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만이 하는 것 The Ride of a Lifetime - CEO 밥 아이거가 직접 쓴 디즈니 제국의 비밀
로버트 아이거 지음, 안진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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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아침은 엄마가 깨워주지 않아도 혼자서 일어나 <디즈니 만화동산>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어린이가 자라 지난 세월 동안 디즈니가 유명 영화사들을 인수합병하며 관객층을 확장시키고 기업의 몸체를 키워나가는 것을 뉴스로 접하며 그 과정들을 생생히 지켜보고 디즈니 플러스의 한국 론칭 뉴스를 기다리는 어른이가 되었다. 동화 속 공주님들의 이야기에 대한 환상이 다 사라져버린 지 오래됐어도 여전히 많은 어른들에게 있어 디즈니는 현재진행형이자 동시에 미래형이다.

 

ABC TV 스튜디오의 말단 보조제작자로 입사해 월트디즈니 컴퍼니 회장 취임까지, 디즈니의 남다른 활약과 변신, 성공의 중심에 있는 로버트 아이거가 CEO 재직 당시 디즈니 제국의 비밀을 직접 쓴 책 『디즈니만이 하는 것』이 드디어 한국에도 출간이 되었다고 하니 반가움은 디즈니 영화 개봉 소식보다 더 반가웠다. 아마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각종 매체의 '올해의 책' 선정과 수많은 유명인들의 추천 등 화려한 수식어들을 다른 책들의 띠지에서 만나면 책에 대한 집중시키고 기대감을 높여주지만 로버트 아이거의 『디즈니만이 하는 것』에서 만난 이런 수식어들은 책을 읽기도 전에 동의부터 하게 됐다. 디즈니 CEO가 직접 쓴 디즈니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 1위를 안 하면 그건 출판시장의 문제로 봐야 할 일일 것이다.

 

 CEO의 지위를 승계한 나에게 주어진 가장 우선적 임무는 디즈니 브랜드와 디즈니 에니메이션의 희생이었다. 픽사 인수로 존과 에드가 애니메이션 부문의 경영을 맡게 된 터라 그 문제는 해결책을 마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디즈니애니메이션에 대한 걱정이 줄자 내게는 다른 인수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그 상대방이 명백히 '디즈니스러운' 기업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사실 나는 안정성만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픽사 인수도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한 경우였다. 

 어쩌면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한 무리한 사업 추진보다는 한동안 디즈니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픽사가 디즈니의 일부가 되고 3년이 지난 시점에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전보다 훨씬 더 극적인 변화가 일었다. 그 점만 보더라도 야심차게 사고하며 우리의 동력을 활용해 스토리텔링 브랜드의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마블 인수와 관련해 내가 가지고 있던 걱정은 디즈니보다 확연히 급진적인 기업의 인수를 경계하던 사람들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마블이 디즈니에 미칠 영향이 아니라 마블의 충성 팬들이 디즈니와 같은 기업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는 뜻이다.

 디즈니가 마블을 인수한다면 그들이 가진 가치 중 일부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가? 케빈 메이어와 팀원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케빈과 나는 수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2개의 브랜드가 각각의 개성을 유지하도록 독립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2개의 각기 다른 브랜드가 서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p.287-288


다니던 ABC TV가 디즈니에 인수합병되고 디즈니의 위기가 거론되던 시기 디즈니 고위 경영진에 합류하여 과감한 시도와 변화로 독보적인 성공을 이끌어냈던 로버트 아이거가 디즈니 역사의 증인으로 지난 세월 동안 디즈니가 겪었던 실패와 위기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더 크게 성장시킨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캐릭터와 스토리의 전통적 보수 세계관을 깨트리며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 나가고 편견을 깨부수며 <블랙 팬서>와 <캡틴 마블>을 성공시킨, 세상을 바꿔놓은 이야기들이 짜릿하다. 픽사, 마블 인수는 이미 자세히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그 과정에서 스티브 잡스와, 아이크 펄머터와의 만남과 자세한 대화는 로버트 아이거만이 들려주는 이야기라 솔깃하다. 디즈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디즈니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짜릿하고 솔깃하니 디즈니 입장에선 웃어야 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CEO와 2인자 사이의 역학은 종종 긴장에 휩싸이는 게 사실이다. 누구나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길 원한다. 비결은 자신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수준의 자의식을 갖추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훌륭한 리더십은 대체 불가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아랫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있다. 리더의 의사결정 과정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자질을 파악해 그들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아직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없는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주기도 해야 한다. 나 역시 지금까지 그런 일들을 해야만 했다. p.142


로버트 아이거의 『디즈니만이 하는 것』은 세계적 기업인 디즈니의 성공만 말하는 책이 아니라 동시에 로버트 아이거의 성공과 리더십이 읽혀서 더 좋았다. 400페이지는 너무 짧다. 4,000페이지라도 내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로버트 아이거가 들려주는 많은 이야기들이 다 좋았다. 본인이 일궈낸 성공담을 자랑처럼 늘어놓고 자화자찬하는 책이 아니지만 어느새 로버트 아이거는 현실에서 만난 히어로가 되었다. 지금까지 디즈니의 콘텐츠를 단순히 하나의 콘텐츠로 만 소비했었다면 『디즈니만이 하는 것』을 읽고 난 이후에는 디즈니라는 기업과 로버트 아이거의 경영이 동시에 보일 것 같다. 애플을 보면 지금까지도 당연히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엄마가 깨우지 않아도 혼자 일어나 디즈니 만화동산을 챙겨보던 어린이는 자라서 디즈니 CEO가 지난 디즈니의 역경과 성공을 들려주는 책에 열광하는 어른이가 되었다. 지금까지 디즈니와 쌓아온 개인적 기억과 추억들 만큼이나 앞으로 디즈니와 쌓게 될 기억과 추억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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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말 것 - 나를 잃지 않고 관계를 단단하게 지켜나가기 위해
김달 지음 / 비에이블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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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 작가의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말 것』은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줄 에세이일 거라 생각했다. SNS 감성의 글들이 왠지 모르게 낯익지만 나는 절대 쓰지 못할 감성의 에세이가 무수한 공감과 위로가 되어주고 종내엔 독자들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 거라 생각하고 딱 그 감성을 기대했었는데 웬걸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보고 고민해봤던 사연들을 현실적으로 단단하게 조언해주는 - 그야말로 '말랑말랑'과는 거리가 먼 - 글들이 공감과 위로를 넘어 나를 찾아준다. 그러니까 나에게 김달 작가의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말 것』은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책이었다.

 

상대에 집중했던 시간을 조금 줄이고 본인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늘려보자. 원래 연애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행복을 느끼며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해야 본인과 상대 둘 다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을 나눌 수 있다. 단지 외로워서 그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의 관계는 본인과 상대 둘 다 지치고 힘들게 만들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고 본인이 먼저 행복해질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잊지 말자. 내가 있어서 그 사람이 있는 거지, 그 사람이 내 존재의 이유는 아니다. p.170-171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 혹은 알면서도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다.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풀어보려 하지만 같은 말의 도돌이표 혹은 제자리걸음인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반대로 정답을 알면서도 엉뚱한 길을 자처하는, 자신을 고치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친구를 마주하고서 내가 왜 내 시간, 돈 버려가며 이러고 있나 자괴감이 들었던 경우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말 것』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행동으로 옮기게 해준다. 넘치게 공감을 하는 사연들과 작가의 솔루션은 물론이고 내 상황과는 맞지 않는 고민과 사연들도 김달 작가의 진심 어린 조언은 내 편이 되어주는 것 같은 든든한 감정을 전해준다.

 

흘러가는 시간이 내 인생을 망치도록 방치할 것인지, 1초라도 나를 발전시키는 데 쓸 것인지는 본인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연약해서 힘든 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어진다. 나 역시 걱정거리가 생길 때면 친구들을 불러내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두 번 위로받고 나면, 스스로 극복해야겠다는 의지보다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커질 뿐, 나아지는 게 없었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 위로는 해주겠지만 그 이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결국 자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나뿐이다. p.224

 

대부분 사랑, 연애에 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 나를 사랑하고 자존감을 되찾고 키워가는 과정으로 이어져 공감과 감동이 배가 된다. 영혼 없는 공감과 위로로 시간을 낭비했던 과거의 시간들이 떠오르며 이건 진짜라는 확신을 심어준다. 진심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김달 작가를 내 사람으로 주변에 두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김달 작가처럼 명쾌하면서도 진심으로 위로와 해결책을 건넬 수 있는 사람까지는 잘 모르겠고...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같은 고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나저나 책을 읽으며 떠올린 인물들, 과거의 기억들이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는 건 조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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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나고 나를 알았다
이근대 지음, 소리여행 그림 / 마음서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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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위로의 감정을 건네줄 거라 기대했던 이근대 작가의 신작 『너를 만나고 나를 알았다』는 에세이보다는 시에 더 가까워 보인다. 사랑과 인생에 관한 짧은 호흡이지만 오래도록 마음을 울리는 이근대 작가의 따뜻한 문장과 소리여행 작가의 일러스트가 만나 글과 그림이 주는 여운을 오래 간직하게 해준다. 독자들을 향해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보내는 작가의 말을 시작으로 에세이는 천천히 독자들 마음에 스며든다. 

 

이 책이 사랑으로 살아가는 그대에게 

삶을 예쁘게 꽃피우는 꽃씨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이별을 맞이한 그대에게

가슴 뭉클한 위로와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슬픔에 휩싸인 그대에게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꿈과 희망을 찾으려는 그대에게 

끝없이 솟아나는 힘과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절망이라는 사막을 헤매고 있는 그대에게

오아시스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표지 디자인과 제목, 전체적인 책의 이미지가 여성 독자들을 타깃으로 한 것처럼 느껴진 것이 책의 첫인상이었다. 남성 작가의 짧은 토막의 글들이 여성 독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건드리고 위로와 응원으로 보살펴주는 책일 거라는 예감에 작가가 전하는 감성이 궁금했었는데 편견과 선입견에 그만 책 속에 숨겨진 진가를 제대로 몰라봤다. 사랑과 인생을 제대로 통달한듯한 작가의 문장들은 상처받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손길 같기도 하고 온몸으로 불을 밝히는 등대 같기도 하다. SNS 스타 시인이라는 타이틀과 책의 전체적인 이미지와 글의 분위기는 당연히 젊은 작가를 예상하게 했지만 사랑과 인생을 바라보고 독자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내는 방식에서 연륜이 느껴지며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한 흰머리의 작가 사진은 큰 반전이었다. 이토록 큰 편견과 선입견을 가진 내가 오히려 이근대 작가보다 생각은 더 늙었을 거 같다.

 

깊은 사랑

 

너를 

놓아줄 자신이 없다. 

 

너 때문에 

나는 너무 깊이 아파버렸다.

 

너도 나처럼

죽도록 아팠으면 좋겠다.

 

나 없으면 너도 없다고

나에게 미쳐버렸으면 좋겠다. p.90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 건네는 작품이라 부담 없이 선물을 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자극적인 미디어, 콘텐츠가 넘쳐나고 무례함을 솔직함으로 무장하는 시대에 이근대 작가의 『너를 만나고 나를 알았다』는 짧은 문장들 속에서 따뜻한 진심이 곳곳에서 드러나며 글의 온기를 고스란히 마음으로 전해주었다. 이근대 작가의 글처럼 거창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짧은 문장에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공감만으로 큰 위로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책을 읽어가는 내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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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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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이 출간됐다. 소설과 에세이로 장르는 다르나 이번에도 박상영 작가와 사이좋게 비슷한 시기에 책을 출간하며 한국문학을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작품 출간의 기쁨과 더불어 이벤트 같은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첫 번째 소설집 『여름, 스피드』로 김봉곤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알린 뒤 2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의 출간을 반가워하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서평단 맛집 창비에서 수록된 작품 중 표제작 「시절과 기분」과 「엔드 게임」 가제본을 랜덤으로 보내주는 사전서평단을 모집했고 김봉곤 작가는 창비 편집부가 이면지 풍년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세상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사전서평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김봉곤 작가를 향한 팬심을 조금 엉뚱하게 표현했던 나에게 도착한 작품은 「엔드 게임」이었다.


 우리는 연인이던 시절, 함께 살던 시절의 사람이나 불행, 추억할 만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사랑했던 우리에 대해서는 마치 그랬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을 꺼내지 않는다. 우리가 가족이었고 룸메이트였던 때의 일상에 대해 얼마든 말해도 좋았지만,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때 너가 나를 찾아와서 얼마나 기뻤는지, 셰어하우스에서 숨죽여 사랑을 나눈 일이 얼마나 짜릿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가 내게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던 이유를 알 수 없다.


한 작품만 먼저 읽어봤지만 첫 번째 소설집 『여름, 스피드』에서 반했던 김봉곤의 작품세계가 고스란히 전해지며 두 번째 소설집에 대한 기대와 반가움, 흥분의 감정이 물밀듯 밀려온다. 주인공이 당연하게 김봉곤 작가로 읽히고 지나간 사랑에 대해 넘치는 심도 깊은 감정과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들을 보며 여전함에 고마움이 느껴진다. '가장 소중한 걸 잃고 가장 바라는 걸 얻었어.'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을 사무치게 하는데 전반적으로 김봉곤 작가의 작품의 정서는 영화 <봄날은 간다>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엔드 게임」 역시 사랑에 실패해본 사람들이 크게 감응할 수 있는 감정들을 제대로 건드려 주었다.


영화 <봄날의 간다>는 20대에 봤을 때의 감상과 30대에 봤을 때의 감상이 달랐다. 40대에 다시 보면 또 어떻게 다를까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과 기대가 있는데 김봉곤 작가의 작품 역시 그러하다. 나는 경험하지 못한 20대의 독자들은 김봉곤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의문이 크고 시간이 흘러 40대, 50대에 김봉곤 작가의 작품들을 다시 보면 어떤 감정이 들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더불어 40대, 50대에 김봉곤 작가는 어떤 작품들을 써 내려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확실한 건 김봉곤 작가는 사랑을, 사랑의 실패를 제대로 알고 쓸 줄 아는 작가라는 점이다. 『시절과 기분』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어떤 감정들을 건드려주고 어떤 과거의 인물과 기억들을 소환시켜줄지 궁금해진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살아야 하는 시간이 압도적이라는 것.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후자의 편을 들고 싶었다. 그게 훨씬 근사한 태도로 느껴졌으니까. 그래야만 할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결국엔 그럴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언제나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끝내 알 수 없을 거라는, 끝을 알 수 없을 거라는, 끝이 있을 거라는 말이,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아직은 굴복할 수가 없다. 그 사실에, 사실 이전의 말에 미리 지고 싶지 않다. 


TMI를 남발해보자면 현재 나는 김봉곤 작가의 고향에 살고 있다. 유년시절을 진해에서 보내고 대학 진학과 동시에 서울로 상경한 작가와 달리 나는 다 커서 진해에 이사 와서 진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나 향수는 크게 없는 편이다. 김봉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여름, 스피드』를 읽었을 때 주인공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지리적 묘사를 단편소설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다른 독자들은 크게 감응하지 못할 부분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남다른 즐거움이었다. 『시절과 기분』 출간 소식이 전해왔을 때도 자연스럽게 이번 작품집엔 고향에 대한 향수와 묘사가 어떻게 되어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아쉽게도 「엔드 게임」엔 고향에 대한 묘사나 고향에 대한 향수가 특별히 없었지만 수록된 다른 작품들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이제 막 두 번째 소설집을 낸 소설가이고 그 두 번째 소설집도 수록작 중 한 작품만 읽은 상태지만 김봉곤 작가는 작품세계를 깊게 파는 작가라는 인상을 진하게 받았다. 2016년 등단, 2018년 첫 번째 소설집 발표, 2020년 두 번째 소설집 발표.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지금까지의 2년 주기설이 재미있고 다음 작품 발표가 2년 주기설을 연장해갈지, 깨트려버릴지도 개인적으로 흥미롭다. 이별 감성에 독보적이고 대체재가 없는 김봉곤 작가에게 꾸준함과 성실함을 감히 바라본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즐거움을 주는 작가라는 확신을 주는 작가라는 예감이 개인적 바람이 아닌 확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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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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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언니 레이첼과 동생 노라 두 자매는 더없이 돈독했다.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해 런던을 떠나 언니가 있는 외곽 말로 마을에 도착하지만 언니는 살인사건 피의자가 되어 시신으로 발견된다. 

언니의 죽음 이후 몰랐던 언니의 생활이 보이고 노라의 시선은 언니의 죽음에 관한 의심으로 가득 차있다.

누가 언니를 죽인 걸까?

15년 전 언니를 술에 취한 언니에게 묻지마 폭행을 가했던 남자.

언니 집 주변을 배회하여 테넌츠라이트에일을 마시고 던힐을 피우면서 언니를 지켜보던 스토커.

언니와 언니의 개 -경비업체가 키우고 훈련시킨- 를 죽인 사람.

노라가 의심하고 찾는 사람은 한 사람일까, 세 사람일까?

도대체 언니는 왜 죽었을까?

 

'누가 언니한테 이런 짓을 한 거야?'

플린 베리의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는 에드거상 최우수신인상 수상작을 비롯한 무수한 타이틀과 이력들이 신인작가의 작품이지만 작품성에 대한 믿음을 실어줌과 동시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스토리에 관한 의문들이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낸다. 충격적인 언니의 죽음에 경찰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증거를 찾아가는 노라에 빠르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스토리 구조, 각종 수상 이력과 노미네이트 이력, 매체의 찬사들을 통해 추리, 스릴러의 재미를 기대하고 빠져들지만 플린 베리가 인도하는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추리, 스릴러 소설과는 조금 다른 결이다.

 

 남부 런던 억양을 쓰는 키 큰 흑인 남자가 복도에서 나를 맞이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남자가 말한다. "언니분 일은 유감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의 차가 있는 곳까지 그를 따라간다. 우리가 차들 사이를 누비며 나아가는데 빗방울이 앞유리를 때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다음에 보통 뭘 하나요?" 내가 묻는다.

 "집으로 가던데요." 경사가 대답한다. 와이퍼가 유리창에서 빗물을 씻어낸다.

 "경찰이 되신 지는 얼마나 되었죠?"

 "8년이요." 교차로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맞은편의 차들을 확인하는 그가 말을 잇는다. "한 2년만 더 하려고요." p.53


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려 애를 쓰는 노라의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소설에 빠져들지만 레이첼의 죽음에 관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며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보다는 노라의 기억을 통해 과거로부터 소환되는 레이첼을 통해 남은 자들의 상실감에 더욱 집중한다. 기대와 다른 결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노라의 시선으로 따라읽는 독자들도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원인에 대한 궁금증이 그리 급하지 않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어갈수록 집중력이 강해지고 새로운 전개로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며 긴장의 끈을 놓치지 못하게 한다. 


"범인을 찾으면 범인한테 어떻게 해줄까, 계속 그 생각을 하게 돼. 빨리 잡히진 않겠지만." 

미스터리한 사건의 발생, 사건을 추적하는 동생의 모습,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상황. 이야기의 구조의 짜임새가 탄탄하고 생생한 캐릭터들과 인물들이 품고 있는 감정들,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소설이 가진 매력을 더욱 진하게 한다. 하지만 플린 베리는 거기서 만족하고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가진 편견과 차별을 향한 묵직한 메시지를 남기며 데뷔작부터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제대로 남겨준다. 영화화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했지만 과거를 되짚어보고 사건에 대한 집중과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남긴다는 부분에선 <그것이 알고 싶다>와도 닮아 있었다. 엄청난 혼란 틈에서 강력한 반전을 건네는 마지막까지 플린 베리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내공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앞으로 발표될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부분이다. 


 언니 생각을 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추억 하나가 꼬리를 물고 다른 추억으로 이어지고,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는 것만 같다. 몇 시간이고 추억을 곱씹으며 앉아 있으려니 마침내 첫차를 타는 직장인들이 죽상을 지은 채 하나 둘 나타나 어두컴컴한 플랫폼에서 새벽 기차를 기다린다. p.202

 

플린 베리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게 되고 앞으로 발표될 플린 베리의 작품이 늦지 않게 한국어판으로 출간되길 바랄만큼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가 좋았다. 그만큼 '페미니즘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와 그에 대한 홍보에 관한 노파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플린 베리가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들은 영미권 사람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이라는 사실에 대한 공감의 감정과 분노의 감정을 동시에 건네주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소설이 끝나도 여운을 남기며 남아있는데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만 집중하여 책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로부터 차별받거나 평가절하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직 우리 사회는 -어느 쪽을 보나 -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건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까.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는 남은 자들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우선되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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