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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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따옴표 안의 문장은 모두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정신 의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그의 자전적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참혹한 고통과, 그때에 얻은 삶은 의미에 대해 본인이 창안한 정신 치료법 이론인 ‘로고테라피’를 토대로 풀어나간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와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therapy’가 합쳐진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기울이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하는 기법이다. 즉,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제국이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건설한 대규모의 수용소로, 이미 악명 높은 역사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이유 없는 발길질과 구타를 당하며,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약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 수용소에서는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은 단지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있고,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인 곳에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쓰인 글을 읽자니 작년 겨울부터 잠시 일을 쉬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이태원 참사에서 혼자 돌아왔다는 죄책감을 뿌리치지 못했을 때, 비록 수많은 또래들이 한순간에 하늘나라로 가게 된 국가적 재해였으나, 나는 감히 살아있단 이유로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고군분투했고, 새로운 운동을 배우던 검도장에서는 고수들에게 죽도로 정수리만 맞다 오기 일쑤였다. 집에서는 룸메이트와의 불화로 매일 밤마다 인근 호수를 지칠 때까지 걷다 귀가했다.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보다도 절망스러웠던 건 상태가 영 호전되지 않아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자 직장 상사가 폭언을 퍼붓기 시작한 일이었다. 무력감에 지배된 나머지 매사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되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일을 두고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고 일컫는다. 정말 그랬다. 당시의 내가 휩싸여 있던 감정은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분노보다도,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몰라 다 포기하고 싶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혐오감이 생겼고, 그 혐오감은 이내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뀌었다.

이 책은 그런 나를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주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나에게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빅터 프랭클은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하였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의 말마따나 나를 괴롭히던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회사를 그만뒀고, 운동을 잠시 쉬고 본가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인생은 여전히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미래를 기다릴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는 나를 무한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고, 다른 회사 구인 공고를 접하고 면접을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익숙한 운동을 할 때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왜’ 살아야하는 지 몰랐을 때와 달리 그 이유를 알게 되자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되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였다.

지나고 보니 강제 수용소에서 저자가 한 경험은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단지 참혹한 기록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행복이 아니라 ‘의미’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아니면 자기 양심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그러니 나 또한 정진하고자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기에,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남으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것뿐

강제 수용소에서 한 경험은 이제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 됐다.

비로소 이것이 단지 참혹한 강제 수용소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어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인간이 더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단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

그 순간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지 맛있는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이다.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해 주기를 원했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딜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약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 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 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아니면 자기 양심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희생의 의미 같은―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이자 파생물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아야 하고, 그런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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