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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화이트맨
모신 하미드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8월
평점 :
#모신하미드 #완벽한얼룩 #무너진경계 #사랑과상실 #라스트화이트맨
도서를 무료로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라스트 화이트맨>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사람의 피부색이 하루아침에 바뀐다는 단순한 설정 하나로 이렇게 많은 것을 흔들 수 있구나’였습니다. 주인공 앤더스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뒤 자신의 피부가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몸도 기억도 그대로이고 어제의 자신과 달라진 것은 피부색뿐인데, 그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낯선 사람처럼 바라봅니다. 심지어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두려워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망설입니다. 이 장면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피부색 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앤더스의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외형 하나가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요.

처음에는 앤더스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처럼 보였던 변화가 점차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번져갑니다. 백인이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갈색 피부로 변하면서 마을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은 사재기를 하고 무장하며 폭력까지 행사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실제로 사람들의 성격이나 과거가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알고 지냈던 이웃이고 가족이며 연인인데 피부색이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서로를 낯선 존재처럼 바라봅니다. 결국 작품 속에서 무너지는 것은 사람 자체라기보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분류와 질서입니다. ‘백인’이라는 조건이 사라지자 그 조건에 붙어 있던 특권과 안정감, 소속감까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체성이 생각보다 개인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나답게 살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나다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조건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앤더스 역시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흉내 냅니다. 자신다워지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피부색은 작품이 선택한 가장 극단적이고 눈에 잘 보이는 장치일 뿐, 현실에서도 우리는 나이, 직업, 학력, 외모, 성별, 경제력처럼 수많은 조건으로 타인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런 조건을 오래 자신의 일부라고 믿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사라졌을 때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앤더스와 우나의 관계를 따라가는 과정도 좋았습니다. 우나는 피부색이 달라진 앤더스를 처음에는 낯설어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표정과 눈빛을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다 웃고, 마침내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이 부분이 작품 전체의 방향을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외형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였던 세계가 무너진 뒤에야 오히려 사람들은 눈빛이나 목소리, 행동처럼 이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것들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앤더스가 어머니를 잃은 우나의 곁을 찾아가는 모습이나 달라진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결국 사람을 붙잡아주는 것은 거창한 이념보다 누군가의 곁에 남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라스트 화이트맨>은 인종과 백인 특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면서 동시에 껍데기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나인가를 묻는 작품으로 읽혔습니다. 특히 모든 백인이 사라져가는 상황을 거대한 설명이나 복잡한 세계관 없이 밀어붙인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설정은 비현실적인데 그 안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상실감은 이상할 만큼 현실적입니다. 익숙한 기준이 무너졌을 때 인간은 얼마나 쉽게 불안해지는지, 그리고 그 불안을 견딘 뒤에는 무엇이 남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책을 덮고 나니 결국 이런 질문이 남았습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조건들을 하나씩 지워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직업도, 외모도, 사회가 붙여준 이름도 사라진 뒤에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 수 있을지 생각하게 만든 꽤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