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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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아이들은 회색 옷을 입어요. 그들은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총명하기 때문에 우리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합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베타가 되었다는 것이 정말로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감마나 델타보다 훨씬 좋습니다. 감마들은 어리석어요. 그들은 모두 초록색 옷을 입어요. 그리고 델타 아이들은 황갈색 옷을 입습니다. 아, 싫어요, 난 델타 아이들하고는 놀고 싶지 않아요. 엡실론들은 더 형편없죠. 그들은 너무 우매해서 글을 쓰거나 읽을 능력이 없어요. 그뿐 아니라 그들은 너무나 흉측한 빛깔인 검정색 옷을 입어요. 나는 내가 베타여서 정말로 기쁩니다." 
 
안정의 해 A.F.632년 세계국. 지구에 거주하는 20억 주민들은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유리병 속에서 태어났다. 계급에 맞춰 분류되어 대단히 확실한 체외 생식과 신 파블로프 습성 훈련과, 최면 학습이라는 방법들로 태어나고 길러진다. 어둠 속에서 6만 2,400번의 반복 최면 학습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진리를 만들고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한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방법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만족스럽다. 당신 나름대로의 방법이란 없다. 불안한 감정이나 고민들을 마주할 상황에서는 소마를 삼키면 된다. 부모는 음담패설이고 임신은 외설적이다. 해리포터에서 볼드모트가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자'로 불리고 노홍철이 무한도전에서 '그 녀석'으로 불리는 것처럼 '어머니'는 발음조차 되지 못한다. 셰익스피어는 금서가 되어 거의 아무도 모른다. 낡고 아름다운 것들은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허튼 수작이다.
 
"난 차라리 나 자신 그대로 남아 있고 싶어요.

불쾌하더라도 나 자신 그대로요. 아무리 즐겁더라도 남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지나치게 유능해서 거북할 정도로 자신을 의식하고 혼자뿐이라는 기분을 느끼는 헬름홀츠 왓슨
방종한 성생활이 내키지 않아 한 명의 같은 남자와만 사귄 지 겨우 4개월밖에 되지 않은 레니나 크라운
왜소한 키로 같은 계급의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외톨이 버나드 마르크스 
이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모든 사람은 만인의 공동 소유물인 세계국에서 나 자신이 되고 싶어 괴로운 가엾은 모난 돌들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들은 제각각 층층이 여러 겹으로 둘러싼 무의식중 어딘가가 뚫려 있다. 오늘 누려도 되는 즐거움을 절대 내일로 미뤄서는 안되는 미래사회가 되어도 여전히 무리가 옳은 것이어서 무리가 되지 못한 그들은 자신을 탓하며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야만인 보호 구역에서 베타인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존 세비지

셰익스피어를 알고 시간과 죽음의 신을 발견한 야만인은 야만인들 사이에서도 문명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이곳에서는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 값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1932년에 출판된 이 세계국에 관한 미래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무려 84년이 흘렀다. 첫 문장 '겨우 34층'은 너무나도 쉽게 눈앞에 그려지고 별 탈 없이 읽히지만 이후 전개되는 내용은 수많은 SF 영화들로 이미 수차례 미래사회를 만나본 21세기 지구인이 읽어도 충격적이다. 디스토피아의 대표 작품으로 거론되는 명성에 걸맞게 날카롭게 비판되고 비극으로 그려지는 미래의 암흑세계가 읽는 이로 하여금 환멸과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많은 훌륭한 인간들이 존재하는 포드 공화국. 다 포드 님 덕택이다. 오, 멋진 신세계다.
  
84년 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로 비극적인 미래 세계를 그리며 앞으로 닥쳐올 사태에 대해서 경고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경고한 비극적인 미래와 유사한 현실이 많은 부분 진행이 되고 있다. 마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자기 위로, 합리화가 판을 치는 세상에 올더스 헉슬리는 '이보다 더 한 것이 오리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만큼 과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날 때가 있다. 이미 많은 자료가 있고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에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큼 막연하지는 않지만 과거의 어느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상상을 하면 늘 비틀즈 전성기 시대의 영국을 떠올렸었다. 그건 기분 좋은 상상이다. 미래 세계를 비극으로 그려서 그런가 이 책을 읽고 나니 미래에 대한 호기심보다 과거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크게 느껴지고 있다. 과거로 갈 수만 있다면 1932년으로 가서 이 책의 독자가 되고 싶다.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큼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이 느꼈던 충격과 공포를 한번 체감해보고 싶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우선 소마 반 그램 복용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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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공부법 - 한 문제를 이해하면 백 문제가 ‘와르르’ 풀리는 가장 단순한 공부 원리
권종철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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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특유의 뜨거운 교육열이 정보 과잉의 시대를 만나 각종 공부법에 대한 컨텐츠가 넘쳐나고 있다. 명문대 출신 유명인들의 공부법은 TV프로그램의 인기 소재로 꾸준히 등장하며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몇 년 전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한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는 엄청난 시청률과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숨어있는 공부 욕구를 건드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점의 신간 코너에서 부지런히 소개되고 있는 각종 공부법에 관한 책들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 여전히 공부가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은 학생들의 공부 욕구를 자극하는 또 한 권의 공부법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부제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권종철 작가의 도미노 공부법 : 한 문제를 건드리면 백 문제가 '와르르' 무너지는 가장 단순한 공부 원리


 공부의 영역에서만큼은 능동적이지 않고서는 효율적일 수 없다. 기술의 영역에서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함으로써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공부는 그러한 단순 숙련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고 바로 이 점에 공부의 깊은 비밀이 숨어 있다. 공부한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공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하며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들인 노력이나 대가에 비해 훌륭한 결과를 얻어내는 것, 다시 말해 효율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p.100


저자는 깊은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올바른 공부 습관을 형성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될 수 있다고 하며 학생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올바로 진단해 자신의 첫 번째 도미노를 찾으라 한다. 깊은 공부의 3요소 -나를 진단하라. 생각의 흐름에 집중하라. 성공의 경험을 축적하라-를 소개하며 과목별 깊은 공부의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다루어할 일의 목록이 아니라 성공의 목록을 가지고 계획하여 성공의 경험을 쌓아가는 학생이 되라고 한다. 깊은 공부를 체화하여 첫 번째 도미노를 찾고, 첫 번째 도미노가 넘어짐으로써 마지막에 커다란 도미노가 굉음을 내며 넘어지는 경험을 맛볼 것인지 이 책을 덮고 또 다른 공부법의 책을 펼쳐 들고 또다시 공부 욕구를 자극만 받을 것인지는 이제 여러분의 몫이다.


첫 번째 도미노를 힘겹게 찾았어도 그 뒤에 너무 큰 도미노를 세우면 그 도미노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너무 작은 도미노를 세워도 문제다. 그 도미노는 튕겨 나가거나 아니면 그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정확하게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릴 수 있는 크기의 도미노를 순서대로 놓지 않으면 도미노 효과는 이어지지 못한다. p.46


학생의 시절이 끝나면 학생의 본분이라는 공부와도 끝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사회인으로서, 학부모로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면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고 계속해서 공부가 필요하다. 평생을 가져가야 할 공부 습관이 학창시절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경험으로 터득한 공부 비법으로 올바른 학습 습관을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을 만난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를 올바로 진단해 첫 번째 도미노를 잘 세우고 그 첫 번째 도미노가 넘어뜨릴 수 있는 크기의 다음 도미노를 순서대로 잘 세우고 넘어뜨려 성공이라는 마지막 도미노가 울리는 굉음을 꼭 들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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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있어요, 지금도 - 소설처럼 살아야만 멋진 인생인가요
서영아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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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하우스가 있다.

그곳의 주인이자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인 티아 할머니가 있고 

모든 일거리나 고민거리들을 순식간에, 단순하게 빛의 속도로 쓸어버리는 빛자루 아줌마가 있다.

꽃집 여자 정원, 어린 엄마 차경 등 티아하우스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식구들이 있고 

신부들이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들러리와 함께 하는 파티를 연다.

미혼에서 기혼으로 건너가는 행성 같은 곳, 미혼과 결혼의 가운데에 놓여있는 섬과 같은 곳, 멋진 여자를 만나기에 정말 좋은 곳.

티아하우스에서는 모든 여자가 특별하다고 말한다. 모든 여자가 생활인이자 예술가라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금요일 밤 티아하우스에서는 다채로운 삶의 궤적을 가진 여자들이 2층 티룸에 모여 앉는다. 

그걸 '브릿지 타임'이라 부른다.

'시간'을 주제로, '마흔'을 부제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매듭'을 주제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여자들을 위한 생일 식탁을 차리기도 한다.

티아하우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지만 세상의 소리가 차단된 곳 '위로의 방'에서 버겁고 무거운 것을 내려놓을 수 있고 

충만함과 비움이 공존하는 '결혼으로 가는 방'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관찰하기 어려운 나 자신을 마주 대하기도 하며 

때로는 철저하게 혼자 있는 공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생에 대한 질문이 마음을 흔들어도, 결국은 깨어 있는 나를 만들 거예요. 더 단단하고 반짝이는 나를 만들겠지요. 원래 아름다운 건 과정이 치열한 거야." p.52


많은 사람들이 성숙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이 없다. 버겁기만 하다. 서른이 되기 전 커다란 내면의 변화와 성장이 찾아와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일상은 고민으로 가득 차있고 상황에 나를 맞추고 있을 뿐이다. 인생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선물이 필요하기도 하고 타인의 응원과 격려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 자신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그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길잡이가 되어준 책. 서영아 작가의  『잘하고 있어요, 지금도』


 "저는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요? 서른이 넘으면 될 줄 알았어요. 마흔이 넘으면 될까요? 두려움도 없고, 그리움도 없고, 그저 평안할까요?" p.233


 "저는 늘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요. 아직 내가 강렬하게 원하는 것도 모르겠고, 결혼도 하지 않았어요. 건너야 할 감정은 너무나 많지요. 과연 건널 수 있을지, 마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p.234


아직 나에게 40대는 멀었다고, 이 책을, 티아하우스를 너무 이르게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현재 나의 고민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대화 속에서 어느새 나도 티아하우스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티아하우스의 여자들처럼 생활인이자,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티아하우스의 이야기는 어른이지만 매일 성장하며 살고 싶은 우리들의 일기가 아닐까?


 "마흔이 되면 시간이 화살 같지. 나를 잃어버리는 시간이 대부분이지 않았을까? 그런 시간들은 지나고 나면 추억이 안 돼. 도대체 기억이 안 나거든." p.37


나는 일찍이 티아하우스를 만났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이변에는  당분간은 티아하우스는 나만 알고 싶다는 욕심이 양면하고 있다. 과연 이게 맞는 건가, 내가 잘 가고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의심이 들 때, 자존감 높은 나의 40대를 위하여 예방주사를 놓아주는 것 같다. 인생 2라운드를 앞둔 당신이 늘 다음 페이지가 설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티아하우스를 방문하여 브릿지 타임에 참석해보고 티아하우스 사람이 되고 예방주사를 맞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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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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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가 까칠하다고 말했다. 아마 그들이 옳으리라. 그는 그 점을 결코 심각하게 반성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사회성이 없다'고도 했다. 오베는 이 말이 자기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싹싹하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그는 그들에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제정신이 아니었다. p.56 

오베라는 남자가 있다

매일 6시 15분 전에 눈을 뜨고, 매일 아침 늘 정확히 똑같은 양의 커피를 사용하는 남자.

그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듯이 밤사이 동네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모든 차고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남자.

모름지기 차는 사브가 최고이며 집이나 차를 수리하지 못하고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의 허풍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

이 까칠한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융통성이 없는 남자'란 아내의 평가를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세상에는 질서가, 반복되는 일상이 있어야 하고 그 일상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로서는 그게 어떻게 못된 성질머리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로 전형적인 심술쟁이 늙은이 오베의 인생이 처음부터 이렇게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그녀를 보기 전까지 그가 사랑했던 유일한 건 숫자였다. 그에게 유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라곤 없었다. 그는 따돌림을 당하지도 않았고 따돌리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스포츠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다. 중심에 있었던 적도 없었고 겉돌았던 적도 없었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성장과정도 그리 많이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딱히 필요가 없는 이상 무언가를 굳이 기억하려 든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저 무척 행복하다가 몇 년 뒤에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기억하는 건 그 정도였다. 
 그는 산수 과목을 기억했다. 숫자들이 그의 머리를 채웠다. 학교에서 수학 시간을 무척이나 기다렸다는 걸 기억했다. 아마 다른 애들에게는 인고의 시간이었겠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나름의 이유로 돌아가고 있은 세상일에 대해, 그 이유에 대해 왜 골똘히 생각해야 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이게 내 모습이고,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 오베에게 이거면 충분했다. p.57-58 


오베였던 남자가 있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살면서 옳은 건 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저 가능한 한 아버지와 많이 닮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아버지마저 죽었고 열여섯, 그는 원래 가족을 대체할 자기 가정을 꾸릴 시간을 가져보기도 훨씬 전에 가족을 잃은 독특한 종류의 고독을 경험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을 흑백으로만 보는 오베에게 색깔인 그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고 고맙게도 그녀는 오베 자신조차 모르는 춤추는 그의 내면을 알아주는 사람이다. 

인생이 다시는 전과 같지 않게 되었지만 그녀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 주위엔 아무도 없다.

 "보고싶어." 그가 속삭였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봐. p.55 


세상 참 가혹하다

오베는 하나님과 우주와 기타 세상 모든 것이 이기도록​ 놔두려 하지 않는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 

그는 평화롭게 죽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오베가 이기도록 놔두려 하지 않는다. 

조용하던 그의 삶에 정신 나간 이란 임산부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멀대 남편 그리고 그들의 제멋대로인 아이들, 과체중 알레르기 환자, 동성애자, 기자, 고양이가 그의 집 대문을 거세게 두드려댄다. 

오베의 죽는 날은 계속해서 미루어지고 있다.​

  오베는 작가가 애정을 담아 탄생시킨 인물이다. 『해리포터』에서 조앤 K. 롤링이 자신이 증오하는 인물을 사심을 담아 작정하고 만든 버논 이모부가 아니기 때문에 작가 자신이 아버지와 닮은 점이 많길 바라는 소망을 오베에게 적용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까칠함과 심술궂음이 마냥 밉지만은 않다. 과거 아버지와의 추억에서, 아내 소냐와의 만남에서 독자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고맙게도 오베도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변한다. 저런 사람이 사랑은 어떻게 하나 의심스럽지만 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이해하는 여자를 만났고 언제나 제 역할을 해내는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순정마초가 되고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가 된다. 어느새 그는 제멋대로인 이웃 아이들의 눈에 제일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컬러로 표현된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으로 -그가 츤데레라는 표현을 알 리가 없지만-보답하며 종래엔 유쾌함까지 보여준다. 

 『오베라는 남자』는 『밀레니엄』 시리즈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스웨덴 소설이었다. 두 소설의 공통점으로 한 나라 문학의 특징이라 단정할 순 없지만 두 소설은 닮은 점이 많았다. 두 소설 모두 캐릭터가 가진 힘이 굉장했고 세계 최고 복지 국가인 스웨덴의 이른바 '하얀 셔츠' 군단(사회복지기관, 시의회 등)에 대한 냉소도 끊임없다. 두 소설의 주인공인 오베와 리스베트는 누가 봐도 외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을 지키며 타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마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 같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고슴도치는 서로를 안아주지 못한다.

 

 

 

 책장을 덮고 난 후 책꽂이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오베에게 어느 자리를 내줘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대개 장르별, 국가별로 분류되어 있는지라 스웨덴 문학이란 이유로 『밀레니엄』 옆에 꽃아 두긴 했지만 오베와 리스베트, 미카엘은 서로 친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리스베트는 시크하게 오베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고 오베는 그녀가 사사건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책꽂이 어느 자리를 내줘도 오베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책꽂이 주인에게 불평불만이 많은 까칠한 소설책이 생겼다. 이 책이 나를 조용히 그냥 지나치면 섭섭할 것 같다. 오베의 투덜거림이 더해질수록 칭찬으로 듣고 미소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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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황경신의 한뼘노트
황경신 글, 이인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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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신의 글과 그림은 익숙한 조합이다. 『PAPER연재글부터 수많은 에세이는 물론 소설에도 늘 그림이 있었다. 이인 화백과 호흡을 맞추어 써 내려간 에세이라는 신간 소식이 들렸을 때 『눈을 감으면』에서 이인 화백의 그림과 함께 한 에필로그의 연장선상이라 기대했었다. 『그림 같은 세상』, 『그림 같은 신화』나 『눈을 감으면』에서 작가는 그림을 화가나 미술사에 관한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감수성으로 번역하여 전달해주었고 여러 화가와 작품 속 인물이 아닌 한 화가의 작품만을 다룰 때 화가와 작가의 호흡이, 작가의 짧은 에세이 간의 호흡이 궁금했고 기대됐다. 

 하지만 내가 환경신 작가를 좀 안다는 자만심 때문이었는지 생각과 달랐던 책의 구성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고전 서양화와 황경신 작가의 글의 조합에 익숙했던 탓에 이인 화백의 추상화엔 황경신 작가의 이야기에 지칭될만한 인물이 없기도 했고 미술에 관해 막눈이나 다름없는 나로서는 화가가 그린 떨림과 작가가 쓴 여운의 호흡을 맞춰가질 못해 독서 초반엔 좀처럼 진도가 못 나가기도 했다.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바보 같은, 심지어 사랑이 아닌 짓들까지도 용서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러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게 되면 뭔가가 과해지고 뭔가가 모자란다. 말을 아껴야 할 때 너무 많은 말들을 해버린다거나, 손을 거두어야 할 때 옷깃을 붙잡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한 번 템포가 뒤틀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결국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당신이 감추고 있는 것들이 출렁이다 결국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찰나를 낚아채기 위해. 마치 캄캄한 밤의 끝에서 동그란 해가 솟아올라 모든 세계를 환하고 투명하게 밝히듯이. p.43-44

 마치 이런 내 상황 다 안다는 듯이 나타나주었던 문장.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한자를 새롭게 해석하는 부분에선 역시 황경신이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그림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뜻풀이가 아닌 황경신 특유의 감수성으로 풀어지는 이야기는 그림뿐만 아니라 한자를 풀어내는 그녀만의 남다른 시야와 '황경신 에세이'라는 강력한 필체를 무기로 가진 작가답게 스토리텔링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희망'의 '희'는 '드물 희'인지 '바랄 희'인지 여운을 남겨두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따로 한 권의 책이 나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림과 한자 그다음은 어떤 분야인지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기도 한다.


 그녀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보고 들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렸다. 섬세한 감각으로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고, 예민한 촉각으로 길을 열었다. 누구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들을 열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또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멀어지는 것들과 변해가는 것들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았고, 떠나가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지 않았다. 어이없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버렸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과장하지 않았다. p.264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위 문장을 읽는 순간 작가가 작가 자신에 대해 썼다고 해도 동의가 될 만큼 그녀가 황경신으로 읽혔다. 보고 들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고, 섬세한 감각으로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고, 예민한 촉각으로 길을 열고, 누구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들을 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황경신 작가. 

 

 월 초마다 도서관 연속간행물실에서 『PAPER』를 넘겨보면서부터, 그녀의 무수한 책들 그리고 이번에 만난 신작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까지. 매번 기대가 커도 그녀의 감성적인 글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고 그녀의 감수성 DNA와 필체 DNA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을 자신만의 언어로 써 내려가서는 독자의 감성에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 울림에는 위로의 마법이라도 있는 건지 그녀의 글은 많은 위안이 되었다. 비슷한 다른 작가가 있나, 다른 작품이 있나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글 자체가 '황경신'이라는 하나의 장르이고 브랜드이다. 경제학 용어로 빗대어 표현하자면 황경신은 대체재도 보완재도 없는 독립재인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바보 같은, 심지어 사랑이 아닌 짓들까지도 용서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러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게 되면 뭔가가 과해지고 뭔가가 모자란다. 말을 아껴야 할 때 너무 많은 말들을 해버린다거나, 손을 거두어야 할 때 옷깃을 붙잡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한 번 템포가 뒤틀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결국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당신이 감추고 있는 것들이 출렁이다 결국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찰나를 낚아채기 위해. 마치 캄캄한 밤의 끝에서 동그란 해가 솟아올라 모든 세계를 환하고 투명하게 밝히듯이. p.43-44

그녀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보고 들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렸다. 섬세한 감각으로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고, 예민한 촉각으로 길을 열었다. 누구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들을 열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또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멀어지는 것들과 변해가는 것들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았고, 떠나가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지 않았다. 어이없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버렸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과장하지 않았다.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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