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 - 클래식 무대 뒤, 오케스트라 악보를 둘러싼 세계
김보람 지음 / 사농공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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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종종 공연장을 찾습니다. 같은 곡이라도 지휘자와 연주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들리는 것이 재미있고, 좋아하는 연주자들의 해석을 비교해서 듣는 것도 클래식 감상의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공연장에서도 자연스럽게 지휘자와 협연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먼저 눈이 갔습니다. 그런데 김보람 작가님의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으며 제가 클래식 음악의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악보가 무대 위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작가님은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20년 넘게 악보 전문위원으로 일하며 오케스트라가 사용할 악보의 판본을 결정하고, 오류를 확인하고, 지휘자의 해석을 파트보에 반영해 왔습니다. 책을 읽기 전까지 저는 ‘악보를 준비한다’는 일을 필요한 악보를 찾아 연주자들에게 나눠주는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악보위원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한 일을 합니다. 수십 명이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서는 바이올린의 보잉 방향 하나, 셈여림과 아티큘레이션 표시 하나만 달라져도 전체적인 음색과 호흡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휘자가 원하는 음악적 방향을 파악하고 그것을 각 파트의 악보에 정확히 반영하는 사람, 악보라는 종이 위의 기호가 실제 소리로 바뀌기 전에 음악의 정확성과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바로 악보위원이었습니다. 책에서 이들을 무대 뒤의 음악가라고 부르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같은 작품의 연주가 서로 다르게 들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넓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는 주로 지휘자의 해석이나 연주자의 기량에서 차이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어떤 판본의 악보를 선택했는가, 어떤 보잉과 표현 지시가 반영되었는가, 여러 버전 가운데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가라는 문제가 존재합니다. 특히 말러나 브루크너처럼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작품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말러의 '교향곡 6번'만 해도 2악장과 3악장의 순서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 유명한 ‘망치’를 몇 번 등장시킬 것인지 같은 문제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관객은 공연장에서 완성된 음악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에 도달하기까지 누군가는 여러 자료와 판본을 검토하고 지휘자와 의견을 조율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듣는 연주는 악보를 그대로 소리로 옮긴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선택을 거쳐 만들어진 하나의 해석입니다. 정명훈, 오스모 벤스케, 얍 판 츠베덴을 비롯해 김선욱, 손열음, 조성진, 정경화 등 여러 음악가와 실제 현장에서 작업한 저자의 경험담이 흥미로운 것도 이 때문입니다. 유명 음악가를 멀리서 바라보는 일화가 아니라, 악보와 공연 준비라는 구체적인 업무를 통해 각 음악가가 어떤 소리와 해석을 추구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원문이라도 번역자가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번역문의 인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같은 작품도 어느 악보를 기준으로 삼고 그 안의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처럼 악보를 단순히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정식 출판사를 통해 임대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국가별 저작권 상황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악보도 달라집니다. 과거 미국에서 구입한 악보를 서울시향이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까지 읽고 나면, 악보 한 권이 보면대 위에 놓이는 일조차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악보위원’이라는 직업 그 자체였습니다.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는 사람은 지휘자와 연주자이고 관객은 대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반면 악보위원은 공연이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존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악보에 문제가 생겨야 비로소 그들의 역할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조금 묘한 직업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이런 일이 꽤 많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일이 굴러가도록 뒤에서 확인하고 준비하고 수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공연 직전에 오류를 발견하고, 연주자가 연주 중 불편하지 않도록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 고려하고, 지휘자가 원하는 표현을 수십 개의 파트보에 빠짐없이 반영하는 노동 역시 그렇습니다. 오케스트라 공연은 결국 지휘자 한 사람의 예술도, 뛰어난 연주자 개인의 기량만으로 만들어지는 예술도 아닙니다. 지휘자와 연주자, 악보위원, 공연기획자와 무대 스태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준비한 결과가 마지막 순간 하나의 소리로 합쳐집니다.  


다음에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간다면 연주가 시작되기 전 보면대 위에 놓인 악보를 한 번쯤 바라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악보가 어느 판본인지까지 알아맞힐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저 종이 한 묶음이 아무렇게나 그 자리에 놓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 책은 음악 전공자만을 위한 책이라기보다 저처럼 클래식을 좋아해 공연장을 찾으면서도 무대 뒤에서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는 알지 못했던 독자에게 특히 흥미로운 책입니다. 책의 제목처럼 악보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음표와 기호가 말해주는 것만으로 음악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누군가는 그 기호를 읽고, 선택하고, 해석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준 책이어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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