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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도망 - 까미난떼, 끝인 줄 알았던 순간 다시 걷기 시작하다
나상천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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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멋진 도망>은 ‘도망’이라는 단어를 꽤 다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보통 도망이라고 하면 회피나 실패처럼 들리지만, 이 소설에서는 오히려 멈추기 위한 선택, 다시 시작하기 위한 우회로로 읽힙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설정도 그렇습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물리적·정서적 거리 확보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도 따라 움직인다”는 문장이 이 작품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을 움직여야 마음이 따라온다는, 꽤 현실적인 위로였습니다.

이 책을 쓴 나상천 작가님은 극작가 출신으로 콘텐츠 업계에서 오래 활동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 전개가 장면 중심적이고, 인물들이 특정 순간에 확 살아나는 느낌이 있습니다. 요리를 이야기할 때 자신감이 살아나는 킴스의 모습이나, 빛을 보고 멜로디를 떠올리는 도로시의 장면은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자기 영역에서만 살아나는 인간’이라는 감각을 잘 포착합니다. 이건 창작을 해본 사람일수록 더 공감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와닿았던 건 ‘꿈이 사라진 상태’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꿈이 없어요. 어느 순간 그냥 사라졌어요.”라는 대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건드리는 문장입니다. 저 역시 한때는 목표가 분명했는데, 어느 순간 방향이 흐릿해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억지로 앞으로 가려고 할수록 더 공허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은 그 상태에서 ‘굳이 당장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대신 걷고, 버티고, 타인과 부딪히면서 서서히 다시 생겨나는 것을 기다립니다. 꽤 느린 방식인데, 그래서 더 현실적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치유’를 직접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상처를 극복한다기보다, 그냥 같이 들고 가는 법을 배우는 쪽에 가깝습니다. 돌무더기에 각자의 짐을 내려놓는 장면도 꽤 인상적이었는데요. 완전히 버리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들고 왔다’는 확인에 가까운 것 같아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이건 심리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태도입니다. 상처를 없애려 하기보다, 관계를 재정의하는 쪽이 훨씬 지속 가능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감정 소비형 힐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회복’ 쪽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이 책은 특히 인생의 방향이 잠깐 흐려진 사람, 혹은 뭔가를 내려놓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거창한 깨달음보다는, “지금 이 상태로도 일단 걸어볼 수 있다”는 감각을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혼자서 버티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 생기는 미묘한 변화까지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