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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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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따옴표 안의 문장들은 모두 인용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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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표준국어대사전)’이다. 더 쉽게 생각하면 흔히 ‘미술’로 환유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에게 ‘예술’이 꼭 필요한가?

이는 창작인, 관람자, 수집가 등의 입장을 편가르거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가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이 아니다. 자연에서 파생되지 않고 인간이 특별하게 마련해야 가치가 생기는 이 ‘예술’이 때론 너무 거대하거나 우습게 느껴지곤 한다는 게 문제다. 유행을 좇아 전시회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보이곤 한다. 해외 여행 계획을 짤 때 너나 할 것 없이 유명 미술관 방문 일정을 2시간 정도 넣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사전에 정의된 ‘아름다움’을 온전히 흡수하기에 충분치 않단 걸 공감할 것이다. 거대한 유화 작품 앞에, 혹은 의미 불명의 행위 예술가 앞에 서 있을 때마다 스스로의 지식 혼은 존재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기존과 다른 영역에서 분석하며 새롭게 (비록 1972년에 소개 되었지만) 주장한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작가의 관점은 '미술의 영역과 그 여타의 다른 삶의 영역과의 복잡한 관계를 보다 자세하게 검토하려는 것'으로, 이것은 이른바 신미술사학이 일반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이다. 이에 따라 본 서적은 정체를 알 수 없고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예술’을 우리 사회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총 7 챕터에 걸쳐 설명한다.


1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을 ‘보는 행위’에 대해 역설하며 그 의미를 읽는 방식이 얼마나 주관적인가에 대해 ‘동시성’이란 키워드 아래에서 설명한다. 하나의 작품에, 혹은 여러가지 작품들의 배열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담겨 있는 동시성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살펴보며 기존에 미술을 간주하던 시각을 깨뜨린다.

예를 들어 어떤 미술관에 유화 작품 A가 걸려있다고 가정할 때, 인간 P와 Q는 객관적 사실보다는 본인의 관심을 끄는 것에 우선 초점을 맞춘다. P가 전체적인 색감에 감탄할 때, Q는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구도를 생각하는 식이다. 즉, 감상 체계는 보는 이의 의식이 지대하게 포함된 채 이루어지며, 따라서 예술을 감상하는 관점은 여러가지로 분화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림의 모든 요소들은 동시에 보이도록 그려’져서 저마다 ‘결론을 다시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유화 작품 B와 C가 A를 사이에 두고 걸려있다면 동시성은 다른 종류의 것이 된다.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 옆에, 또는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이는 내가 도서나 영화는 좋아하지만, 정적인 미술 작품이나 공연 혹은 연극 따위의 장르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를 대신 피력해준다. 잘 편집된 순서에 따라 특정 장면을 연속해서 따라가도록 설계된 작품보다 정보가 많음에도 한 눈에 이해해야 하는 작품들의 피로감이 더 큰 것이다.

존 버거는 또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변화가 미술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서도 논한다.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되는 것이었다. 예술의 권위가 ‘역사 내내 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술’로 인식하는 작품들은 대게 아주 오래된 것인 까닭은 우리가 당시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적인 교육도 대부분 검증되었다 할 수 있는 고전 작품들로 이루어지기 일쑤이다.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작품이 보여주는 역사적 순간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에 세월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어 우리는 시점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짝수번의 챕터에서는 오로지 이미지의 나열만으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는다. 2장에서는 3장에서 소개될 벌거벗음(nakedness)과 누드(nudity)에 대한 예고로 가득한 이미지들이 산재해있다. 헐벗고 꾸며진 여자를 지켜보는 남자들과 관객의 시선. 정물과 여성을 대조 시키며 상품 혹은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인식을 미리 본다.


3장을 읽는 순간 어찌 (G)I-DLE (이하 아이들)의 신곡 Nxde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존 버거는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라며 둘 사이의 명백한 차이에 선을 긋는다.

한 K-POP 여자 아이돌 그룹의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자 쓰인 이 곡의 주요 가사도 다음과 같다.


♬ Why you think that 'bout nude? / 'Cause your view's so rude / Think outside the box / Then you'll like it (… ) 아리따운 나의 누드 / 아름다운 나의 누드 / I'm born nude / 변태는 너야

♬ 야한 작품을 기대하셨다면 / Oh, I'm sorry 그딴 건 없어요, 환불은 저쪽 / 대중은 흥미 없는 정보 (… ) 행복과 반비례 평점 but my 정점 / 멋대로 낸 편견은 토할 거 같지


왜 미술관에는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걸려 있을까? 그것도 발가벗겨진 채로? 남자 관객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감상하고 받아들이는 지 알 겨를이 없지만, 내가 각종 유럽 미술관에 방문할 때마다 항상 들었던 의구심이었다. 페미니즘이 2010년 초반에 한국 여성들을 말 그대로 강타했고, 여자라고 해서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할 필요가 없단 걸 자각했음에도 각종 누드화가 불편한 이유를 정확히는 몰랐다. 보다 깨어있을 서구권 공기관에 누드화들이 주렁주렁 걸려있으니 잘못된 것들은 아닐텐데, 같은 생각만 했다.

이전의, 어쩌면 지금까지도 동일하게 표현되는 누드화들은 ‘성적인 것을 감추지 않고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직접적인 목적이나 동기가 어떻든 간에 여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말해주는 일종의 표지(標識)로 읽을 수’ 있으며, ‘. 여자는 그림 바깥에 있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그 여자의 진짜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즉 관객(소유자)을 쳐다본다’. 특히 누드화 속 여자들은 유독 다른 방식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관객과 소유자를 위한 시선 처리 때문이었다.

Nxde를 작사·작곡한 아이들의 리더 전소연이 이 책을 읽었는 지는 미지수지만(오히려 마릴린 먼로의 일화에서 따온 게 명백한 오마주들이 가사와 뮤직비디오에 점칠되어 있으나), ‘누드가 언제나 관습에 의해 정해지며, 이러한 관습의 권위는 특정한 미술전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K-POP의 현주소에서 깨부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크게 칭찬할 일이다.


4장에는 유사한 구도와 주제로 표현된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성녀, 죽음, 정물, 누드, 큐피드와 사랑, 초상화. 그것들이 이제껏 어떻게 그려져 왔는지, 어떤 식으로 변화해 왔는지, 각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의미는 뭐가 있을지 짚어보았다.


5장에서는 유화의 기본적인 상식들을 언급하며 부와 미술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 파헤친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금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탐나는 물건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그림은 ‘소유자의 재력과 일상의 생활방식이 실제로 어떠한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풍경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연이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해도 ‘유화와 소유 재산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유지된다. 한 예로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앤드루스 부부>는 ‘자신들의 땅을 실제처럼 보이게 했던 유화의 능력‘ 덕분에 ‘지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 ‘액자 안에 든 유화’는 ‘세상을 향한 상상의 창’이라기 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이와 반대로 때론 서민의 삶을 그린 민화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그림 속에서 떠들고 웃고 즐기는 ‘가난뱅이들은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잘살 수 있다는 기대가 희망의 원천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규범을 타파하기 위해서 몇몇 예외적인 예술가들은 기존의 것과 ‘정반대되는 작품들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화가가 장인으로서 그가 존중해야 한다고 배워 온 전통적 회화기법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갈등하고 싸움에 나서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예술가들이 오히려 이 전통을 가장 잘 대표하는 뛰어난 예술가로 칭송’된 이유는 ‘문제의 예술가들이 죽고 나면 전통은 그의 작품에서 몇몇 기술적인 요소들만 받아들인 후, 마치 원칙 자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흥미롭고도 슬픈 이 비화는 ‘위대한 예술가’를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으로 정의내린다.

일전에 정세랑 작가의 신작과 관련한 낭독회에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의 주관이나 가치관이 작품에 뚜렷하고 또 빠듯하게 차고 있다. 이 비율을 어떻게 조정하고 있으신지.”

이에 대한 작가의 답변으로 이 챕터를 갈무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전으로 칭송받는 작품들을 보면 항상 작가의 주장이 강한 편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작품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럼에 나는 굽히지 않고 계속할 것이다.”


부와 가난을 비교하는 작품들. 생활 양식, 옷, 생활 방식, 인종, 동물, 배경이 되는 자연.


마지막 장에서는 근·현세대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예술 양상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지침을 제시한다. 가장 크게 비트는 부분은 바로 ‘우리는 정적(靜的)이고 광고는 동적(動的)’이란 것이다. 우리가 광고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는 것. ‘광고는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하며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전보다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고 얘기한다’. 어쩌면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에서도 밝혔듯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관념은 주로 마케팅에 이용하는 작품들과 기법들에서 발견해낼 수 있는데, 이 책에서 권장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사진, 화보잡지를 들추어 보거나, 거리로 나가 상가의 진영창들을 구경한 다음 도판이 실린 미술관의 전시 카탈로그를 들추어 보고 이같은 두 종류의 매체를 통해 얼마나 비슷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지 주목’해보는 것. 작가는 '충격적일 정도로 유사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 것이라 자신하며, '이같은 상호 연관성’은 ‘사용된 기호체계의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로 하여금 ‘진짜 물건을 소유하거나 소유한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느낌은 5장에 걸쳐 얘기한 유화의 특징을 떠올리게 한다. 아래 문장을 살펴보자.

‘유화는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실제에서건 혹은 상상에서건 그가 현재 눈으로 보는 것을 그렸다. 반면에 순간적인 쓰임새 때문에 만들어진 광고의 이미지는 미래 시제만을 사용할 뿐이다.’

이 부분은 캐널라인 냅의 <욕구들>에서도 읽을 수 있다. '만약에 내가 ~했다면'이란 생각으로 거식증을 앓거나, 더 많은 화장품을 사거나 하는 등 동경하는 모델을 따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인 소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1장에서 논의한 한 공간에 있는 여러 작품의 ‘동시성’에 대한 인식도 광고에 대입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콘트라스트’라는 말로 ‘광고의 본질에 대해’ 드러내보인다.

‘광고에서는 본질적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광고는 그것 이외에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을 때만 효력이 있다. 광고에서 모든 진짜 사건들은 예외적인 일이고 남들에게나 생기는 일이다. 방글라데시의 사진을 볼 때 그 사건은 비극적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 사건들이 데리(Derry)나 버밍엄(Birmingham)과 같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면, 그 콘트라스트는 그에 못지않게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콘트라스트는 반드시 그 사건이 비극적이라는 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건이 비극적이라면, 그 비극은 그러한 콘트라스트에 대해 우리의 도덕적 감각을 일깨워 줄 것이다. 또한 만일 그 사건이 기쁜 일이었고, 직접적이고 상투적이 아닌 방식으로 찍혔다면 그 콘트라스트 역시 상당한 것이 될 것이다’.

아무리 내 나이의 학생들에게 벌어진 세월호 사건을 실시간으로 보며 충격을 받았고, 얼마전의 열차 탈선 사고가 당장 친한 친구에게 일어난 사고라 해도, 이태원에서 직접 겪었던 참사는 큰 트라우마가 되어 나에게 덮쳤던 걸 생각하면 집단 뿐만 아니라 한 개인에게 콘트라스트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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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짧은 개인사 공유를 끝으로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대한 독후감을 마무리할까 한다.

성인이 되고 서울에 살게 되면서부터는 곧잘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가는 편이었다.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꼬드겨셔였을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모름지기 상경한 자의 특권은 문화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는지, 그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해외 여행을 가면 인근 유명 미술관엔 꼭 방문했기에 아마 후자가 그 목적에 더 가까운 이유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미술을 잘 모른다. 작품을 어떻게 보면 되는지 ,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게 회화 작품이 됐건, 설치 작품이 됐건, 영상물이 됐건 잘 몰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고집은 세서 오디오 가이드나 도슨트는 거르기 일쑤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진정한 예술이란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200쪽이 채 되지 않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알게된 건 개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는 정확하다. 과거의 내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단 것. 예술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까.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 P9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 P11

있는 그대로의 실제 세계란 단순히 객관적 사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 P14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 P14

결국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하는 것이다.
- P15

아직은 할스가 살았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19

조금만 달리 보면 너무나 명백한 것을 쓸데없는 엉뚱한 설명으로 핵심을 흐려 놓는 데서 신비화는 비롯한다. - P20

인상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도망쳐 사라지는 것 (...) 입체파 화가들에게 (...) 그들이 묘사하는 (...) 주위의 여러 다른 각도에서 본 광경들을 한데 모은 전체를 가리켰다. - P2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예술은 상업보다는 더 위대한 것으로 생각되기 떄문에― 시장 가격은 정신적인 가치의 반영으로 간주된다.
- P27

그림의 모든 요소들은 동시에 보이도록 그려졌다. (p.33)

그림 전체의 동시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뒤바꾸거나 결론을 다시 내릴 수 있다.
- P33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 옆에, 또는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 P35

작품이 보여주는 역사적 순간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 P38

이런 역사 내내 예술의 권위는 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다. - P39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 P54

직접적인 목적이나 동기가 어떻든 간에 그 여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말해주는 일종의 표지(標識)로 읽을 수 있다. - P55

왕은 이를 여인의 복종의 증거로서 자랑하고, 그 그림을 보는 손님들은 왕을 부러워하게 된다. - P62

누드가 언제나 관슴에 의해 정해지며, 이러한 관습의 권위는 특정한 미술전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 P63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 P64

하지만 여자의 관심은 좀처럼 상대 남자를 향하지 않는다. 여자는 그림 바깥에 있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그 여자의 진짜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즉 관객(소유자)을 쳐다본다.
- P66

성적 행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자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 P67

성적인 것을 감추지 않고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 P74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 P76

흔히 수많은 삼류 작품들이 탁월한 작품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명은 고사하고― 무엇이 그 둘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 P103

그림은 금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탐나는 물건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만 했다.
- P106

그림 소유자의 재력과 일상의 생활방식이 실제로 어떠한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 P116

먼저 가난뱅이들은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잘살 수 있다는 기대가 희망의 원천이라는 주장이다.
- P122

자연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 그럼에도 유화와 소유 재산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 - P123

앤드루스 부부가 자신들의 땅을 보며 느꼈던 즐거움 중에, 지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그 즐거움은 자신들의 땅을 실제처럼 보이게 했던 유화의 능력 때문에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 P127

우리는 액자 안에 든 유화가 세상을 향한 상상의 창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 다시 생각해 보면, (...)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 P128

몇몇 예외적인 예술가들은 전통의 규범을 깨고 전통적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작품들을 생산해냈는데, 그러한 예술가들이 오히려 이 전통을 가장 잘 대표하는 뛰어난 예술가로 칭송되었다. 그러한 주장이 가능했던 것은, 문제의 예술가들이 죽고 나면 전통은 그의 작품에서 몇몇 기술적인 요소들만 받아들인 후, 마치 원칙 자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 P129

위대한 예술가란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이다.
- P129

화가는 장인으로서 그가 존중해야 한다고 배워 온 전통적 회화기법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갈등하고 싸움에 나서게 마련이다. - P129

우리는 정적(靜的)이고 광고는 동적(動的)이다.
- P151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전보다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고 얘기한다. - P152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 P154

광고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슬쩍 훔쳐내어선 광고 상품의 구입 대가로 그 애정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 P155

사진, 화보잡지를 들추어 보거나, 거리로 나가 상가의 진영창들을 구경한 다음 도판이 실린 미술관의 전시 카탈로그를 들추어 보고 이같은 두 종류의 매체를 통해 얼마나 비슷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지 주목해보라. - P160

이 느낌이 그로 하여금 진짜 물건을 소유하거나 소유한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 P163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 P165

유화는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실제에서건 혹은 상상에서건 그가 현재 눈으로 보는 것을 그렸다. 반면에 순간적인 쓰임새 때문에 만들어진 광고의 이미지는 미래 시제만을 사용할 뿐이다.
- P168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 P172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 P173

콘트라스트가 광고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 보여 주는가 (...) 광고에서는 본질적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광고는 그것 이외에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을 때만 효력이 있다. 광고에서 모든 진짜 사건들은 예외적인 일이고 남들에게나 생기는 일이다. 방글라데시의 사진을 볼 때 그 사건은 비극적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 사건들이 데리(Derry)나 버밍엄(Birmingham)과 같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면, 그 콘트라스트는 그에 못지않게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콘트라스트는 반드시 그 사건이 비극적이라는 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건이 비극적이라면, 그 비극은 그러한 콘트라스트에 대해 우리의 도덕적 감각을 일깨워 줄 것이다. 또한 만일 그 사건이 기쁜 일이었고, 직접적이고 상투적이 아닌 방식으로 찍혔다면 그 콘트라스트 역시 상당한 것이 될 것이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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