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황경신의 한뼘노트
황경신 글, 이인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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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신의 글과 그림은 익숙한 조합이다. 『PAPER연재글부터 수많은 에세이는 물론 소설에도 늘 그림이 있었다. 이인 화백과 호흡을 맞추어 써 내려간 에세이라는 신간 소식이 들렸을 때 『눈을 감으면』에서 이인 화백의 그림과 함께 한 에필로그의 연장선상이라 기대했었다. 『그림 같은 세상』, 『그림 같은 신화』나 『눈을 감으면』에서 작가는 그림을 화가나 미술사에 관한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감수성으로 번역하여 전달해주었고 여러 화가와 작품 속 인물이 아닌 한 화가의 작품만을 다룰 때 화가와 작가의 호흡이, 작가의 짧은 에세이 간의 호흡이 궁금했고 기대됐다. 

 하지만 내가 환경신 작가를 좀 안다는 자만심 때문이었는지 생각과 달랐던 책의 구성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고전 서양화와 황경신 작가의 글의 조합에 익숙했던 탓에 이인 화백의 추상화엔 황경신 작가의 이야기에 지칭될만한 인물이 없기도 했고 미술에 관해 막눈이나 다름없는 나로서는 화가가 그린 떨림과 작가가 쓴 여운의 호흡을 맞춰가질 못해 독서 초반엔 좀처럼 진도가 못 나가기도 했다.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바보 같은, 심지어 사랑이 아닌 짓들까지도 용서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러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게 되면 뭔가가 과해지고 뭔가가 모자란다. 말을 아껴야 할 때 너무 많은 말들을 해버린다거나, 손을 거두어야 할 때 옷깃을 붙잡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한 번 템포가 뒤틀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결국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당신이 감추고 있는 것들이 출렁이다 결국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찰나를 낚아채기 위해. 마치 캄캄한 밤의 끝에서 동그란 해가 솟아올라 모든 세계를 환하고 투명하게 밝히듯이. p.43-44

 마치 이런 내 상황 다 안다는 듯이 나타나주었던 문장.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한자를 새롭게 해석하는 부분에선 역시 황경신이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그림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뜻풀이가 아닌 황경신 특유의 감수성으로 풀어지는 이야기는 그림뿐만 아니라 한자를 풀어내는 그녀만의 남다른 시야와 '황경신 에세이'라는 강력한 필체를 무기로 가진 작가답게 스토리텔링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희망'의 '희'는 '드물 희'인지 '바랄 희'인지 여운을 남겨두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따로 한 권의 책이 나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림과 한자 그다음은 어떤 분야인지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기도 한다.


 그녀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보고 들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렸다. 섬세한 감각으로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고, 예민한 촉각으로 길을 열었다. 누구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들을 열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또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멀어지는 것들과 변해가는 것들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았고, 떠나가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지 않았다. 어이없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버렸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과장하지 않았다. p.264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위 문장을 읽는 순간 작가가 작가 자신에 대해 썼다고 해도 동의가 될 만큼 그녀가 황경신으로 읽혔다. 보고 들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고, 섬세한 감각으로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고, 예민한 촉각으로 길을 열고, 누구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들을 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황경신 작가. 

 

 월 초마다 도서관 연속간행물실에서 『PAPER』를 넘겨보면서부터, 그녀의 무수한 책들 그리고 이번에 만난 신작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까지. 매번 기대가 커도 그녀의 감성적인 글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고 그녀의 감수성 DNA와 필체 DNA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을 자신만의 언어로 써 내려가서는 독자의 감성에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 울림에는 위로의 마법이라도 있는 건지 그녀의 글은 많은 위안이 되었다. 비슷한 다른 작가가 있나, 다른 작품이 있나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글 자체가 '황경신'이라는 하나의 장르이고 브랜드이다. 경제학 용어로 빗대어 표현하자면 황경신은 대체재도 보완재도 없는 독립재인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바보 같은, 심지어 사랑이 아닌 짓들까지도 용서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러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게 되면 뭔가가 과해지고 뭔가가 모자란다. 말을 아껴야 할 때 너무 많은 말들을 해버린다거나, 손을 거두어야 할 때 옷깃을 붙잡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한 번 템포가 뒤틀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결국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당신이 감추고 있는 것들이 출렁이다 결국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찰나를 낚아채기 위해. 마치 캄캄한 밤의 끝에서 동그란 해가 솟아올라 모든 세계를 환하고 투명하게 밝히듯이. p.43-44

그녀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보고 들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렸다. 섬세한 감각으로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고, 예민한 촉각으로 길을 열었다. 누구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들을 열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또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멀어지는 것들과 변해가는 것들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았고, 떠나가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지 않았다. 어이없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버렸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과장하지 않았다.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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