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거주불능 지구 - 한계치를 넘어 종말로 치닫는 21세기 기후재난 시나리오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지음, 김재경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큰 따옴표 안의 문장들은 전부 본문 내 인용구입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국내에서는 울진 대형 산불이 발생했고, 꿀벌 군체가 실종되었으며, 카페 실내에서는 일회용컵을 사용하지 못하는 법안이 시행됐다. 국외적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으며, 마치 영화 '돈 룩 업'처럼 기후과학자인 피터 칼머스가 체이스은행 입구에서 평화시위를 하다 체포됐다. 우리가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점도 기후 변화가 "국지적인 재해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립된 단서 같은 게 아니"며, 이젠 보고싶은 모습을 선택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그림자가 일상의 코앞까지 닥쳐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일련의 사태들은 익숙해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를 자각하고 도덕적 양심 속에서 행동해야 한단 걸 의미한다.


그럼 채식과 미니멀리즘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으나 관련 전문 서적을 고르는 데에는 한참을 망설였던 나에게 <2050 거주불능 지구>는 해답을 주었을까?


사실 어마어마한 시간을 투자해 완독을 하고 난 뒤 든 생각은 '그래서 결론이 뭔데?'였다. "개인적인 차원의 생활양식 조정은 전체적인 수치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며 오직 정치적 차원의 움직임으로 확장될 때만 의미가 있다"면, 일개 동아시아-대한민국-서울의 일반 회사원인 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어렸을 적에는 막연히 환경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아마 책이나 미디어에서 빙하가 녹고 오존에 구멍이 뚫리는 모습을 목도한 후였을 것이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증거는 대략 10살 정도의 어린 소녀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환경오염 때문에 인간이 멸종되고 말 거라는 주장은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후대의 일 같이 느껴지는 동시에 퍽 무시무시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어떤 결과가 초래될 지에 대한 논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협소해 거의 매번 해수면 상승 문제에만 한정돼 있었"을지라도 코카콜라 광고에 나오는 귀여운 북극곰이 살 터전이 없어진단 사실만으로도 지구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인간의 잘못이 크고, 결국 인류란 집단 속엔 내가 구성원으로서 포함되어 있으니 죄책감으로 앓았다. "영구동토층이 녹아내리면 메탄이 방출될 수 있다는 점"은 몰랐는데도 그랬다.


마냥 불편하기만 했던 마음은 어느 날 하교를 하던 중 친구와 골목길을 걸으며 “넌 장래희망이 뭐야?” 란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환경운동가가 되고 싶어."라고 대답하며 어쩐지 전환되었다. 누구보다 당찬 대답에 나조차 깜짝 놀라고 말았던 것 같다. 왠지 단언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마음이 벅차올랐다. 자기 인생 살기 바쁜 어른들을 대신해 나라도 뭔가를 바꿔보고 싶었다. 그맘때쯤 좋아했던 스파이더맨과 같은 히어로의 마음이 발동했달까. 그때부터 미래에는 보다 나은 세상이 되어 있으리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으로 나무젓가락과 같은 일회용품을 기피하게 됐고, 혹여 바닷속 물고기들이 죽을까 봐 샴푸도 엄청 조금씩 사용했다.


문제는 입시와 마주하게 되자 당장의 진로 설정과 자기 계발에 몰두하게 되었단 거다.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자기 인생 살기 바쁜 어른'이 되기 위해 이상에 가깝던 꿈은 성적에 맞춰 좀 더 현실적인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 세월은 야속히 흘렀고, 궁극적 고향인 지구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은 이미 한참을 무뎌진 채 겨우 남은 양심만을 건드릴 뿐이었다.


20대를 맞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그 앞 작은 원룸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요리에 취미가 없다는 걸 핑계 삼아 배달음식을 꽤나 자주 시켜 먹었다. 설거지가 귀찮다는 까닭으로 일회용품을 사용한 건 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걸 쓰지 않는 것도 환경오염이라고 일컬으며 스스로를 기만했다. 그래도 한 번 쓴 종이컵은 아깝다며 두세 번 정도 쓰고 버렸다. 딴에는 그것도 나름의 재활용 방법이었다. 이래봬도 어렸을 적 꿈이 환경운동가였으니까.


페미니즘이 2030 여성들 사이에 유행처럼 자리잡아 갈 땐 미디어가 우습게 여기는 명품백을 든, 소위 '된장녀'에 대한 이미지를 타파하고자 에코백을 수집하듯 사들이기도 했다. 미술관 전시 굿즈로 나온 에코백, 여행지에서 발견한 에코백, 아이돌 굿즈 등 종류도 다양하게 모았다. 이왕 들고 다닐 거 더 예쁜 제품을 찾아 나섰다. 재질과 크기도 워낙 다양해서 흐물흐물한 에코백, 어깨끈이 긴 에코백, 색이 화려한 에코백 등 적재적소에 매치할 수 있는 독특한 제품을 발굴하는 데 몰입했다. 이름에서부터 ‘에코’자가 들어가니 친환경 이미지를 풍긴 탓도 컸다. 많이 사면 살수록 다다익선이라고 여겼다. 그때는 '그린 워싱'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역시 환경운동가에게 걸맞은 소비를 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기만했다.


들어야 할 가방이 많아지니 그에 맞는 옷도 필요했다. 여태껏 엄마가 사주거나 만들어준 옷을 헤질 때까지 입었던 내가, 학교 안팎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패션에 대한 관심을 키워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들처럼 치장하고 유행을 좇는 게 주체적인 성인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자주 입는 브랜드를 유심히 보았고, SNS에서 ‘트렌드템’이라고 소개되는 액세서리는 분기별로 꼭 샀다. 그렇게 옷장에 수많은 옷들이 쌓여갔지만 남들처럼 한철 입고 버리기는 안 한다며 자위했다. 본인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선 무언가를 비워내는 것보다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어쨌든 오래오래 입는 꼴이니 결국 비전 있는 선택이라고 눈가림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내가 버리지 못했던 건 하나 둘씩 사 모은 에코백이나 옷들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사 모으는 버릇이었다.


영국 환경청은 이미 2011년에 ‘수명 주기 평가’ 연구에서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순서가 비닐봉지(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종이봉투, 면 재질의 에코백 순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각 제품 생산 시 발생하는 탄소의 양을 고려한다면 비닐봉투를 한 번 사용할 때 종이봉투는 3번 이상, 에코백은 131번 재사용돼야 환경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덴마크의 환경 및 식품부에서도 유기농 면으로 만들어진 에코백은 비닐봉지(저밀도 폴리에틸렌·LDPE)보다 2만 번 넘게 재사용돼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정보를 어느 기사에서 처음 읽었을 때 내가 한 건 다른 것도 아닌 셈이었다. 만약 하나의 에코백을 하루 동안 사용하는 것을 한 번이라 가정한다면, 총 54년이 걸리는 2만 번의 재사용까지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럼 그것을 131번 넘게 들고 다닌 적은 있는가 반추하면 쉽사리 고개가 끄덕여지지가 않았다.


21세기의 패션 산업에 물든 버릇은 더 심각했다. 부담 없이 쇼핑할 수 있는 SPA 브랜드가 대중적으로 등장한 이후부터 옷을 더 쉽게, 더 싸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돈 없는 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각종 값싼 의류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저렴한 폴리에스터는 면 섬유의 세 배에 달하는 탄소를 배출하며, 세탁 시에는 미세 플라스틱 조각을 떨어뜨려 바다를 오염시킨단 건 당연히 몰랐다. 부자재·섬유 제조, 염색 공정 등에서 배출되는 쓰레기와 화학물질, 폐수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연청, 진청, 찢청, 배기 스타일 등 가짓수도 다양한 청바지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 무려 물 1,500L가 사용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들이 하나씩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꼬박꼬박 사 모은 적이 있으니. 그동안 얼마나 지속적으로 환경에 악영향을 미쳤던걸까.


2018년 쓰레기 대란과 실내 매장 내 일회용 컵 규제 시행 이후 텀블러와 에코백 판매가 증가했단 사실은 나의 경각심을 더욱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유기농 작물에 대한 수요를 맞추기 위해 소규모 농가에서 비닐하우스부터 만드는 것도, 바이오 연료를 위해 열대우림을 밀어내고 경작지를 조성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녹색 소비’가 기업의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한 사회에서 지갑을 여는 것만으로는 환경오염의 탈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그간 작게나마 환경주의적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을 다시 정의할 필요를 느꼈고, 내가 소비했던 건 결국 친환경 제품이 아니라 잠재적 쓰레기였다는 걸 인정했다.


사실 그맘때엔 코로나19로 인해 미니멀리즘 성향이 대중 사이에 폭넓게 확산되던 참이었다.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옷을 사지 않아도 됐고, 재정 긴축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이유로 밥도 거의 집에서 해먹었다(팬데믹 사태가 이어질수록 감염 위험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일회용품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건 여기서 차치하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인간의 본질, 즉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갑작스러운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더 이상 타인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행하던 소비현상을 과하게 하지 않아도 됐다. 누군가는 맥 빠질 그 상황을 나는 기회로 여겼다. 비로소 실천하는 환경주의자가 되겠노라고 굳게 결심한 것이다.


물론 미니멀 라이프와 비거니즘으로의 전향은 한순간에 이뤄지진 않았다. 한참 살아갈 인생에서 물욕과 육류를 없애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 <어벤져스>에 비유하자면 나의 환경주의적 결심은 타노스가 손가락을 한 번 튕겨 세상의 절반을 사라지게 해 이로운 미래에 도달하는 것보단 그 결과를 위해 인피니티 스톤을 찾고 적들과 싸우는 과정과 더 닮아 있었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밝히는 일이 보기보다 꽤 어려웠단 소리다.


왜냐하면 갓 사회에 나온 나는 힘없는 신입사원일 뿐이었고, 사내 식당에서 제공되는 식단은 정해져있었다. 가치관을 당당히 피력할 여력이 없었기에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됐을 때는 식판 위에 올라온 돈까스를 억지로 씹어먹어야 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헛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자니 2018년 겨울, 평창에서 올림픽 자원봉사자로 일했을 때를 반추하게 됐다. 당시 근무자들에게 배급되는 식사는 큰 프랜차이즈 업체로부터 일괄 배급되는 도시락 형태였는데, 1-2주 정도 지나자 채식 식단도 제공되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어느 비건 봉사자의 건의로 이뤄진 수요 조사로 시행된 결과였다고 했다. 물론 국제적인 행사이니만큼 다양성 존중이 큰 까닭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그 배경과는 상관 없이 자신의 소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모습이 퍽 멋있었던 기억이 있다.


이 우연이 아닐 회상을 발판 삼아 나는 친한 회사 동료들을 시작으로 주변에 차츰 채식주의자란 사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에 상응하는 반응에 어떻게 마주해야 할 지 몰라 멋쩍게 웃기만 한 것도 사실이다. '왜 고기를 안 먹어?', '우와 처음 봐.', '너는 지구를 사랑한다는 애가 플라스틱 빨대는 써도 돼?'. 등등.


상처였다. 정말 말그대로 마음의 상처였다! 응원이나 지지는 커녕 구경거리 취급을 받거나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나는 니들뿐만 아니라 니네 후손들까지도 어떻게든 살려볼려고 고기도 안 먹고 텀블러도 들고 다니는데, 자기들은 하는 것도 없으면서 꼬투리만 잡고…. "무려 전 세계 탄소배출량의 3분의 1이 식품 생산 과정에서 비롯"된다고! "기온이 1도 상승할 때마다 수확량이 10퍼센트씩 감소"한다는데, "경작에 적합한 토지마저 순식간에 황무지로 뒤바꾼다는 점에서 열기 자체보다 가뭄이 식량 생산에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거 알아? 너 <설국열차>처럼 바퀴벌레 영양갱만 먹고 싶어? 해양 플라스틱 오염의 15~31%가 가정 및 산업용 제품에서 방출된 미세한 입자 때문인데, 이러다 니 창자에 미세플라스틱만 가득 차면 어쩔래!!! 막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땐 이 책을 읽기 전이라 팩트로 맞받아칠 역량이 안 됐다.


'인간 무익론'에서 "정치적 우울감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체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할 때 경험하는 감정을 뜻하며, 절망감과 무력감마저 사실은 항의의 절규인 셈"이라 했는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겉핥기 식의 개념과 단순한 마음가짐만으론 아무것도 보호하지 못했다. 저자의 말마따나 "기후변화를 완전히 부인하거나 반대로 완전히 체념하는 태도보다는 반쯤 무지하고 반쯤 무관심한 태도가 전염병처럼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한 명의 의지만으론 세상을 바꾸기에 역부족이었다. 분명 샤르트르는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죽은 지성'이라 일컬었건만, 이상향은 꿈을 꾸는 행위가 아닌 행위의 증거로 삼는 계기여야 했다.


그때부터 환경에 관련된 기사와 뉴미디어 글들을 끝없이 읽어가기 시작했다. 각종 계정들을 팔로우하고, 여러 연합과 단체에 후원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린피스 서울사무소에서 진행한 배우 류준열의 인터뷰를 읽게 됐는데, 그 시기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무엇을 쓰고 안 쓰는지 얽매이기보다는 스스로 환경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죄책감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환경 보호를 하고 싶지 않거든요. 어쩔 수 없이 플라스틱 병에 든 물을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 죄책감을 가지게 되면 너무 스트레스가 되잖아요. (중략) 누군가의 행동으로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잖아요.


진짜 그랬다. 시작이 미약했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조차 더러 있었더래도 채식 생활이 계속되자 같이 살게된 친구들의 식성이 조금씩 바뀌었고, 주변 동기들은 불필요한 컵홀더는 자연스레 챙기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약속 장소는 채식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식당 위주로 배려해줬다. 환경 관련 포스팅에 멘션하고 공감해주는 친구들이 늘었다.


혹자는 이 소중한 인연과 변화가 "소비 행위가 한편으로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며 또 한편으로는 미덕을 과시할 수 있는 아주 현대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깟 미덕 좀 과시하면 어떤가. 개인의 소비 선택이 아주 작은 요인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 "미래를 조금도 바꿀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다가는 그 가능성마저 정말로 닫혀 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 환경주의 운동은 당장 거리로 나가 피켓을 들고 싸우길 바라는 투쟁도 아니고 일부의 이상주의적 지향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를 정부와 기업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게으른 환경주의’ 혹은 ‘에코의 함정’이라고 불리듯 우리의 경각심을 지우는 일이다. "우리의 책임을 다음 세대 후손에게, 마법 같은 혁신을 일으킬 기술자에게, 당장의 폭리에 집중하는 정치인에게" 미룬다해서 총망라적인 재앙이 우리 모두를 표적으로 삼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우리 모두가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고통을 나눠 갖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는 책임을 나눠가지는" 수밖에 없기에 나는 친구들의 움직임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무시하고 넘어가지 말았으면 한다. 맹목적이고 무비판적 소비와 섭취가 지속된다면 자연에서의 자원 착취가 반복될 것이고, 더 많은 생산과 더 큰 이윤을 위한 과잉생산구조가 굳어진다. 어떤 물건이든 아예 사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꾸준히 쓰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원 순환에 역효과가 발생함을 유의해야한다.


마땅히 나아가는 방향이 자연에 완전히 무해하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인 걸 나도 잘 안다. 업사이클링이나 리사이클링에도 크고 작은 노고가 소요되며, 대뜸 채식을 시작하고자는 결정도 쉽지 않다. 분명 미니멀리즘이나 무소유 같은 키워드와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의식한 적도 있을 것이다. 날이 무더워지기 시작한만큼 "에어컨과 선풍기를 작동하는 데 사용되는 전력량이 이미 전 세계 전력 소비량의 10퍼센트를 차지"한단 논점을 꾸준히 상기시키기도 곤란하다. 실외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된 시점에서 '보복 소비'란 키워드는 애써 무시하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창한 계획이나 혁신적인 변화 외에 쉬이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시사점이 존재함은 희망적이다. "모든 종류의 인간 활동을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새롭게 뜯어고쳐야"하며, "새로운 대안을 도입할 때마다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기업체는 물론 이전 생활양식에 만족하던 소비자층의 현상 유지 편향과도 싸워야"하겠지만, 구매하지 않는 용기와 육식 없는 월요일을 지켜야 할 이유는 분명 실재한다.


물론 이 흐름이 지나치게 거대하고 예측이 어려워 감이 안 잡힐 수도 있다. "한 추산에 따르면 현재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는 속도는 지난 6,600만 년 중 어느 시점보다도 10배가량 빠르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기후변화가 느리게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불안할 만큼 빠르게 나아가며, 기후변화를 막아 줄 혁신이 빠르게 다가온다고 생각하지만 믿기 힘들 만큼 느리게 다가온다". 빌 맥키번은 천천히 거둔 성공은 실패나 다름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세계적인 규모로 재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문제는 말 그대로 해결 불능 상태가 된다. (중략) 우리가 2075년에 내리는 결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신소재가 개발되고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는 기업의 수가 증가했다 하더라도 어렸을 때 그렸던 희망찬 지구의 미래는 돈으로 살 수 없게 되었단 뜻이다.


한없이 포용력이 높은 것만 같은 자연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탄소 농도가 높아질수록 작물의 이파리는 두거워지는 경향"이 있고, "두꺼운 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능력이 떨어져", 결국 "21세기 말에는 매년 63억 9,000만 톤의 이산화탄소가 흡수되지 못한 채 공기 중에 추가로 남게된다"는 사실은 위안보다는 공포로 돌아온다.


더 자세하고 잔인하게 말해볼까.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 대신 짧게나마 동물의 고통에 공감"만 하던 감정이입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몇 십년 전, 열 살이었던 어린 소녀가 살던 지구의 건강 상태에 비해 지금의 상황은 훨씬, 훨씬 더 악화되었으며 절망적이란 건 이제 다들 알 것이다. 북극곰이 살 곳이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해양 생물 4분의 1을 지탱하고 있는 산호초 군락이 '대량 백화 사태'를 겪고 있다. 당장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화재가 기온을 상승시키고, "기온이 상승할수록 화재는 더 자주 발생"해 불타는 건 지구뿐만이 아닌 당장 우리들의 집이 되었다.


바다 근처에 살지 않기 때문에 지금 밟고 있는 그 땅은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을거라고? 불길에 휩싸인 산길이 먼 지방의 일 같다고? 이 모든 건 급격한 경제 속도로 두꺼운 스모그에 둘러싸인 중국 탓이라고? 특정 지대 혹은 단 한 국가가 얼마나 뒤쳐져있는가를 지적할 시간에 "2017년 캘리포니아 주에 기록적인 화재 철이 닥치자 샌프란시스코의 공기 질은 같은 날의 베이징의 공기 질보다 나빠졌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당장 세계 미세플라스틱 오염지역 순위권에 한국이 2~3위(인천-경기 해안, 낙동강 하구)에 올라있단 자료도 같이 보면 더 좋고.


절대 남의 얘기가 아니다. 이미 "지구온난화는 이전 어느때보다 강력하게 무차별적으로 날뛰기 시작"했으며,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 가지고 기후가 온화하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다.


"기온이 4도 증가한 세계에서 들끓는 자연재해를 그냥 '날씨'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면 마이너스 배출이나 화성으로의 이주 같은 "엄청난 속도의 기술적 탈출이 성공할거라는 기대" 또한 더더욱이 버리는 편이 낫다. 비록 지구 공기 중 "이산화탄소 수치가 높아질수록 영양소 전반이 감소"하며, "이산화탄소 농도가 930ppm(오늘날의 2배)에 이르면 인지 능력은 21퍼센트 떨어진다" 해도 표면에 물도 없고 식물도 없으며 여름의 적도조차 밤 기온이 영하 73도까지 떨어지는 화성에서 사는 것보다 지구의 황폐한 환경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생존 가능성이 높으니까. "우리 중 누구도 지구 외에는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기후라는 것이 원래 이렇다고 납득하거나, 현실적으로 예산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거나, 받아 마땅한 결과라며 기괴한 안락함을 느끼거나,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점차 줄여 나가거나, 아니면 그냥 현실을 보고도 모른 체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무감정 상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당장 바로 앞에 놓인 미래에만 타협하면서 그 뒤에 이어질 미래를 이전보다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긴다면 지구가 1도 뜨거워진 벼랑(현재)에 서서 "미래를 내다보면 2도 뜨거워진 지구는 악몽 같아 보일 것이며, 3도, 4도, 5도 뜨거워진 미래는 더욱더 그로테스크해 보일 것"이다.


"재난을 탓할 만한 장본인을 설정하지 않고는 인류가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들의 성찰과 발자국이 모여 큰 웅덩이를 만들어내길. 그리고 그것이 참호가 되어 훌륭한 방어책이 되길 바란다. 한 방에 지구 온난화를 뚝딱 고쳐내는 철없는 히어로는 될 수 없어도 지구의 훌륭한 조력자 정도는 누구나 충분히 될 수 있다.



  • 커스틴 브로디 (Dr. Kirsten Brodde). (2017, 03-09). 당신이 입은 미세섬유, 바다를 죽인다. GREENPEACE.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5449/blog-plastic-microfibres-harming-our-ocean/
  • 유지연. (2020, 06-07). 최소 131번 써야 비닐봉지보다 낫다···놀라운 '에코백의 역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95563
  • 박소희. (2018, 06-09). [박소희의 시니컬] 에코의 함정, 녹색 탈을 쓴 소비자본주의. 그린포스트코리아. http://www.greenpos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484
  • 박성은. (2017, 09-09). [디지털스토리] 옷 한벌 만드는데 고작 1주일…환경 파괴 부른다.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70908163300797
  •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2021, 04-22). 5년 차 환경운동가, 류준열 후원자의 용기있는 인터뷰. GREENPEACE.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17336/blog-ce-ryu-jun-yeol-interview-earthday/



지구온난화가 저기 외딴 북극에서나 펼쳐지는 이야기라느니, (...) - P15

대기 중에 배출된 탄소 중 절반 이상은 불과 지난 30년 사이에 배출됐다. - P17

어떤 결과가 초래될 지에 대한 논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협소해 거의 매번 해수면 상승 문제에만 한정돼 있었다. - P24

기후변화는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전 지구상에 동시에 일어나는 무언가인 셈이다. - P41

지구온난화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깊이 생각할 시간, 깊이 생각할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지구온난화를 논하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입장이다. - P52

개인적인 차원의 생활양식 조정은 전체적인 수치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며 오직 정치적 차원의 움직임으로 확장될 때만 의미가 있다. - P61

기후변화에 자기 자신이 책임과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이해하기보다는 순수한 희생양을 가지고 윤리적인 고민 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편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P64

주어진 도구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빈곤, 전염병, 여성 학대 같은 문제를 해결할 도구도 가지고 있다. - P76

기후변화를 완전히 부인하거나 반대로 완전히 체념하는 태도보다는 반쯤 무지하고 반쯤 무관심한 태도가 전염병처럼 널리 퍼져있다. - P91

GMO에 대한 문화적 반감이 이미 너무나 커져서 홀푸드마켓에서는 자사 브랜드 탄산수를 ‘GMO 무첨가 탄산수‘라고 광고할 지경이다. - P94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최악의 결과가 고작 몇 미터의 해수면 상승이라고 생각하자 바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P97

기온이 4도 증가한 세계에서는 지구환경 곳곳에서 수많은 자연재해가 들끓다 보니 사람들이 자연재해를 그냥 ‘날씨‘라고 부를 것이다. - P123

소비 행위가 한편으로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며 또 한편으로는 미덕을 과시할 수 있는 아주 현대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 P140

중국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세계의 중심 도시가 태양을 가릴 정도로 두꺼운 잿빛 안개 속에 뒤덮인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는 지구의 공기 상태를 걱정하지 않는다. 대신 한 나라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즉 중국이 선진국 가운데 삶의 질 면에서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를 지적했다. - P157

산업화를 통해 남반구의 수십 억 인구를 중산층으로 끌어올린 대신 치르게 될 대가는 바로 기후변화다. (...) 인류의 진보에서 비롯된 지구온난화가 우리를 다시 폭력으로 몰아넣으리라는 점이다. - P196

자원 전쟁은 보통 자원을 늘려 주지 않는다. 많은 경우 오히려 자원을 소멸시킨다. - P196

지구온난화가 이런 식으로 소비자 계층 개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물론 잘사는 사람들 사이에 피어오르는 묘한 금욕적 자부심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지나치게 좁은 시야로 바라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 P205

당신은 뜨거운 지구에 관해 ‘읽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 위를 ‘살아갈 것‘이다. - P209

대중문화의 한 가지 역할은 겉으로는 문제에 주의를 이끄는 듯해도 실제로는 늘 주의를 돌릴 만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 P219

기후재난에서는 수십억 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이 전 지역에 여러 세대에 걸쳐 분산된다. 물론 책임이 균등하게 분산된다는 뜻은 아니다. (...) 책임 분배가 소득이 불평등하게 분배된 양상과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에 (...) 시스템이 문제라고 말한다고 악당의 이름이 딱 떠오르지는 않는다. - P225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 대신 짧게나마 동물의 고통에 공감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동물에게 감정이입 하는 편이 이상할 만큼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 P229

기후처럼 실제로 우리를 둘러싼 자연적인 시스템보다 인터넷이나 경제 같은 인위적인 시스템을 더욱 견고한 존재라고 인식하거나 심지어 아예 건드릴 수조차 없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 P244

실리콘밸리 기술자가 슈퍼 인공지능을 상상할 때 떠올리는 것은 어떤 제한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본주의다. - P261

기후변화 대책으로 우주여행을 제안하는 사람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P265

25년에 걸쳐 전 세계 에너지 사용량 중 재생에너지 사용량 비율은 거의 조금도 증가하지 않았다. - P268

우리는 기후변화가 느리게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불안할 만큼 빠르게 나아간다. 기후변화를 막아 줄 혁신이 빠르게 다가온다고 생각하지만 믿기 힘들 만큼 느리게 다가온다. 우리가 얼마나 급한 상황인가를 고려한다면 특히 더 느려 보인다. (...) "우리가 세계적인 규모로 재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문제는 말 그대로 해결 불능 상태가 된다. … 우리가 2075년에 내리는 결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 P270

새로운 대안을 도입할 때마다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기업체는 물론 이전 생활양식에 만족하던 소비자층의 현상 유지 편향과도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 P272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말로만 하는 동정, 편리한 진영 논리, 윤리적 소비에 참여하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는 정치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신념 (...) - P281

개인이 식단을 바꾸는 정도로는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정책을 바꾼다면 가능하다. - P282

밀 경작 때문에 오늘날 ‘국가권력‘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출현했으며 결과적으로 관료주의, 억압, 불평등까지 뒤따라 나왔다. - P297

현대인으로 하여금 물질적 진보의 속도를 확신하게 했던 산업화와 경제적 성장의 역사는 잠깐을 넘어 찰나에 가깝다. 그 찰나 사이에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기후재난의 시대에 다다른 것이다. - P299

기후변화의 시대에는 우리 모두가 ‘산업혁명‘이라는 죄목으로 형을 살고 있는 죄수가 되며 역사는 일종의 교도소로 여겨진다. - P303

지구온난화에 의한 인류 문명의 몰락을 거의 필연적인 비극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거의 신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여섯 번째 대멸종이 순식간에 지구를 청소하고 나면 새로운 종이 생겨나고 새로운 생태적 지위가 형성되면서 오히려 ‘자연은 번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 P311

정치적 우울감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체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할 때 경험하는 감정을 뜻한다. 절망감과 무력감마저 사실은 항의의 절규인 셈이다. 그렇다. 정치적 우울감은 자신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든다. 그런 절망과 회의 속에는 중요한 깨달음이 하나 묻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내에서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인간성‘이라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 P322

우리는 기후라는 것이 원래 이렇다고 납득하거나, 현실적으로 예산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거나, 받아 마땅한 결과라며 기괴한 안락함을 느끼거나,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점차 줄여 나가거나, 아니면 그냥 현실을 보고도 모른 체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무감정 상태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 P324

지구온난화가 가르쳐 주는 교훈은 서로 모순적이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동일한 위기로부터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또한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동시에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이 문제를 초래했다면 되돌릴 수도 있어야 한다. - P331

당신은 당신이 보고 싶은 모습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살고 싶은 행성은 선택할 수 없다. - P3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