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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과 전쟁 - 무기화된 화학 이야기
앨리스 러브조이 지음, 윤종은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6월
평점 :
#앨리스러브조이 #필름과전쟁 #추천도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앨리스 러브조이 작가님의 <필름과 전쟁>은 제목만 보면 영화사나 사진사의 한 분야를 다룬 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책장을 펼치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필름이라는 익숙한 물질을 출발점으로 삼아 화학산업, 군수산업, 식민주의, 핵무기 개발, 환경오염까지 연결해 보여주는 독특한 역사서입니다. 저자인 앨리스 러브조이 작가님은 영화사와 과학기술사를 연구해 온 학자로, 문화사와 환경사, 기술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 능력이 인상적입니다. 한국어판 역시 전문적인 내용을 자연스럽게 전달해 주는 번역 덕분에 일반 독자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평소 사진과 영화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필름은 '기억을 저장하는 매체' 정도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할 때도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감성과 결과물을 기다리는 설렘에 집중했지, 필름이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필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독가스와 폭약, 우라늄 광산, 원자폭탄 개발 현장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문화와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필름의 역사가 사실은 전쟁과 산업의 역사와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코닥과 아그파 같은 필름 기업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꽤나 재미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코닥은 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혁신 기업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코닥을 단순한 사진 기업이 아니라 거대한 화학 기업이자 국가 전략산업의 일부라고 이야기합니다. 필름의 원료였던 나이트로셀룰로스가 폭약과 같은 계열의 물질이었다는 사실, 필름 생산 기술이 군수산업에 활용되었다는 사실, 핵실험에서 발생한 방사능 낙진이 필름 품질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모두 흥미로운 대목이었습니다. 특히 필름이 방사능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핵실험의 흔적을 기록하는 일종의 환경 감지 장치 역할을 했다는 부분은 과학사와 문화사가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도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필름 시대가 끝나고 디지털 시대가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 스마트폰과 노트북, 데이터센터 역시 희토류와 리튬, 코발트 같은 자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소개되는 벨기에령 콩고의 우라늄 광산 이야기를 읽으며,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이루어지는 코발트 채굴 문제가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기술 발전 뒤에 존재하는 자원 수탈과 노동, 환경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필름과 전쟁>은 단순히 과거를 설명하는 역사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과 문명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묻는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책은 사진과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뿐 아니라 과학기술사, 환경사, 전쟁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무척 재미있을 것입니다. 특히 "문화는 순수하고 기술은 중립적이다"라는 통념에 익숙한 독자라면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학술적 자료와 역사적 사례가 풍부하게 담겨 있어 가볍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름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현대 문명을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사진 한 장, 영화 한 편 뒤에 숨어 있던 거대한 역사와 권력의 흐름을 발견하고 싶은 독자분들에게 강력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