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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를 순례하다 - Pilgrimage Yeosu
박주희 지음 / 지식과감성# / 202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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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수를 순례하다>는 여행기라는 이름으로 묶기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책입니다. 박주희 작가님은 여수를 ‘보러’ 다니기보다 ‘살피며 걷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이 책은 특정 명소를 안내하거나 동선을 추천하는 실용적 여행서가 아니라, 여수라는 공간을 매개로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더듬는 기록에 가깝습니다. 여수의 바다와 골목, 산과 노을은 배경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내는 장치로 기능하며, 독자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시선에 동행하게 됩니다. 박주희 작가님은 여수에서 오래 글을 써온 시인이자 수필가로, 이력 자체가 이 책의 결을 설명해 줍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순례’라는 단어를 공간이 아닌 태도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작가님은 여수를 목적지로 설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반복해서 걷고, 바라보고, 머무르며 감정의 변화를 기록합니다. 저 역시 여행을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행이 소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여행이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과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바다를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는데,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 있으나 감정의 거리만큼 다르게 다가온다는 점을 다시 곱씹게 되었습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언어로 붙잡아내는 문장들이 이 책에 다수 등장합니다.

여수의 바다, 노을, 골목을 다루는 방식 또한 인상적입니다. 박주희 작가님은 특정 풍경을 과장하거나 낭만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파의 색, 바람의 결, 밥상에 오르는 재료까지 감정의 일부로 엮어냅니다.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여행 에세이와의 분명한 차별점입니다. 일반적인 여행기가 ‘어디가 좋았다’는 감상에 머문다면, 이 책은 ‘왜 그 순간 그 감정이 일어났는지’를 묻습니다. 공간과 감정의 상호작용을 섬세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산문집이자 감정의 지도에 가깝습니다.
여러 장면 중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여수의 바다를 ‘멀고도 가까운 감정’으로 설명한 대목이었습니다.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응집되거나 해방되는 감정처럼 다가옵니다. 이는 장소가 기억을 호출한다는 인문지리학적 관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특정 공간은 기억을 저장하고, 다시 그 자리에 섰을 때 감정을 불러냅니다. 작가님이 반복해 여수를 걷는 이유도 결국 그 기억의 층위를 확인하는 과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여행은 이동이 아니라, 감정의 깊이를 재측정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여수를 순례하다>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행이 점점 피로해진 독자에게 특히 권하고 싶습니다. 많은 것을 보지 않아도, 멀리 가지 않아도, 한 도시를 오래 바라보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조용히 보여줍니다. 사실 이 책은 여수를 알고 싶은 분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다시 만나고 싶은 분께 더 어울리는 책입니다. 걷는 속도가 느려진 독자, 여행의 의미를 다시 묻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이 충분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