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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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꼭 읽어보길 바라는 책입니다.

비록 거식증과 관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믿더라도, 무언가에 몰두하고 중독되어 있지 않다 느끼더래도, 생활 방식과 사고관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계기로 충분한 이 책은 어디에 있건, 어느 시점에 살아있건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망의 응어리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 있음을 깨달으며, 오랫동안 독후감을 적었습니다. 아주 사적이고 창피한 고백이니, 읽어주시는 분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큰 따옴표 속 문장들은 모두 인용 구절 입니다.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에 대한 감상은 자기 고백 혹은 회고록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나와 독서 모임을 같이 한 친구들은 모두 "내가 선택하는지도 모르면서 선택한 내 인생의 몇몇 결정들과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이유들을 알게 되었고,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었던 상처와 슬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알고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갔던 사실들도 재확인했다”.

그야말로 난도질이다. 한 쪽씩 넘길때마다 그동안 숨기고만 싶었던 욕망과 비밀스레 정해놨던 한계선을 낱낱이 해부당하고 가감없이 뜯겨보였다.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라 분명 첫 몇 장 읽을 적에는 인덱스를 하나씩 떼어 붙이던 것이, 정신 차리고 보니 아예 형광펜을 들고 줄을 죽죽 긋고 있었다. 그마저도 페이지마다 뒤덮인 노란 색깔에 이럴거면 불필요한 부분(조사나 어미같은)을 지우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추리고 추렸음에도 원고지 몇십 페이지는 훌쩍 넘길 것 같은 이 독후감은 왜 이전에는 그것들이 당연하단 걸 몰랐었는지, 동시에 왜 그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몰랐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대답들로 가득하다.

 

[서론]

책의 서론에서는 욕구란 것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진득하게 붙어있는가에 대해 얘기하며 총괄적인 주제에 대해 포문을 연다. 대표적으로 음식, 섹스, 쇼핑 같은 게 있다. 우리는, 그러니까 여자들은 갈망하는 대상을 위해 대가와 노력을 지불하는데도 그것을 희생으로 여기는 풍조와 자기 혐오에 부딪힌다.

한 예로 저자는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한다. (중략)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긴다"며 여성이 스스로에게 세운 잣대에 대해 비판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낮은 자존감’처럼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1장에서는 이런 구체적인 불안들에 ‘억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2장에서는 그 이유로 자라온 환경을 들고, 3장에서는 여성 혐오의 뿌리를, 4장에서는 소비문화가 어떻게 여성들을 방해하는지 강조한다. 5장에서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야하는 이유에 대해 토로하며, 6장에서는 마침내,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내린다.

 


 

[1장] 케이크 더하기, 자존감 빼기

첫번째 장에서는 여성으로서 선택할 자유와 그것에 대한 부담감 및 좌절에 대해 다룬다.

무한한 선택지에서 따라오는 차기의 부담과 미래, 혹은 커리어 비전 등에 대한 얘길 읽고 있자니 재작년 쯤 같은 팀 동료였던 N이 퇴사할 때에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비록 바로 옆자리로 나란히 앉은 사이였지만 이전까지 딱히 이렇다 할 친분 관계가 없었는데, 비로소 마지막 티타임 때 그동안 못다한 얘기를 진솔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때에 나는 예의상, 그러니까 지나가는 말처럼 퇴사 결심 계기를 물었다. 이직하는 사람들이 으레 내놓는 변명이 돌아올 거라 예상했다. 지금 이 회사 돌아가는 꼴이 거지 같아서, 사람들이 싫어서, 직무가 안 맞아서. 그런 닳고 흔해 빠진 구실들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때 들은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N은 이 회사에서의 끝이 보였다고 했다. 본인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이룰 수 있는 건 단지 팀장이 되고, 실장이 되고, 딱 거기까지겠구나 하는. 자기계발적인 면에서 이미 어떤 주기를 봤기 때문에 도달 가능한 범위의 선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은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가고싶댔다.

고개를 주억이면서 얘기를 듣고 있긴 했지만, 실은 그때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딴 세상 얘기 같기도, 아니, 좀 충격이기도 했다. 그때에 갓 입사한 나에게 팀장이나 실장, 대표 이사직은 너무 먼 얘기였다. 미래의 내 얘기가 되리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어느 곳에서도 간부급이 되고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을 책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정리한다.

“나는 수년간, 나 자신의 열정을 따르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품고 있었어요.”

내가 앞서 ‘한계선을 낱낱이 해부당하고 가감없이 뜯겨보인다’라고 서두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한평생 본능적인 욕구를, 눈에 보이는 몸의 부피를, 심지어는 자신의 미래까지도 제한하고 있다.

요 근래 한창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던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갓 들어간 직장에서 막 1년차가 된 페니는 연봉협상을 앞두고 동기 모태일의 원대한 계획을 듣는다. 비슷하게 입사한 처지지만, 페니가 단지 첫 연봉협상에 대한 설렘과 긴장을 안고 있을 때, 모태일은 본인이 담당하는 층의 장長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페니는 모태일의 얘기에 살짝 충격을 받았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칭찬으로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동갑내기인 모태일이 저만치 앞서 나가려는 모습이 페니에게는 불안한 자극제가 된 게 틀림없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페니는 막연히 올해도 작년과 같은 한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신입사원이라는 무적의 방패 뒤에 숨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던 일들도 더는 기대해선 안 될 뿐만 아니라, 모태일처럼 자신만의 계획이 있는 직원과는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게 뻔했다.

아름다운 꿈 동산 저편의 세계를 다룬 소설에서조차 한없이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는 여성이고, 원대한 포부를 가진 자는 남성이다. 우연일지 모를 이분화된 성별로 마찬가지로 이분화된 얘기를 하고싶진 않지만, 그렇다. 여기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내가 속해있는 사회 환경을 ‘우리’로 치환해도 되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나, 또는 페니와 같은 충격을 받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몇이나 될까?

나는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법이 없었다. 남들처럼 죽어라 공부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성적이 잘 나왔고, 특출나게 재능을 보이는 분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웬만큼 못하는 것도 없었다. 부모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온 주변의 인프라, 교육 제반 등은 나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생에 별 굴곡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히 보통의 평범한 인생을 살다보면 무언가를 잘 한다는 건 어떤 재능을 타고나야 진정히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수영을 십 몇년을 했다하여도, 5살때부터 17살까지 개인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해도, 이건 나의 재능이 아니었고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다시 수영장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땐 잦은 이사 탓에 센터와 회관 여러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언제나 적당한 반, 그러니까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알맞은 수준의 반에 들었다. 용의 꼬리보단 뱀의 머리가 되는 걸 선택한 셈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들을 앞지를 수 있지만, 여유로운 게 좋아서 여기 있는거야. 그렇게 관망하는 태도로 수영장엘 나갔다. 어쩌다 운동을 하기 싫은 날이면 남들 다 마지막까지 에너지를 쥐어짜낼 때 꼭 한바퀴씩 빠져먹곤 했다. 진짜 힘든게 아니라 그냥 쉬고 싶어서, 숨이 차는 그 찰나의 시간을 버티기 싫어서 그랬다. 이런 태도는 수영장에서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곧잘 그랬다. 하기 싫은 일이 생기면 졸리지도 않으면서 피곤한 척 했고,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배고픈 척을 했다. 그러면 당장 거길 벗어나서 쉬어갈 수 있으니까. 연기 천재. 장래 유망.


그런데 어느날, 어김없이 멀뚱히 서서 선생님과 수다떠는 나를 본 같은 반 수강생 분이 ‘뒤에서 쉬니까 민망하지?’하고 한마디 하셨다. 속으로는 ‘쉬는 거 아닌데요? 제가 선택한 거거든요? 힘든 게 아니라 체력 배분하는건데요?’ 우다다 핑계를 쏟아내며 화가 뻗쳤다. 그런데 어쩐지 집에 갈 때까지도 그 말을 곱씹었다. 실은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괜히 용 썼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민망하니까 욕심조차 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다 이런 나의 욕구를 억제하게 됐을까?

 


 

[2장] 어머니와의 관계

2장에서는 여성들이 본인의 욕구를 억누르는 이유로 자신들이 겪고 자라온 환경을 든다. 특히나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며 우리의 근본적인 욕구는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피력한다. 즉 이러한 논점을 개인(후천적)에서 환경(선천적)으로 옮기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인 구조와 문화적인 가치관이 우리의 욕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욕망의 원초를 파헤치다 보면 어렸을 적 가정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진부한 분석일 수 있으나 저자는 다른 차원으로 속셈을 펼쳐간다. 즉 식욕과 관련된 문제 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 측면에서도 어머니를 관찰하고 따라하는 학습된 행동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단 관점이다.

책에 언급된 어느 어머니의 생생한 기억, 즉, “하루 종일 일하고 난 뒤에도 말 그대로 손발을 모두 바닥에 대고 리놀륨 바닥을 문질러 닦고, 오븐을 문질러 닦고, 판벽을 문질러 닦던 엄마의 모습”은 나의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 엄마가 당신의 엄마, 즉 나의 할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양상과 더 닮아있다.

엄마가 말하길 할머니는 한평생을 부엌에서 지내시며 삼남매와 지아비를 그 두손으로 먹여 살리셨다. 그게 엄마는 불만이었다. 하루종일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는 할머니. 누구나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 마음 먹는 것처럼, 엄마도 그런 반항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진짜로 요리라거나 청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다.

내가 본가에서 10대의 마지막을 보낼 무렵까지도 우리집은 소위 말하는 ‘집밥’ 보다는 외식이나 배달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했다. 나홀로 상경한 후에도 엄마는 당신이 직접 만든 반찬을 보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정식과 백반이 어떤 건지 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잘 몰랐다. 국은 급식에만 나오는 건 줄 알았다. 같이 지방에서 상경한 친구들이 엄마가 해 준 음식이 그립다고 했을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메뉴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활에 딱히 불만을 가진 적도 없었다. 불만을 가져야 한단 것조차 몰랐다. 여전히 단 한끼를 먹기 위해 웨이팅을 1시간 넘게 하는 건 이해도 못하고 질색하며,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거식증’이고, MD가 소개하는 한마디마저 ‘캐럴라인 냅이 거식증으로 고통받던 시절을 회고하며 쓴 생애 마지막 에세이’일만큼 거창하지만, 이정도까지 했으면 솔직히 내가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단 걸 눈치챘을 것이다. 이래봬도 어떤 음식을 먹고난 뒤 눈물이 날만큼 감격한 적도 없고, 자의로 맛집을 찾아가는 법도 없어서 지도 어플을 다운받은 지 1년 조금 넘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처음에 독서 모임 책으로 이 책이 언급됐을 땐 굳이 내가 얻어갈 게 있을까 의문이었다. 거식증이라니. 너무 뜬금없는 얘기 아닌가. '먹는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그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일 뿐이고, 식사란 건 허기짐을 채울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욕구들』에 따르면 나는 그동안 음식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 오래전부터. 기원을 거슬러, 다름아닌 우리 엄마 때문에.

이 책에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하면서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여자들의 경험담이 나온다. “헬스장에 다녀온 날에만 디저트를 먹거나 저녁을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는” 여자들. “식사 때마다 예외 없이 최소한 한 입은 남기는 걸 규칙으로 삼고”, “작은 케이크 조각 하나, 크림은 빼고”의 규칙을 고수하는 여자들. 어쩜. 딱 내 얘기였다. 알고보니 내가 바로 섭식장애 당사자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달성했다. 남들 다 책상 앞에서 공부하느라 움직임이 없어 살이 붙을 때 이상하게 나는 살이 좀 빠졌다. 이유는 당연했다. 급식이 맛없단 핑계로 밥은 겨우 두 주묵정도 푸고 반찬은 대부분 남긴다던가, 석식을 취소한 뒤 근처 떡볶이집에 가 치즈스틱 두개를 먹는다던가 그런 식이었으니까. 입시라는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애들보다 체중이 덜 나간다는 생각에 남몰래 우월감을 느끼고 그걸 하나의 장점처럼 여겼다. 나는 이상하게 살이 안 쪄, 같은 재수없는 소리와 함께.

그 무렵 내 손목은 한뼘 안에 잡히고도 남았지만 그건 타고난 뼈의 두께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163cm에 46kg~49kg를 왔다갔다 했지만 그 키에는 평균 몸무게라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마른 체형이라고 느낀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단 사실이 한몫했다. ‘오히려 체격이 있는 편이 아닌가?’라고 판단한 적이 더러 있었던 건 성장통을 앓기 전까지 양 뺨은 다람쥐처럼 통통했고, 의자에 앉을때마다 접히는 뱃살에 싫증 내며 피부가 뻘개질때까지 일부러 꼬집은 기억만 수십번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를 끔찍이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탓에 “육체는 가장 중요한 재화였지만, 어느 순간이라도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재화”란 걸 누구보다 체감했다.

특히 매일밤마다 라면 한그릇을 끓이고 폭식하는 엄마를 혐오했다. 당시 엄마는 묵은 가정 불화와 사춘기에 들어선 자식들의 반항 때문에 남몰래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 엄마가 60kg 대를 넘어 70kg에 다다랐을 때, 나와 동생은 엄마가 돼지띠란 이유로 '돼지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밤늦게 야식을 먹고 드러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면 다른 엄마들처럼 요리와 청소도 안 하는 주제에 게으르다고 비아냥대거나 손가락질했고, '그러니까 살이 찌지' 따위의 폭언을 거리낌없이 해댔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절대 엄마처럼 되진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자기 절제를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몸이니까 유전과 닮은꼴이 나를 잠식할까봐 무서웠다. 스스로를 돌본다는 뜻이었겠지만, 현실은 자기 부정에 씌여있었다. ‘간헐적 단식’이란 키워드를 몰랐을 때에도 저녁 6시가 넘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배가 고프면 예민해진다’란 말을 들은 후로는 그 심리 상태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별로 먹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내가, 남들이 으레 짜증낼만한 이유를 이미지화하고 내재화한 것이다. 내가 지금 화가 난 건 배가 고파서야. 엄마가 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엄마를 싫어하는거야.

사실 이 모든 악순환을 부채질한 건 다름아닌 나였단 사실은 돌이켜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교육과 훈육 방식에 있어서는 아주 자유롭고 방목적인 가치관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항상 유언有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그 명령들은 대부분 복장에 관한 규제였다. 레깅스 위에 짧은 상의는 입지 못했고 (심지어 어두컴컴한 공기를 틈타 몰래 입고 나온 모습을 들켰을 땐 다시 귀가하여 갈아입어야만 했다), 공공장소에서는 치마를 입으나 바지를 입으나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했으며, 옷을 갈아입을 때면 창문 앞에 딱 붙은 건물이 없음에도 (심지어 저층이 아닌데도!) 꼭 커튼을 치고 시야가 가로막힌 상태여야 했다. 노브라로 나온 걸 당신이 알아챘을 때 받은 멸시의 시선은 독립하고 난 후로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그 망령은 더운 날씨면 거리낌없이 홀가분한 차림을 입었다가도 영 찝찝한 마음에 급하게 속옷을 챙겨입는 이유가 됐다. ’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해’ 같은 형태 있는 이유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 사정이 분명한 명령들은 “신랄한 힐난의 메아리”가 되어 평생을 쫓아다닐 셈이었다.

크고 투박한 옷들과 사랑에 빠졌지만, 유니섹스uni-sex 태그가 붙어 있는 옷들조차 엄마는 그거 남자옷 아니냐며 핀잔을 주고는 결국 사지 못하게 했다. '여자'다운 옷도 안 되고, '남자'다운 옷도 불허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반발심으로 남들은 평소에 어떻게 입고 다니건 상관 않았으나, 나의 노출은 허용하지 않았다. 가슴을 드러내서도 안 되었고, 허벅지를 보여서도 안 되었다. 문제는 나 자신이 아니라 “약탈적인 남자아이들의 욕망”이었고, 이에 관한 “위협조의 잔소리 조각들”이 무의식중에 잔뜩 박혀있었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밤길을 걸을 땐 이어폰을 꽂으면 안 됐고, 항상 주변을 살펴야 했다. 아무리 통 큰 옷차림과 껄렁한 태도를 가졌더라도, 끊임없이 뒤를 돌아봐야하는 자기 검열이란 덫에 걸리면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캐럴라인 냅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계속 나아가고, 당신의 어머니는 뒤에 남겨진 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혹은 어떻게 거기 도달할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당신은 변화에 대한 무서움과 죄책감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어머니가 방향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당신이 떠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아니 애초에 떠나게 허용한 것 자체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낀다”.

엄마는 내가 옷 매무새를 정돈하지 않는다고 혼만 내었지,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할 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남자들과 어떻게 유대와 연애 감정을 쌓아야 할 지, 혼자 상경한 서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밥을 얼만큼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인지 나는 몰랐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쾌락 추구와 자기 욕망의 충족은 어쩐지 부당하고 자격 없는 일이라는 느낌”으로 나타났고, 엇나가거나 스스로 자격을 박탈하거나, 위험 속에 몸을 던졌다.

지금은 술을 이전만큼 자주 마시지 않지만, 술에 취한 섹스가 잦았던 그날들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20대 초, 동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난 J는 당시 대학가가 유일한 번화가였던 그 골목 토박이였다. 자유롭고 어린 치기에 들끓었던 나는 금방 매력적인 속삭임에 넘어갔고, J랑 만날 때면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소주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맛도 잘 모르면서 따라주는대로 마셨다.

만나는 시간은 매일같이 야밤이었다. J는 일부러 술잔을 채웠고 나도 딱히 마다하진 않았다. 정신없는 키스와 섹스가 난탕하게 이어지던, 비 오는 여름날에 습하게도 달라붙던 끈적한 기억은 맨정신이 아니었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 띄엄띄엄하다. 상대방 들으라고 내는 신음은 목이 졸리자 숨이 막혔고, 입을 통해 강제된 애무는 비릿한 정액을 삼길 통로였다.

어느 파티에서는 이런 적도 있다. 친구가 ‘여기까지 왔는데 잘생긴 남자랑 키스 한 번은 해야지’라고 말하자마자 긴장감이 풀려 그때까지 잘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적 말이다. 주변의 수많은 남자들을 붙잡고, 안기고, 키스하고, 매달리고, 결국 어느 남자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던 기억.

나는 남자들과 술을 마실 때면 안주를 거의 먹지 않았는데 , 내숭이라기보단 혹시 섹스를 하게 되면 옷을 벗을때 배가 나와보일까봐서였다. 속옷 색을 위아래로 맞추고, 갈비뼈를 드러내보이고, 남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홀쭉한 몸매를 보이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도 내가 당신들이 원하는 몸에 부합하지 않아 부끄러울까봐.

일찍이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하셔서 성적 얘기가 자유롭지 않은 가정에서 나고 자란 나는 남자애들이랑 침대에 같이 들어갈때마다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몰랐다. 내가 만족하고 싶은건지, 남자를 만족시켜야 하는지 그 우선순위를 잘 못 정했다. 종지에는 대부분의 연애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작가도 나와 같은 문제를 겪었는데, 고등학생 시절 단절된 상태에서의 애무에 이어 대학생 때의 단절된 상태에서의 성행위가 이어졌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더 현명해지고 더 자신감이 생기고 성적으로 더 능숙해졌어야 할 (그래야 한다고 내가 느꼈던) 나이가 될수록 사실은 나를 더욱더 괴롭혔다”. “공허하고 하나같이 알코올의 힘에 이끌린 일들이었고, 대체로 수동성과 확인 욕구는 높았지만 행위 주체성이나 쾌락은 저조했다.”

결국 불가피한 욕구는 술, 담배,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회피형 애착 유형으로서, 곤란한 상황이 오면 습관적인 거짓말로 주변을 둘둘 싸맨 다음 그 뽁뽁이 같은 게 꽉 눌려지고 연쇄반응으로 터지자마자 다 들통나버리기 전에 큰 걸로 덮으려고 했다. 아무나 만나고, 소리소문없이 발을 빼버렸다. 서투름으로 치부할 때도 있었지만 속으로는 불안했던 가정환경이 그 배경의 기원이라며 탓했다. 그 대부분의 시간동안 나는 “자기 경멸에 절어 있었고, 그게 거의 본능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정보 공백”과 “솔직한 논의의 부재”는 미숙함을 낳았다. 1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택할 자유는 바꿔 말하면 실수할 자유, 더듬거리다 실패할 자유, 자신의 결점과 한계와 두려움과 비밀과 정면으로 대면할 자유, 자아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끔찍한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갈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와 만나기로 선택하는 자유는 나의 권력과 입지를 찾을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못했다.

하버드대학 심리학자인 데버라 톨먼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몸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이해하거나 의문을 던질 때 쓸 수 있는 언어가 없으니, 섹슈얼리티는 수수께끼가 되고 자신의 성적 흥분은 신비이자 금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비난을 모조리 어머니에게 돌리는 것은 문화나 미디어만 탓하는 것만큼이나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일”일테지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렵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는 어머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이는 모두 학습된 행동이다”. “관찰하고 따라하는 것,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여자들의 허기, 감춰진 허기, 갈등하는 허기, 금지된 허기"가 끊임없 새어나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다시 말해, "사랑과 인정에 대한 끝없는 허기였고, 섹스와 만족과 아름다움에 대한 허기, 보이고자, 알려지고자, 먹여지고자 하는 허기, 취하고 또 취하고자 하는 허기였다. 나는 그 허기를 정복했고, 그것을 지배했으며, 밧줄로 수소를 잡아매듯 꽁꽁 잡아맸다.”

 


 

[3장] 내 배가 싫어, 내 허벅지가 싫어 & [4장] 브라 태우기에서 폭풍 쇼핑으로

3장에서는 비로소 여성혐오의 뿌리를 파고든다.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무력감, 그리고 이러한 감정이 어떻게 여성혐오와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다룬다.

‘이런 얘기’를 할 때면 빠질 수 없는 얘기도 나온다. 바로 사회에 짙게 퍼져있는 여성들의 소비문화이다. 여성들이 소비하는 제품들이 어떻게 여성혐오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석하며, 이런 문화가 어떻게 여성들의 자유와 평등을 방해하는지 강조한다.

4장에서는 유달리 '만약 무언가가 된다면', '만약 그러기만 한다면' 식의 as-if 가정이 반복된다. "소비주의의 음흉함" 곧, ‘만약 저 최신 명품 옷을 입는다면 난 누구보다 인기 스타가 될 거야'란 보상 심리가 선사될 때 욕구는 희석되고 잊혀진단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옷이나 메이크업을 향한 강한 끌림을 느껴본 적 없음'이란 경험은 행운일까 축복일까.

학창시절 나는 또래들에 비해 외모 콤플렉스가 없는 편이었다. 며칠동안 감지 않아 부푼 곱슬머리도 자유롭게 방치했고, 색조 화장품은 종류도 잘 몰랐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만약에 ~한다면’ 구절이 나왔을 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화장기 없고 검소하던 우리 엄마는 “친구들의 어머니에게서는 보이지만 내 어머니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탐닉하는 능력을” 반증했다. 그런 집안에서 컸기 때문에 네일 아트, 좋은 옷, 헤어스타일, 외모에 관한 개념이 전무했다.

남들처럼 만약을 전제하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했던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타고나길 이렇게 태어났으니, 내가 동경하는 워너비wannabe 처럼 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단 걸 이미 인정한 터였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카루스의 날갯짓처럼 끝도 없는 수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몸은 말라갔지만 어깨와 골반이 넓어 몸집을 더 커보이게 하는 원피스 같은 류의 옷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아예 실루엣을 가릴 수 있는 박시한 옷들에 더 집착했다. 프로아나(찬성하다의 'pro-'와 거식증의 'anorexia'가 합쳐진 합성어의 준말)의 이미지를 동경하면서, 그 현상에 부합하지 못한 몸매가 미웠다.

언제 한 번 환절기를 맞이 옷을 사기 위해 편집샵에 들러 유행하는 아이템 이것저것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충격을 금치 못했는데, 죄다 유아용 같아 보일 정도로 짧고 딱 달라붙는 상의들과 지독히도 허리를 졸라매는 하의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걸 누가 입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사람이 입을 수나 있단 말인가? 같은 경악과 동시에 그 옷들을 입을 수 없는 내 몸뚱아리가 싫었다. 옷이 안 맞는 게 아니라, 내가 평균에 부합하지 못하는 거라고 질책했다.

저자가 말한대로 “신체 사이즈를 줄이는 것과 자아 자체의 소형화에 대한 강조가 여자들이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 성취를 이뤄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열기를 띠지 않았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을 재편해야 하고, 가치들 뒤에 자리한 뿌리 깊은 가정들을 서서히 제거해내가야 한다"는 것도 페미니즘 공부와 사회 운동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소비로 포커스를 옮기면, 그런 결심과 고찰은 쉽지 않다.

단순히 “뚱뚱해지면 자기를 혐오하게 될까 봐, 태만함 내지 게으름이나 통제력 결여를 연상시켜 수치심을 느끼게 될까봐”, “아니면 단순히 더 날씬하고 튼튼할 때 더 기분이 좋기 때문인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충분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시대에도 여자아이들은 그 작은 옷에 몸을 우겨넣고 있다. 교육된 것일지, 문화적 예속일지, “우리는 자신의 몸을 이해해보겠다고 황급히 광고와 영화와 텔레비전에 나온 이미지들을 흡수했는데, 이 이미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성적 무력함에 대한 시각적 선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영혼보다는 몸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더 쉽고, 문화가 여자들에게 제시하는 좁은 정체성의 틈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처음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쉽겠지만, 이런 현상은 “사회의 보호라는 귀한 자원이 거의 없어서 발달 단계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또래 압력과 과도한 대중 문화에 취약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5장] 목소리가 된 몸

5장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함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다룬다. 침묵은 여성들의 욕구와 목소리를 굳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과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지난 2023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에서는 토크와 강연, 공연 세션이 포함된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진행되었다. 주최측인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인스타그램 @rabbitsubmarinecol)에서 내건 슬로건은 ‘우리가 우리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병보다 더 지독하게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였고, 참여 대상은 ‘거식증과 폭식증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 가족과 친구, 치료자, 먹는 것과 자신의 몸에 불화하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섭식장애에 관해 ‘납작하게’ 이야기한 것들을 걷어내고 새롭게 해부하고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였다. 이전에도 섭식장애 가시화를 위한 움직임은 이어져왔으나,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단 점에서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내가 이 1년짜리 묵은 독후감을 다시 꺼내든 이유이기도 하다.

이걸 왜 해가 넘도록 질질 끌었냐면, 책을 막 다 읽고나서 떠오른 단상들을 모아놓고보니 이건 뭐 소수의 공감 내지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외에는 그 어떤 보상도 없을 한낱 독후감 속에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험을 늘어놓고 전시하는 경향은 배제하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세라면 몇 페이지고 더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틈틈이 손질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허나 앞서 얘기했듯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은 자기 고백의 길로밖에 이어질 수 없고, 그 주장에 힘을 실어볼까 한다. 어느 책 소개에 쓰인 것처럼 ‘일기에도 쓰지 못했고 보는 사람조차 감당하기 힘든 솔직한 고백들을 무서운 기세로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점이 아닐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수치스럽더라도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활동을 통해 뼈아프게 사력을 다하기. 그럼으로써 염오와 절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6장] 희망을 향해 헤엄치기

낯부끄럽고 수치스러우며 이제껏 숨겨야만 했던 역사를 전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건 아마 해방감일 것이다. 그만큼 『욕구들』은 조심스럽게만 쓰이지도, 단 한 명만의 해소를 위해 집필되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책을 덮고난 뒤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일종의 안도감과 감사함이었다. 불쾌감과 불미스러움, 불안함과 불온함에서 우러나온 나의 (과거의) 어리석음은 스스로 정한 규제 때문이 아니라 사실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읽는동안 스스로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단 것이다. 어떤 챕터에서는 여태껏 나조차도 잊고 있던 기억들을 자동으로 반추하였고, 나의 길고도 짧은 생의 역사가, 그러니까 나의 부모, 나의 남자친구들, 나의 습관이 오로지 나만의 것임이 아님에 괄목했다. 굳이 들킨 것도 아니지만 심장이 들쑤셔졌다.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오해로부터 기인했단 인사는 그 어떤 음식보다도 나의 뱃속을 들끓게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한밤중에 피어오르는 폭식에 대한 열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걸까? ‘지금 당장 야식을 먹게 된다면 내일 아침에 얼굴이 부을 게 분명하고, 또 살도 뒤룩뒤룩 찔거야’란 긴장감을 하루아침에 떨쳐내고 본능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는 것일까? 비록 허리춤 양 옆으로 살이 튀어나와도 길이가 확연히 짧은 티셔츠와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해도 되는걸까?

꽤 오래전에 책 속의 명언들을 소화시켰으나, 나는 여전히 수영장 탈의실에서 발가벗고 사방에 있는 거울을 지나칠 때마다 배에 힘을 주어 최대한 살가죽을 갈비뼈에 붙여 보인다. 길을 지나가다 쇼윈도에 비친 모습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매무새를 정리한다. “슬쩍 보기만 해도 자기 점검이라는 현상이 호흡만큼 반사적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알고 있다. “음식과 체중에 관한 여성의 몰두가 자기혐오나 수치심이나 내면화된 여성 혐오 혹은 무엇이든 사회 정치적 성격을 띤 것과 관련 있다”는 것을. 뿌리깊은 자기혐오와 “행위 주체성, 즉 권리 의식과 힘이 결합되는 감정”은 한 끗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남모르게, 나도 모르게 못되게 굴어 엉망이 된 내 몸에게, 우리 엄마와 과거의 여성들과 미래의 여자 아이들에게. 왜냐하면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어쨌든 그것은 일어날 수 있는 변화”니까.

“’나는 충족될 자격이 있다’가 ‘나는 충족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나이 때 내 어머니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모든 자유는 복되고 멋진 것이었지만 내게는 또 그만큼 무섭고 억압적이고 심지어 (물론 당시에는 입 밖에 내어 표현할 수 없었지만) 약간은 부당한 것으로도 느껴졌다. 그런 자유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내가 품고 있던 불분명하지만 뿌리 깊은 일련의 감정들과 모순되는 것 같았다고 할까. - P25

거대하고 모호하고 압도적인 대상(일이나 사랑) 대신 작고 구체적이며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대상(팝콘 한 알)에 초점을 맞추게 한 것이다. - P29

음식, 섹스, 쇼핑. 당신의 독이 무엇인지 불러보라. 욕구, 특히 여자들이 경험하는 욕구는 으스스할 정도로 변신에 능하고 외적인 것들에 요령 좋게 찰싹 달라붙는다. (... p.32) 갈망은 그 자체로 어쩐지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권리는 대가를 지불하거나 스스로 노력해 얻어내야만 한다는 생각, 욕구를 채우려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 P31

대개 파편화된 렌즈를 통해서만 한 번에 한 가지 병폐만 따로 떼어 검토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P34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한다. (…)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긴다. - P36

먹는 양과 칼로리와 지방의 문제로만 파악하면 여성의 갈망이 야기하는 더 폭넓고 다양한 감정들이 가려진다는 사실이다. - P44

욕구는 기본적 생명 유지 문제에서 분리되고 법적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후 주로 내면과 관련된 현상이 되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역량은 물리적 틀이나 정치적 틀보다는 감정적 틀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그 결과 한 여성이 갈망과 만족에 대해 갖는 관계는 마치 거울처럼 그의 자아 의식과 더 넓은 세상에서 그가 자리한 위치를 비춰 보인다. (...) 이런 일들은 많은 여성에게 생사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기쁨과 괴로움의 표지임은 분명하며, (…) - P46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 P48

여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낮은 자존감’처럼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 P49

여자들 여럿이 모여 레스토랑에 갈 때면 섭취량과 자제력의 정도를 드러내고 비교하고 지적하는 그리 은밀하지도 않은 집단적 감시 활동 - P60

대부분 그 허용은 대가를 치르고 얻어내야earn 하며, 그러려면 감시하고monitor 통제해야control 한다. 그리하여 e=mc². - P63

다이어트하는 여자의 사적인 나스닥, 개인의 자기 고문 지수. - P65

신체 사이즈를 줄이는 것과 자아 자체의 소형화에 대한 강조가 여자들이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 성취를 이뤄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열기를 띠지 않았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 P70

선택할 자유도 실질적인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중량이 어떤 식으로든 밑받침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깨뜨리는 느낌,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얄팍하고 힘없는 느낌을 줄 수 있다. - P77

"나는 수년간, 나 자신의 열정을 따르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품고 있었어요." - P84

소비자는 너무 많은 선택에 직면할 때 압도당하는 느낌,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 느낌, 우유부단함으로 마비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 "여자들은 선택할 것이 무한하다. (…) 그리고 이는 매우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당신이 자기라는 존재의 부담을 짊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와 결혼할지, 어떤 경력을 추구할지, 머리카락을 어떻게 자를지 아무도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당신이 의지할 사람은 당신 자신밖에 없다." - P95

다이어트를 하는 여자가 ‘나는 날씬해지고 싶어’라고 말할 때 사실 그는 무엇이든 다른 특성을 갖길 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날씬함으로 대표되지만 그것으로 보장되지는 않는 가치 의식, 소속감, 사랑받는 존재라는 느낌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 P103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들이 구체적인 불안들로 대체된다. - P105

나는 아버지에게는 직업이, 어머니에게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 P128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렵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는 어머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 P131

이는 모두 학습된 행동이다. (…) 관찰하고 따라하는 것,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 P133

오늘날의 어머니에게 허기를 느낄 자유는 있을지 몰라도, 그 허기를 채울 자원까지 항상 있는 건 아니다. - P146

모든 세대는 바로 앞 세대를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다. - P147

당신은 계속 나아가고, 당신의 어머니는 뒤에 남겨진 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혹은 어떻게 거기 도달할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당신은 변화에 대한 무서움과 죄책감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어머니가 방향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당신이 떠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아니 애초에 떠나게 허용한 것 자체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낀다. - P150

쾌락 추구와 자기 욕망의 충족은 어쩐지 부당하고 자격 없는 일이라는 느낌으로 나타났다. - P153

심리적 예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방법으로 집 안에 비참함을 불러들여 청구서에 납부 완료 도장을 받는 일 - P157

무. 식욕 없음. 내 몫은 아님. (…) 이런 일이 일종의 쾌거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 P168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경악할 테지만, 그럼에도 이런 독백은 너무나도 흔하고, 너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얼마나 혹독한 말인지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 P170

피부는 (…) 하이드레이팅하고, 스무딩하고, 토닝하고, (…) 컨투어링하고, (…) 안티에이징하고, (…) 학위 취득만 빼고 다 해야 한다. - P187

내가 이런 생각의 오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 반응은 아주 깊은 수준에서 작동하여, 내가 여성 혐오의 뿌리를 이해하고 문화와 자아 사이의 관계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성인 여성으로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어리고 아직 한참 미숙한 존재로서 처음 경험했던 감정들을 촉발한다. - P189

육체는 가장 중요한 재화였지만, 어느 순간이라도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재화였다. - P204

내게 이 모든 걸 `거부할 힘`과 `의지력`이 있다는 식의, 일종의 자만심 같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시기했어. - P215

그들에게 음식과 체중에 관한 여성의 몰두가 자기혐오나 수치심이나 내면화된 여성 혐오 혹은 무엇이든 사회 정치적 성격을 띤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의 눈빛은 이내 따분하다는 듯 흐리멍덩해진다. - P217

가치관을 재편해야 하고, 가치들 뒤에 자리한 뿌리 깊은 가정들을 서서히 제거해나가야 한다. - P225

마치 그게 실제로는 자기 체중이 아닌 것처럼. - P226

지적인 신념은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서적 뿌리는 없다는 것. 페미니즘의 힘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몸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 - P244

그들의 갈망에 굴복하면 우리에게는 헤픈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너무 많이 억제하면 내숭쟁이가 됐다. - P253

"아마 실제로 많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의 몸을 인정해주지 않는 문화에 직면해 자신의 성적 욕망의 딜레마를 그 욕망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써 해결할 것이다." - P254

사회의 보호라는 귀한 자원이 거의 없어서 발달 단계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또래 압력과 과도한 대중 문화에 취약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 P262

`괴로운 일은 상품으로 해결하세요, 자아의 바깥을 바라보세요.` - P274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지만 그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다소 반사적인 반응이었고, (…)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성공 자체도 운동의 절박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 P281

슬픔은 주기적으로 뚜렷한 원인도 없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나 상태가 나쁜 아침 잠에서 깬 첫 순간,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공허함과 갈망의 습격으로 제 존재를 알린다. - P319

프로이트는 인간의 ‘죽음의 본능’에 관해 썼다. 이 말은 실제로 삶을 끝내고 싶다는 바람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들어 있음 직한 그 초기의 마취 상태와도 같은 지극한 행복의 상태를, 원함과 존재함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완전한 평온함과 안도감의 상태를 되찾고 싶어하는 갈망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 P322

욕망에 이름을 붙여야 하고, 무엇이 그 욕망의 성취를 방해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하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개의치 않은 채 억제를 부수고 나갈 힘과 용기와 자기 수용을 이끌어내야 한다. - P359

감정의 모든 뉘앙스와 근원을 이해하려는 본능을 억누르세요, (…) 그때의 나는 모든 집착에 따라붙는 전형적인 착각, 즉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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