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자를 위하여
송영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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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의 작가가 계간지나 다른 곳에 실렸던 작품들을 실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초기 작품 세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3세계로 그 눈을 돌리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러시아로, 이라크로, 어린 시절로, 어느 한 지점에 머물지 않은 채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표제작 ‘발로자를 위하여’는 전환기 러시아 청년의 삶을 통해 세상의 두께, 그 만만하지 벽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발로자'라는 젊은이를 보여준다. 발로자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조국에 대한 문화적인 자부심과 현실에 처한 어려움을 사랑하며 사는 건강한 시대적 표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부모님은 지금까지 귀환을 하지 않고 버텼어요. 부모님도 이 뻬쩨르부르그를 무척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연금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우신가봐요. 작년까지도 부모님께서 여기를 떠날 생각을 하시리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저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게 슬퍼요. 제가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도 그렇구요. 이 뻬제르부르그는 내 고향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입니다. 저는 이곳 바람과 네바 강의 햇빛을 무엇보다 좋아합니다. 이 지구에서 이곳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다고 늘 생각했어요. 저는 발틱 해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이곳 바람을 맞으며 어릴 때부터 자라왔어요. 네바 강에 비치는 햇빛은 계절마다 색깔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 남아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된 겁니다.”([발로자를 위하여] 중에서)

발로자의 실제 인물은 <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를 쓴 '박노자'라고 한다. 작가 송영의 시선을 통해 그려진 박노자의 모습이 한편 쓸쓸하기도 한 것은 왜 일까?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박노자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유창한 한국말에 놀랍고 깊은 성찰을 느끼게 하는 지적 탐구심에 한 번 놀랐다. 더욱더 기억나는 것은 그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눈앞에 얼른거린다.

작가의 시선은 때론 현실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을 띠고 그려지기도 한다. ‘두 사람’에 나오는 오실장은 행려병자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 떠돌이 날품인생이다. 그런 오실장과 이제는 정년퇴직하고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사는 은행원 류씨의 만남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던져준다.

“큰 모과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류씨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는 오씨 앞에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약 이런 때 류씨가 불쑥 나타난다면 그는 당황할 것이고 그의 활달한 사교생활은 방해를 받을 것이다. 류씨는 그의 즐거운 한때를 훼방놓고 싶지 않았다. 오씨는 담배 한개비를 준 아무에게나 ‘존경스럽다’고 말할 것이고 굳게굳게 재회를 약속할 것이다.”([두사람] 중에서)

‘고려인 니나’라는 작품은 화자가 아들의 음악교육 때문에 러시아에 가서 고려인 가정부 니나를 만나 겪게 되는 내용이다. 니나는 ‘고려인’인 동시에 ‘러시아인’이다. 그녀는 우리말을 조금 할 줄 안다는 것, 하지만 전환기의 러시아 경제의 궁핍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러시아인이라는 점이다.

“계절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바람이 가볍게 불었으나 바람에 실린 냉기가 칼날처럼 아프게 살갗에 와닿았다. 지하도 주변에 늘어선 수많은 가판점들 앞에는 이런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값싼 생필품을 사려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고려인 니나] 중에서)

작품집의 말미에 실린 ‘모슬 기행’은 이라크 여행기다. 이라크의 낯선 공간과 ‘김정’이라는 화자의 친구의 우발적인 행동이 겹쳐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낯선 공간들은 타자의 시선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때론 그 경계선은 허물어지기도 한다.

작가의 섬세한 문장과 세상을 보는 시선은 우리에게 편안하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 줄 것이다. 다음 소설집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삶에 대해 꿈을 꾸며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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