. 가족의 거리다. 가족은 ‘탄생’하는 게 아니라 끝없는 이해와 배려의 노력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그 구성의 과정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그렇게 가족이 된다’. 영화가 던지는 생각거리다.

김숨 소설집 <국수>와 장편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은 가족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사랑과 보살핌의 이면을 드러낸다. 특정 가족구성원의 시점을 택해 그 시점이 부딪치는 편견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작가는 한 캐릭터의 시점과 의식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른 가족 캐릭터들은 주변화시키는 서술 전략을 취한다. 거의 전적으로 며느리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여인들>의 경우에도 여러 인물의 관계를 폭넓게 다루는 장편소설의 일반적인 구성형식과는 달리 며느리 ‘그녀’의 시점에서만 작품이 전개된다. 애증의 대상인 시어머니와 남편의 관점은 배제된다. 그들의 생각은 단편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짐작될 뿐이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생각을 짐작하려 애쓰지만 분명하게 잡히는 것은 없다. ‘그녀’는 주변의 여러 일들이 잘못될 때마다 심한 구강건조증으로 힘들어하는 시어머니 때문이라고 원망의 마음을 품지만, 그 원망에는 시어머니의 병이 자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내밀한 죄의식이 얽혀 있다. 한 여성 캐릭터의 분열증적 의식을 이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은 오랜만에 읽는다.

소설집 <국수>의 단편들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 가족 간의 거리를 냉정하게 확인한다. <여인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 거리를 확인하는 단편인 ‘막차’,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그 밤의 경숙’처럼 냉정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도 좋다. ‘막차’는 <여인들>의 서술시점을 뒤집어 시어머니의 시각에서 암투병 중인 며느리를 대하는 분열적 의식을 보여준다. 특히 표제작 ‘국수’에 눈길이 간다. “육십억에 달하는 사람이 모여 살고 있다는 이 지구상에 어디에도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준 존재가 없이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가? 이 쉽지 않은 물음의 의미를 두 여자의 삶을 통해 그리는 솜씨가 돋보인다. 이야기의 구성이나 서술방식이 아주 새롭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자신을 키워준 의붓어머니를 대하는 딸의 착잡한 심경 밑에 흐르는 연민의 정서를 감성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뻔한 감상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은 게 미덕이다.

불안과 두려움의 산물인 가족주의의 이면을 끈기 있게 분석하는 작가를 만나서 반갑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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