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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조각
이다 투르페이넨 지음, 정보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연의 거대한 생명체가 인간의 손으로 발견되고 또 한순간에 소멸하기까지, 그 시간은 얼마나 덧없고 잔인한가요. 핀란드 작가 이다 투르페이넨의 첫 장편소설 <숨의 조각>은 역사상 가장 빨리 멸종한 해양 동물인 스텔러바다소의 흔적을 쫓으며, 우리가 지워온 생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북극의 차가운 바다와 박물관 골격 사이에 놓인 기나긴 세월의 간극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호기심과 정복욕이 어떻게 하나의 온전한 생명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렸는지,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인류가 치러온 지난한 추적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깊이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무엇을 기록하고 또 무엇을 지워왔던 것일까요.

이 책을 쓴 이다 투르페이넨은 해양 생태계와 연구의 현장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자란 배경을 바탕으로, 과학과 역사, 문학을 절묘하게 엮어내는 작가입니다. 헬싱키 자연사 박물관에서 마주한 스텔러바다소의 웅장한 뼈대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7년이라는 오랜 연구 끝에 이 소설로 완성되었습니다. 18세기 탐험대의 기록부터 19세기의 채집과 복원 과정에 이르는 서사의 결이 더욱 또렷하게 살아납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넘어 과학적 사실에 문학적 숨결을 불어넣는 두 사람의 호흡은 이 책을 단순히 지나쳐 갈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역사적 기록으로 다가오게 만듭니다.

소설의 전반부는 1741년 베링 탐사대와 함께 미지의 땅에 발을 디딘 박물학자 스텔러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지도에도 없는 척박한 무인도에서 마주한 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포유동물, 즉 훗날 스텔러바다소라 불릴 존재와의 만남은 생명을 마주한 경외감과 생존을 위해 그것을 소비해야 하는 인간의 야심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특히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와 불타버린 기록들 속에서도 뼛조각 하나에 의지해 존재의 진실을 증명하려던 이들의 모습은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을 넘어,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기꺼이 기억하고 복원해내려는 인간의 눈물겨운 의지가 얼마나 집요한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일상에서 당연하게 존재하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빈자리를 마주한 경험이 있습니다.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풍경이나 관계가 소실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남긴 무게를 실감하게 되듯, 이 책이 그려내는 멸종의 역사 또한 그러합니다. 스텔러바다소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단 27년 만에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풍요와 발전 속에 얼마나 쉽게 거대한 상실을 은폐하며 살아가는지 날카롭게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흔히 과학과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학문으로 여겨지지만, 이 소설은 그 기록의 이면이 결국 인간의 욕망과 오만으로 채워져 있음을 직시하게 합니다. 흩어진 뼈를 모으고 박물관에 온전한 형상으로 되살리려는 유구한 노력은 잃어버린 것을 향한 진정한 헌사이자, 동시에 자연을 소유하고 전시하려던 인간 중심적 시선의 또 다른 발현이기도 합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로 대표되는 현대의 복원 욕망 역시 이러한 역사적 연장선 위에 놓여 있습니다.
<숨의 조각>은 단순한 자연과학의 역사나 흥미 위주의 멸종 보고서가 아니라, 인간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쌓아온 오만과 그 속에서 피어난 경외심을 동시에 읽어내고자 하는 독자에게 깊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궤적을 문학의 언어로 복원해 내는 과정에 깊이 매료되고 싶거나, 인간과 생태계가 앞으로 맺어야 할 올바른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골몰해 온 분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커다란 지적 자극과 정서적 여운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