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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절필 이후, 박범신은 어떻게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비우며 살았을까.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그가 문단에 복귀한 후 내놓은 “빈방” 이라는 소설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빈방”은 작가 박범신이 앞으로 문학의 숲 속으로 걸어가야 할 중요한 지표가 될 듯 싶다.
“빈방”은 생산과 소비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비워야 할 당위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하는 숙명, 비움과 동시에 채워야하는 슬픈 운명을 이 작품 속에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나’는 부르주아이다. 그에게 있어 ‘자본’은 삶을 즐기고 향락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이기도 하지만, 정신적 욕망을 결코 채울 수 있는 목적 상실의 動因 이기도 하다. 그의 생에 대한 환멸적 태도, 무기력한 삶의 자세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혜인, 소설 ‘나’와 극점에 서 있는 인물임과 동시에 거울에 비친 소설 속 '나'가 아니었을까.
박범신은 이전의 작품에서 폭력의 구조적인 근원을 밝히려고 노력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불임의 시대, 그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별똥별”은 물상화된 성적 이미지의 반전을, “빈방”은 거세된 남성적 욕망에 대한 회복을 꿈꾸며, “항아리야 항아리야”는 사랑을 꿈꾸는 관음증으로, “괜찮아, 정말 괜찮아”는 부조리한 시대극을, “감자꽃 필 때”는 삶에 대한 성찰을, “흰 건반 검은 건반”은 소설 ‘나’의 장엄한 상여가(喪輿歌)이며, 불임의 시대가 낳은 종국적 결과이다.
박범신의 역작 “빈방”은 슬프다.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이며 르포이다. 밥 한 술 더 먹기 위해,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했던 그 옛날이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은 별빛이 있어 가야만 하는 길을 환히 밝혀주기라도 했으니 말이다. 어둡고 축축한 이 빈방에 다시 불빛이 환하게 켜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