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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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라디오를 듣다가 해외여행을 가면 꼭 서점에 들러서 그 나라의 언어로 된 『어린 왕자』 책을 사 와서 모은다는 어느 청취자의 사연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었는데 역시 나만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아니었는지 라디오 진행자가 다른 매체에서 그 사연을 다시 언급하기도 했었다. 청취자의 서재가 궁금하기도 하고 왜 나는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싶어 부럽기도 많이 부러웠는데 어느 나라의 서점에 들러도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어린 왕자』는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어린 왕자』는 한 번만 읽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어린이 문고본으로 만났던 『어린 왕자』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글자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어린이인 나의 눈에도 모자로 보였던 그림이 사실은 모자가 아니라 보아 구렁이가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왜 이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어린 왕자』를 반도 넘기지 못하고 책장에 고이 모셔 두었고 오래 잊고 살았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었던 건 『어린 왕자』를 두고 어려웠던 책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서 다시 어린 왕자를 찾게 되는 시점이 오는 것도, 다시 읽어본 『어린 왕자』의 문장이 이해가 되고 책장이 넘어가면서 밀려오는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여러 번 읽을 때마다 그때그때 다른 인상을 받는다는 것 역시 나 혼자만 그러는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 어린이 문고본 『어린 왕자』를 읽고 있는 나는 제대로 된 『어린 왕자』를 사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어린 왕자』를 찾는 일이 나에겐 밤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처럼 느껴졌다. 『어린 왕자』를 출간하지 않은 출판사가 없을 정도로 서점에 가면 여러 종류의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고 고르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도서정가제 이전에 빈번했던 파격적인 세일에도 예쁜 일러스트에도 혹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늦더라도 제대로 된 책을 사야 한다는 나만의 고집이 있었는데 그런 나에게 상이라도 내리는 건지 열린책들에서 『어린 왕자』가 출간됐다.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 만으로도 큰 신뢰가 가는데 거기다 황현산 선생님의 번역으로 나왔다고 하니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끈질기게 기다린 '제대로 된 『어린 왕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아주 늦게 그리고 힘들게 어린이 문고본을 졸업하고 제대로 읽어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읽은 『어린 왕자』는 여전했다.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는 사실 처음 출간됐던 73년 전이나 내가 처음 펼쳤던 20여 년 전이나 현재 2015년의 가을이나 변함이 없었다. 어린 왕자는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다. 그러니까 틀린 건 나다. 나는 지금도 틀리고 그때도 틀리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을 알아보고 『어린 왕자』를 재미있게 읽었더라면 그리고 나이를 먹어 갈수록 『어린 왕자』가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 된다면 나는 진작에 뭐라도 되어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나는 참 이상한 어른에서 아무래도 참 이상한 어른, 아무리 봐도 아주아주 이상한 어른 그리고 확실히 이상 야릇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어딘가에 있으면서 가끔씩 생각이 날 때마다 찾아 읽었던 『어린 왕자』는 꾸준히 이상함을 업그레이드하는 어른인 나에게 항상 아주 너그러웠다. 명대사가 가슴을 사무치게 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어린 왕자가 여러 별을 여행하고 지구를 여행하며 마주한 어른들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반성문으로 다가오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어린 왕자』를 펼쳐 들었다가도 책을 덮을 즈음엔 자주 부끄러워졌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종내엔 이 책이 아주 무서운 인상을 남기며 읽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록 어린이 문고본이었으나 그동안 『어린 왕자』를 적게 읽은 것도 아니었는데 『어린 왕자』에는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여전히 나는 사막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어린 왕자』를 온전히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른인지도 모르겠다. 시기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쩌면 내가 구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어린 왕자』에 더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의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간절히 길들여지고 싶다. 그토록 기다렸던 책을 손에 쥐고 큰 기대를 가지고 즐거운 독서를 했음에도 그동안 『어린 왕자』를 읽어왔던 지난 시간들이 비어 있는 것 같다. 『어린 왕자』에 따르면 내가 이 책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내가 『어린 왕자』에 소비한 시간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 길들여지고 싶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린 왕자』를 길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길들인 것에 나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다. 나는 『어린 왕자』에 책임이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어린 왕자』를 찾을 땐 가벼운 마음이 아닌 책임감을 가지고 읽어봐야겠다. 그때 『어린 왕자』는 나에게 어떤 새로운 인상을 남겨줄지 기대가 되는 동시에 내가 『어린 왕자』를 온전히 다 이해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무언가를 찾게 되는 그날이 오게 될까 봐 두렵다. 서른 초반에 더 이상 남들에게 읽는 모습이 들켜도 부끄럽지 않게 될(이제는 자랑까지 할 수 있게 된) 『어린 왕자』를 읽고 받은 나의 인상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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