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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메아리처럼
앤절라 미영 허 지음, 임슬애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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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 메아리처럼>은 읽는 동안 계속 묘한 기분이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분명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국 설화와 가족의 저주, 여성의 비극 같은 오래된 소재가 있는데도, 동시에 남극 기지와 입자 물리학, 디아스포라 정체성 같은 현대적인 감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섞여 있거든요. 자칫하면 설정만 화려하고 붕 뜰 수도 있는 조합인데, 앤절라 미영 허 작가님은 그걸 꽤 설득력 있게 끌고 갑니다. 특히 한국 설화를 단순히 “동양적 분위기”로 소비하지 않고, 여성들의 반복되는 희생 구조를 다시 들여다보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번역은 임슬애 번역가님이 맡았는데, 문장이 지나치게 번역투로 느껴지지 않고 감정선이 매끄럽게 살아 있어 읽기 편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과학으로 도망친 사람”이라는 설정입니다. 주인공 엘사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설화와 저주의 세계를 거부하기 위해 과학자가 됩니다. 그런데 결국 남극이라는 세계 끝에서도 다시 이야기와 마주하게 되지요. 이 흐름이 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종종 가족이나 과거와 완전히 단절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멀리 도망친 자리에서 다시 자기 뿌리를 만나게 되니까요. 특히 “과학은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는 문장은 단순한 직업 선택 이상의 의미로 읽혔습니다. 누군가에게 학문이나 공부는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탈출구가 되기도 하니까요.

소설은 한국 설화를 계속 이야기하는데, 읽다 보면 익숙했던 이야기들이 갑자기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심청, 선녀와 나무꾼, 에밀레종 같은 이야기 속 여성들은 대부분 누군가를 위해 희생되거나 빼앗기거나 침묵당합니다. 어릴 때는 그냥 “슬픈 이야기” 정도로 넘겼던 설화들이, 성인이 되어 다시 읽으면 꽤 잔인하게 보일 때가 있지요. 특히 “우리는 메아리처럼 비극을 반복한다”는 말은 단순히 가족 저주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대마다 되풀이되는 감정 구조와 상처까지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판타지 같으면서도 굉장히 현실적인 작품입니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건 오래 이어져 온 침묵과 체념이라는 걸 보여주니까요.
또 하나 좋았던 건, 이 작품이 단순히 “여성의 고통”만 강조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국 엘사는 자기 이야기를 스스로 다시 쓰려 합니다. 이게 중요하더군요. 최근 여성 서사 작품 중에는 상처를 드러내는 데는 성공하지만, 인물이 끝내 자기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꽤 많다고 느꼈는데, <우리, 메아리처럼>은 적어도 “다른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깁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우울감만 남기보다 묘한 해방감도 함께 남습니다. 중성미자 같은 ‘유령 입자’를 끌어온 설정도 좋았습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계속 형태를 바꾸며 이동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민자 정체성과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SF 같고, 약간 신화 같고, 동시에 굉장히 개인적인 소설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판타지나 호러를 기대하고 읽으면 의외로 독특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가족 서사, 여성 서사, 디아스포라 문학, 한국 설화 재해석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꽤 깊게 빠져들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가족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오래 품어본 사람이라면 더 그렇고요. 읽다 보면 남극의 차가운 풍경 속에서 오래된 한국 설화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느낌이 드는데, 그 조합이 참 낯설고도 이상하게 잘 어울립니다. 약간 꿈처럼 읽히는 소설인데,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