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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 - 진짜 연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요조 (Yozoh) 외 지음 / 부키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가을이다. 길고 긴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잠깐 스쳐가는 짧은 계절인데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단풍은 물들고 사람들은 독서를 해야 하고 가을도 타야 해서 자연도 사람도 분주하고 바쁜 계절이다. 또 달력이 한 장 넘어가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음에 대책 없이 공허해지는데 독서의 계절 가을에 가을을 타는데 완벽함을 더해줄 에세이를 만났다.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이 책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20명의 필자가 '연애소설'이라는 키워드로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금정연, 김민정, 김보통, 김소연, 김종관, 김중혁, 박솔뫼, 박준, 박현주, 배명훈,
백민석, 서민, 안은별, 요조, 이도우, 정성일, 정세랑, 정지돈, 주영준, 황인찬.
단풍보다 더 화려한 20평의 필자 리스트를 보고 이 책을 그냥 지나치긴 힘든 일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는 필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필자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분들이다. 최근에 작품을 접하게 되어 알게 된 작가가 있는가 하면 한때 나만 알고 싶은 작가였는데 이젠 너무 유명해져서 섭섭한(?) 작가가 있고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해서 신작이 나올 때마다 챙겨 읽는 작가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 이전 작품들을 부지런히 찾아보게 될 작가도 있다. 정말이지 나는 이 책이 구충제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엮은 책이라 해도 눈에 하트를 달고 읽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가을에 연애소설에 관한 에세이라니 존재만으로도 마냥 고마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연애는 하는 것, 소설은 읽는 것, 시간은 필요한 것.
20명의 필자가 연애소설을 이야기한다. 자신들의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고 연애소설을 이야기하며 많은 연애소설과 작가와 영화와 음악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을 펼쳐들기 전엔 그들이 들려주는 연애소설 리스트가 궁금했다. 오랜 덕질 덕분에 누군가의 리스트는 짐작이 갔고 단지 나와 동갑이라는 이유 하나로 누군가의 리스트가 특별히 더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흥미롭게 이 책을 읽어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사이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들기 전 침대에서 나는 이 책을 꺼내들었고 20명의 필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책과 영화가 궁금했고 내가 봤던 책과 영화가 새롭게 보였다. 그러는 사이 단풍이 예쁘게 물들고 가을비가 내리고 단풍이 떨어졌다.
흠집이 난 구리 주전자 같은 사람. 사랑도 각인되고 상처도 각인되고 도무지 유연한 탄력성이라곤 없는 재질의 사람. 흠집이 난 구리 주전자는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고 버리려 할 때 기꺼이 그러라고 한다. 자존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구리 주전자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그걸 과소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납지 않은 고집스러움이 남기는 인상과 메시지를 우린 너무 쉽게 지나친다. 구리 주전자의 사랑법은 소심하지도 않고, 오래, 아주 오래 기다릴 만큼 강하기도 하다. 다만 그 강함이 반항보다는 인내와 기다림에 가까울 뿐. 그래서 사랑도 복수도 슬픔도 오래 기다려서 이룬다. p.133 이도우 「가스등이 어두워질 때」
박준 시인은 서점 대여 코너에 있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처음부터 읽는 대신 앞서 책을 읽은 이들이 쳐 놓은 밑줄들을 먼저 읽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이 책에 언급된 연애소설들을 그렇게 읽어보고 싶다. 필자들이 인용한 문장들을 먼저 찾아 읽고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에서 들려줬던 이야기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야행」에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까지 그렇게 읽어보고 싶다. 나는 기꺼이 캐서린처럼 흠집이 난 구리 주전자 같은 사람이 되어서 이 책과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무수한 연애소설들이 주는 각인을 간직하며 살고 싶다. 연애를 하고 소설을 읽고 시간을 필요로 하면서 사랑과 상처가 남기는 각인을 간직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에 친절하고 연애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5년 가을, 나는 너무 쉽게 이 책과 사랑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