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낯선 편지
이머전 클락 지음, 배효진 옮김 / 오리지널스 / 2025년 11월
평점 :
#장편소설 #소설추천 #낯선편지 #베스트셀러 #신간도서 #영국소설 #가족 #인문

영국 작가 이머전 클락의 장편소설 『낯선 편지』는 한 가족의 비밀을 추적하는 이야기이자,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소설입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으며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다락방에서 발견된 엽서 더미는 주인공 카라의 삶을 송두리째 흔듭니다. 엽서 더미들은 아무렇게나 방치된 채, 아버지를 제외한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었지요. 엽서는 그녀와 오빠 앞으로 보내졌지만 끝내 전달되지 못한 채 봉인되어 있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카라가 믿어온 가족의 서사는 균열을 일으킵니다. 소설은 이 엽서의 발신자와 그에 얽힌 진실을 좇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이야기가 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소설이 ‘비밀을 밝히는 서사’보다 비밀을 알게 된 이후의 감정 상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라는 진실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또렷하게 인식합니다. 이미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닫을 수 없으며,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이 소설의 핵심 정조를 이룹니다. 진실은 구원이 아니라 붕괴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은 감상적인 언어 없이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주인공 카라에게 깊이 공감하게 되는 지점은, 그녀가 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끝내 모든 거짓을 용서하지는 않는다는 태도입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돌보며 카라는 연민과 분노, 이해와 의심 사이를 끊임없이 오갑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면서도, 그렇게 중요한 진실까지 숨겼다면 다른 말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가족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이 관계 속에서 신뢰를 어떻게 구성하며 무엇을 기준으로 다시 삶의 균형을 세우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또한 『낯선 편지』의 가장 큰 장점은 심리 묘사의 밀도에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극적인 사건을 빠르게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인물들이 감정을 인식하고, 부정하고, 되새기며 조금씩 변화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갑니다. 특히 아버지의 폭력과 기억 상실, 그리고 과거의 거짓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그려내는 방식은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남깁니다. 독자는 어느 순간 인물들을 판단하기보다, 그들의 감정 곁에 조용히 서 있게 됩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알츠하이머를 면죄부로 쓰지 않고 동정의 도구로 소비하지도 않는다는 점도 무척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기억을 잃어가지만, 그로 인해 과거의 폭력과 거짓이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아주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무엇을 책임지게 할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독자가 감정적으로 쉬운 길을 택하지 않게 만듭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소설이 ‘가족’을 혈연으로만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카라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는 혈연을 넘어선 관계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손을 내밉니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절망에만 머무르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작품이 말하는 희망은 모든 것이 회복된다는 낙관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가깝습니다.
이 소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침묵과 거짓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 분들, 진실을 알게 된 이후의 삶이 오히려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 그리고 감정의 폭발보다 감정의 잔향을 오래 음미하는 소설을 좋아하시는 독자분들께 추천하고 싶습니다. 『낯선 편지』는 충격적인 반전보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를 오래도록 남깁니다. 읽고 난 뒤에도 쉽게 정리되지 않는 질문 하나를 마음속에 남기는 소설입니다. 진실을 밝혀서 끝나는 소설이 아니라, 진실을 안 채로 살아가는 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소설, 『낯선 편지』를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강력추천하고 싶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