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다. 한겨레 고전 다시 읽기에 소개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 2006.12.7 /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경제학 용어 중에 ‘트리클 다운’(trickle down)이라는 말이 있다. 돈을 많이 버는 대기업과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주면 이들의 투자와 소비가 촉진되어 결국 저소득층에게도 경제적 이득이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땅바닥을 적시듯 먼저 부자들의 파이가 커지면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떡고물도 커진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한 측면을 요약한 이 용어에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이 빠져있다.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그것이다. 자본주의경제학이 흔히 그렇듯이 뼈와 살이 붙어있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울며 삶을 꾸려가는 그런 살아있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빠져있다. 보통 평등한 사회라고 하면 경제적 평등만 떠올리고 ‘좌파’니 ‘반(反)시장주의자’니 하고 몰아세우지만 실은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란 경제적 배분에 앞서 사람이 사람에 대한 경의와 예의를 지키는 사회를 말할 것이다. 모든 차이에 관계없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는 그런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 몰락에 관한 한 인터뷰에서 인류는 아직까지 한 번도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지 못했다는 촘스키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경제적 평등보다 ‘사람’차별 없어야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는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고 아끼는 그런 사회를 꿈꾸다 자신의 소중한 목숨마저 바쳤던 수많은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들의 희생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는 기계적인 관료체제와 수치화된 경제도표, 관념적인 이념논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발적인 우정과 헌신에 기초한 평등한 공동체의 경험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더구나 놀랍게도 자율과 자치에 토대를 둔 가난한 민중들의 이 아름다운 공동체는 오히려 사람들이 가장 물자에 쪼들리고, 적자생존으로 가장 살기 힘들었던 전시(戰時)에 꽃을 피웠다. 비록 짧았지만 스페인 내전의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웠던 참전경험은 오웰의 사상과 저작에 평생 큰 영향을 끼쳤고, 그 후 오웰은 《동물농장》과 《1984》를 발표하며 영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작가의 한사람이 되었다. 현실의 핵심적인 모순을 비판하고 더 나은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오웰은 1936년 12월 카탈로니아의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당(POUM) 민병대에 자원함으로써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은 겉으로는 프랑코를 위시한 파시스트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했던 공화주의자들 간의 전쟁이었지만 오웰이 민병대에 자원한 것은 그런 관념적인 이념투쟁 때문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전쟁에 관한 신문기사를 쓸 생각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이 통치하고 있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오웰은 그러나 곧 생전 처음 본 놀라운 모습에 감동을 받아 군에 자원하기로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유럽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 모습이란 바로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는 모습이었다. 거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소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었고, 어디에나 부를 과시하는 사람도, 거지도 없었다. 손님들에게 굽신거리는 웨이터도, 팁 때문에 눈치를 보는 엘리베이터 보이도 없었다. 굴종적이거나 격식을 차리는 말투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마치 친구인양 평등한 호칭으로 불렀다. 비록 전쟁으로 인해 빵은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지만 사람들은 수 백 야드까지 뻗은 배급 줄에 서서도 만족스럽고 희망에 차 보였다. 왜냐하면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자본주의라는 기계의 톱니바퀴가 아닌 인간으로서 행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웰은 바르셀로나를 떠나 곧 아라곤 전선에 배치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당의 민병대는 무기도 거의 없었고, 전투훈련도 받지 못한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바르셀로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장교에서 사병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같은 동무였고, 같은 월급을 받았고, 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계급으로 차별받지 않았다. 아라곤 전선에서 경험한 이 ‘이상한’ 사회주의 공동체에 대해 오웰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정치의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이 좀 더 정상적이었던, 서유럽에서 유일한, 한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 아라곤에서는 비록 다 노동자 출신은 아니었지만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같은 수준으로 살면서 평등이라는 말 속에 함께 어울렸다. 이론적으로도 완전히 평등했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 속물근성이나 돈에 대한 악착, 상사에 대한 두려움 등 문명사회에서라면 정상인 많은 동기들이 이곳에서는 간단히 멈춰버렸다. 돈에 오염된 영국 분위기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 없을 수준으로까지 사회의 일상적인 계급구분도 사라졌다. 농부와 우리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누구도 마치 주인인양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못했다.”

물론 현실적인 고통은 많았다. 굶주림과 추위, 더러움과 오물냄새, 그리고 온 몸에 득실대는 이까지 아라곤 전선은 모든 민병대원들에게 극심한 고통의 현장이었지만 마치 하나의 마법처럼 오웰의 마음속에 놀랍도록 아름답게 간직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 상황이 사람들의 반(反)자본주의적 ‘천성’에 가장 잘 맞는, 역설적이게도 평화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리사는 더러운 마당 가운데서 느긋하게 스튜를 젓고, 젊은 병사는 냄새나는 머리를 동지의 어깨에 푹 파묻고 잠자는, 그런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천성이 가장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어도 허위와 권위가 없는 자발적인 우정으로 따뜻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권력자가 두려워하는 건 민중 자치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시스트에 대한 항쟁의 주도권이 스탈린의 지시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면서, 자발적인 민병대들의 활동이 억압당하는 시기가 다가오고야 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스페인 내전 초기 오웰이 맛보았던 민중적 자치, 자율의 공간은 크게 위축되고, 결국은 소멸되는 운명을 맞는다. 오웰은 그런 변모의 과정을 전선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다시 돌아와서 본 바르셀로나의 변화된 모습에서 확인하게 된다. 웨이터들은 다시 존칭어를 쓰기 시작했고, 거지가 넘치는 거리엔 부자들을 위한 비싼 물건들이 전시되고, 계급차별은 다시 부활했다. 한때 같이 파시즘에 맞섰던 공산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을 배신했고, 민병대에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번엔 파시스트의 앞잡이로 몰려 체포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지도자들도 파시스트들이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진심으로는 노동자, 농민의 자치와 자주성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던 사람들의 희생은 이렇게 해서 개죽음이 되었다. 결국 사회주의 코뮨은 실패했고, 그 결과 내전에서 승리한 파시스트 프랑코의 독재 하에서 스페인 민중은 억압과 차별 속에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찍이 조지 오웰이 일시적이나마 경험했던 사람들 간의 자발적 우정은 다시 무차별적인 경쟁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바탕으로 <땅과 자유>라는 영화를 만들었던 영국의 켄 로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적 문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우리가 잠시 작은 고립된 ‘해방구’를 만든다고 해도 마치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그것은 곧 파도에 휩쓸려갈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논리는 너무나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오웰이 경험한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이건 공산주의건 간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민중들의 자율과 자치라는 사실을 극명히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사람들 간의 우정과 환대를 회복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상품이나 기계부품처럼 대하지 않고, 서로서로 돕고 의지하며 삶을 꾸려나가려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적이었던 것이다.《카탈로니아 찬가》는 인간다운 예의와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 ‘권력’의 논리로 좌절하고 마는 20세기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몸소 경험했던 한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증언이다.

(2006.12.7 ㅣ 박혜영<인하대 교수 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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