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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의 산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장편소설 #SF소설 #바닷속의산

바다늑대호는 탐조등으로 높고 불규칙한 파도 위를 비추었다. 그때 에이코는 보았다. 좌현으로부터 약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회색 뱃머리가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선박 길이는 약 20미터 이상이었고, 어두운 형상으로 가득 찬 갑판에는 적어도 회전 무기 세 대가 고정된 채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이 선박이 시야에 들어온 것과 동시에 뱃머리에서 예광탄들이 호를 그리며 바다늑대호를 향해 날아왔다.
-127 p/ <바닷속의 산>

<바닷속의 산>은 레이 네일러를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만든 문제작입니다. 그는 첫 장편소설 <바닷속의 산>으로 로커스 최우수 신인소설상을 수상하고 네뷸러상, 아서 C. 클라크상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사실 화려한 수상 경력이나 이력보다 제가 더 관심이 갔던 건 소설의 제목이었습니다. 정말 바다 이야기를 하는 소설일지가 무척 궁금했거든요. 저는 해양 생태계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유독 바다 이야기와 관련한 소설, 콘텐츠를 즐겨 봅니다. 이 소설이 과연 제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바다 세계를 보여줄까하는 호기심 반, 기대 반의 마음을 품고 책장을 한 장씩 넘겼습니다.

이 책에는 제가 기대했던 미지의 심해 생물이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의외로 인간과 친숙한 ‘문어’가 등장을 하는데요. 소설의 중심인물인 하 응유엔 박사는 문어와 교감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의 대사에서도 나오듯 문어는 ‘기호를 사용해서 소통하기 이전부터 이미 지능적이었던 보기 드문 동물’입니다. 저도 유튜브 영상에서 문어가 복잡한 미로를 통과하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한 지능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요. 이 소설에서도 문어는 지능적인 고등 생명체로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하 박사는 문어들에게 ‘메타 메시지’까지 보낼 시도를 합니다. 단어를 써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문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능력은 된다는 것을 어필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 박사는 문어와의 소통에 성공을 할까요? 소설의 중요한 스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지의 생명체, 그것도 고등 생명체로 알려진 문어와 인간의 교류는 정말 문어가 원했던 것인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인간은 거의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채, 다른 생명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거나 혹은 경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과연 그런 권리가 있을까요? 인간의 자만이 아닐까요? 이 소설은 문어라는 생명체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와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또한 이 소설에는 AI 안드로이드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여느 평범한 SF소설처럼 안드로이드와 인간과의 공생을 그리기보다는, 인간과 문어의 관계처럼 과연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소통’을 해야만 하는 관계인가, 그리고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가라는 점을 묻고 있습니다. 파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 AI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철학적인 생각을 하도록 돕는 소설이어서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잘 맞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SF소설이 단순히 과학, 기술의 시선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결국 인문학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정한 소통,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 곱씹게 만드는 훌륭한 소설이었습니다. SF소설 작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레이 네일러의 작품들을 앞으로도 꾸준히 읽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