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한국, 무시당한 자들의 분노로 교정한다!  

[왜 '인정 투쟁'인가]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 프레시안 books 제57호

너무나 분명한, 사람에 관한 두 가지 사실에서 출발하자.

로빈슨 크루소는 예외적 존재이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 살 수밖에 없다. 관념 속에서 개인은 단독자일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 모든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 두 번째 사실. 인간은 먹고살아야 하지만 물질적 궁핍 해결이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생존 그 이상을 원한다. 배부른 돼지가 되었을 때 맛보는 동물적 만족감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사람은 돼지가 아니라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사람에 관한 명백한 변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 교차하는 지점에 '인정'이란 단어가 있다. 인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악셀 호네트는 인간을 규정하는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 빚어내는 풍경을 탐색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얻고 그를 통해 자긍심을 획득하지만, 무시에 의해 자긍심이 훼손되었을 때 투쟁하는 끊임없는 인정 투쟁의 과정이다.

인정 투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독창적이지는 않다. 호네트는 통속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인정이라는 개념을 예나 시기(1801~1807년) 헤겔로부터 빌려왔다. 하지만 인정 투쟁 개념을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호네트의 솜씨는 능숙하며 충분히 독창적이다. 호네트는 헤겔로부터 물려받은 인정 투쟁 모델을 조지 허버트 미드의 사회심리학과 결합시켜 헤겔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한다.

초기 헤겔의 인정 투쟁 모델이 후기의 노동 모델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비판하는 호네트의 모습에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3세대라는 호네트의 별칭을 떠올리게 된다. 호네트의 스승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주의 모델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미드를 비롯한 사회학 이론과 결합시킴으로써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발전시켰던 것과 유사한 궤적을 호네트 역시 밟는다. 스승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길을 찾는 호네트는 잊혔던 헤겔의 인정 모델에 주목한다.
 
<인정 투쟁>(문성훈·이현재 옮김, 사월의책 펴냄)의 1부는 헤겔의 인정 모델을 발굴하는 호네트의 시도가 집약되어 있다. 그래서 1부는 헤겔에 관심이 없거나, 헤겔을 잘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독해하기에 지루할 수도 있다. 1부의 지루함은 교수 자격 청구 논문으로 쓰인 이 책의 배경과 크게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1부를 넘기고 나면 헤겔의 인정 투쟁 모델이 미드와 결합되어 현대화되는 매우 흥미로운 2부가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인정 투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상호주관적 인정의 유형들을 다루는 2부의 5장과 개인의 자기 정체성과 무시를 다루고 있는 6장이다.

인정은 전문적 학술 용어가 아니라 일상에서도 다양한 맥락에서 다채롭게 사용되는 일상 특유의 현장감이 넘치는 단어이다. 일상의 가장 현장감 있는 개념인 인정을 사상사적 맥락과 결합시킴으로써, 인정은 통속적인 뉘앙스를 벗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을 설명하는 핵심어로 부상하는 마법을 부린다.

이 마법은 전적으로 이 책 속에서 일상-사상사-현실이 황금의 삼각형 관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황금의 삼각형 속에서 사상사와 일상이 결합하기에 헤겔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지만 호네트의 책은 사변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또한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되 일상적 용어가 갖고 있는 통속적 혼돈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학문적 체계성을 부여함으로써 일상의 삶에 대한 성찰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또한 이 모든 관련이 현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로 작용하기에, 아카데미즘의 좁은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행위는 항상 타인을 전제로 한다. 타인을 전제로 하지 않은 행위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타인은 항상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타자를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드는 '일반화된 타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호네트는 미드로부터 '일반화된 타자'의 개념을 빌려오되, 헤겔의 인정 투쟁 모델과 결합시켰다. 철학과 사회학은 이렇게 호네트를 통해 결합했다.

개인이 일반화된 타자와 긍정적인 상호주관적 상호 관계를 맺으면 그게 인정이다. 개인 간의 상호 관계는 그래서 인정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사회생활의 재생산은 상호 인정이라는 지상 명령 아래서 수행"(184쪽)된다. 하지만 개인은 항상 타자로부터 긍정적인 상호주관적 관계를 맺지는 못한다. 인정의 대척점에 모욕이나 굴종과 같은 '무시'라는 무시무시한 범주가 도사리고 있다. 인정은 긍정적인 자아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힘이지만, 반면 무시는 주체에 엄청난 심리적 훼손을 가한다. 인정은 개인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만, 무시는 개인을 사회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인정의 관계는 사랑과 우정과 같은 원초적인 인정 형식부터 각 주체의 권리를 인정하는 권리 관계 형태의 인정 형식 그리고 가치 공동체를 지향하는 연대 형식의 인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세 가지 인정 형태를 거치면서 개인의 긍정적 자기 관계의 정도가 단계적으로 높아"(186쪽)지기에, 인정 형태가 고양될수록 인간은 단순한 자기 보호로부터 적극적인 자기 발현으로 고양될 수 있다.

인정 형태의 고양이 일어나지 않을 때 혹은 각각의 인정 형태들이 무시라는 인정에 대한 거부와 만날 때 사회 투쟁은 벌어진다. 무시의 형태는 다양하다. 폭력, 고문, 폭행 등 개인의 신체적 불가침성을 건드리는 무시가 있는가 하면, 굴욕의 경험을 안기며 개인의 자기 존중을 훼손하는 무시도 있고, 특정한 생활 방식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형태의 무시, 즉 인정에 대한 부정은 해당 당사자에게 무시나 모욕으로 이해되고, 이는 분노라는 심리적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고, 분노라는 심리적 반작용은 사회적 투쟁을 추진하는 심리적 동기가 된다.

인정 투쟁 모델은 설명적이다. 인정 투쟁 모델은 정치적 권력 관계나 경제적 이득을 사회 갈등의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분과 학문적 설명에서 벗어나서, 현실에서 우리가 접하는 사회적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많은 투쟁이 먹고살기 위한 투쟁이었지만, 모든 투쟁이 먹고살기만을 위한 투쟁은 아니다. 인정 투쟁 모델은 그 빈틈에서 발생하는 투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한 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단지 설명적이라면 인정 투쟁 모델은 사회 갈등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인정 투쟁 모델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현실에서 일어났던 투쟁을 설명하는 대목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이유에 도덕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분노'는 투쟁을 촉발하는 원인이지, 투쟁의 도덕적 기초를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단지 투쟁이 분노의 표출에 불과하다면, 투쟁하는 사람은 투덜이 혹은 싸움꾼의 의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체적 훼손, 모욕과 무시, 권리 침해에는 반드시 반응해야 한다. 하물며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댄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신체적 위해가 가해졌을 때만 꿈틀대는 지렁이는 아니다. 인간은 꿈틀대는 단순 반작용 그 이상을 위해 투쟁을 한다. 인정 투쟁 이론은 여기서 가장 광채를 발휘한다. 인정 투쟁 모델은 단지 사회적 투쟁의 등장에 대한 설명 틀이 아니라 나아가 도덕적 자기 형성 과정에 대한 해석 틀이다.

인정 투쟁으로 전개되는 사회 투쟁은 단순히 자기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투쟁과는 다르다. 인정 투쟁의 촉발 요인이 자기 존엄에 대한 부정이기에, 인정 투쟁은 제로섬 게임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무시를 통해 부정당했던 자기 존중을 되찾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정 투쟁은 단순히 심리학적 공격적 행동도,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 행동이 아닌 약화된 자기 존중에 반응하는 일종의 자기 치유적이며 동시에 무시라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를 치유하는 도덕적 행동이다. 이 치유의 과정이 인정 투쟁의 도덕적 역할이다.

인정 투쟁은 사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와도 같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정 투쟁이 폭력, 고문, 폭행 등 개인의 신체적 불가침성에 대한 반작용뿐인지, 아니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인지에 따라 그 사회의 성숙도는 가늠될 수 있다. 생존권과 폭력에 대한 거부와 같은 원초적인 인정 투쟁만을 수용하는 사회는 도덕적 고양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은 무시를 통해 훼손된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고양된 인정 투쟁을 승인하고 그 투쟁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귀를 갖고 있는가?

혹 인정 투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고 과잉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전적으로 '지금 여기'의 한국이 부끄러운 성숙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숙하기에 품위 있는 사회를 향한 사회로 가는 투쟁의 길을 찾으려고 할 때, <인정 투쟁>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최상의 안내서 중 하나이다. < 2011.9.16 ㅣ 노명우 아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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