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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으로 들어가기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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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카롤리네 발 작가님의 <폭풍으로 들어가기>는 독일 현대문학의 흐름 속에서 ‘상실 이후의 삶’을 가장 담백하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생의 젊은 작가가 보여주는 문체는 과장된 감정 대신 절제된 문장으로 내면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독일문학의 계보를 잇고 있으면서도, 그 건조함 속에 미묘한 유머와 온기를 배치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번역을 맡은 전은경 번역가님 역시 독일어 특유의 리듬과 정서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옮겨 가독성이 좋았습니다.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과 언니와의 이별 이후 홀로 남겨진 ‘이다’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결핍 속에 놓여 있던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뒤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내면화하며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이후 뤼겐 섬으로 흘러 들어가 노부부와 함께 지내고, 또래 청년 라이프를 만나며 관계의 가능성을 다시 시험하지만, 동시에 “다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이다는 결국 타인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 과정이 매우 현실적인 속도로 그려집니다.

독일문학의 전통에서 가족 해체와 개인의 내면 탐구는 낯선 주제가 아닙니다. 다만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을 거대한 사유나 철학적 선언으로 확장하지 않고, 철저히 ‘생활의 온도’에서 다룬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컨대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같은 작품이 사유를 택했다면, <폭풍으로 들어가기>는 감각과 관계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동일한 질문에 접근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혈연이 아닌 느슨한 연대 속에서 정의하는 방식은 현대 유럽 문학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면서도 여전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다의 ‘자기 책임화’가 매우 낯설지 않게 다가왔는데요. 삶에서 발생한 비극을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태도는, 오히려 성실하고 예민한 사람에게서 더 자주 발견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특정 사건을 지나치게 자기 탓으로 환원하며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경험이 있는데, 이다의 이야기는 그러한 모습을 정교하게 드러냅니다. 다만 이 작품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 상태를 극복의 서사로 단순화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이동시킨다는 점입니다. 치유가 아니라 공존에 가깝다고 할까요.
결국 이 책은 ‘완전히 회복된 인간’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상실을 경험한 독자, 혹은 관계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안고 있는 독자에게 특히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감정 과잉 없이도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독일문학의 미학을 경험하고 싶은 분들에게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이 소설, 위로해주진 않는데 이상하게 계속 곁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