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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타는 미술관 - 그림과 연애하듯 살아가다, 감상X데이트코스X아트테크
김용임 지음 / 책이라는신화 / 2026년 5월
평점 :
도서를 무료로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술관에 가면 괜히 자세부터 어색해질 때가 있습니다.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으면 무언가 깊이 이해한 척해야 할 것 같고, 빨리 지나가면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작품 설명을 읽어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그냥 색이 예쁘다”라고 말하기에는 감상이 너무 가벼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썸타는 미술관>은 바로 이 어색함에서 출발하는 책입니다. 미술을 공부와 교양의 대상으로만 다루지 않고, 사람을 알아가듯 천천히 가까워지는 관계로 설명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에 쓰인 ‘썸’이라는 말은 자칫 가볍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꽤 정확한 비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썸을 탈 때 우리는 상대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이해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분위기에 끌리고, 다음에는 표정과 말투를 살피며, 조금씩 그 사람의 사연을 알아갑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과정도 비슷합니다. 첫눈에 색채와 구도에 끌릴 수도 있고, 작품 속 인물의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작가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알게 되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가 천천히 드러납니다.

저는 이 책에서 작품을 감정의 언어로 풀어내는 점이 좋았습니다. 설렘에는 샤갈의 〈산책〉을, 환희에는 르누아르의 〈보트파티에서의 오찬〉을, 불안에는 뭉크의 〈불안〉을, 슬픔에는 고흐의 〈우는 남자, 영원의 문〉을 연결합니다. 미술사조와 제작 기법부터 설명하는 대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감정에서 그림으로 다가가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뭉크의 그림은 흔히 불안과 공포를 표현한 작품으로 설명되지만, 이 책은 그 불안을 단순히 감상해야 할 정서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뭉크가 불안을 숨기거나 극복해야 할 결함으로 보지 않고 예술로 바꾸어 냈다는 점을 짚습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지 않았다. 예술이 되어 우리 곁에 남았다”는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불안은 대개 제거해야 할 감정처럼 취급됩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불안을 없애는 대신 바라보고, 형태와 색을 부여하며, 다른 사람도 알아볼 수 있는 감정으로 번역합니다. 개인의 고통이 작품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한 사람만의 고립된 감정이 아닙니다. 예술이 사람을 위로하는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서 설명되지 않던 감정을 누군가 이미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안도감을 줍니다.
고흐의 〈우는 남자, 영원의 문〉을 다룬 부분도 좋았습니다. 그림 속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싸 쥔 채 앉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화려한 색채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인간이 감당하는 슬픔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고흐의 삶을 생각하면 이 그림을 단순히 타인의 슬픔을 묘사한 작품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가난과 고독, 인정받지 못한 삶을 견뎌야 했던 화가 자신의 내면도 겹쳐 보입니다.
저는 예술 작품을 볼 때 작가의 전기적 사실만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작가의 일기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살아온 삶을 완전히 떼어 내고 작품만 보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작품은 개인의 경험과 시대의 공기, 미학적 선택이 함께 쌓인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전문적인 이론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작품과 예술가의 삶을 적절히 연결해, 독자가 그림에 감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미술관에서도 성과를 내려고 합니다. 유명 작품을 놓치지 않아야 하고, 작품 설명을 이해해야 하며, 전시를 다 보고 나면 무엇인가 배웠다는 느낌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감상은 시험이 아닙니다. 어떤 그림 앞에서 이유 없이 발걸음이 멈추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생기거나, 특정 색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감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작품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보다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라’고 권합니다.
또한 미술관을 작품만 보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종합적인 경험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좋았습니다. 건축과 조명, 전시실의 넓이, 창밖 풍경, 미술관 주변의 산책길과 카페까지 모두 감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비 오는 날의 미술관을 추천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빗소리와 흐린 빛 속에서는 일상의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집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그림 앞에서도 조금 오래 머물게 됩니다. 미술관은 작품을 보관하는 건물인 동시에 시간의 속도를 바꾸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예술가의 사랑과 뮤즈, 작품 속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사랑을 다룹니다. 사랑을 낭만적으로만 포장하지 않고 숭배, 약속, 금지, 외로움, 침묵, 관계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누어 살핀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에곤 실레와 피카소,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의 관계를 떠올려 보면 예술가의 강렬한 창작이 언제나 아름다운 인간관계와 함께한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는 이유로 개인의 폭력성과 이기심까지 낭만화해서는 안 됩니다.
<썸타는 미술관>은 미술을 어렵지 않게 설명하지만, 미술을 가볍게 소비하도록 만들지는 않습니다. 작품과 첫눈을 맞추는 단계에서 시작해 감정을 나누고, 작가의 삶을 이해하며, 미술관을 찾고, 마침내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독자를 이끕니다. 전문용어를 많이 아는 사람보다 한 작품 앞에서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솔직히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그림과 더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책을 덮고 나니 미술관에서 꼭 똑똑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앞에서 떠오른 기억 하나, 색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 하나, 설명할 수 없지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마음 하나면 충분합니다. 사랑도 상대를 완전히 이해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듯, 그림도 다 알아야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술과 썸을 타는 첫 단계는 거창한 미술사 지식이 아니라, 한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추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멈춤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미술관은 더 이상 어색한 교양의 공간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발견하러 가는 익숙한 장소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