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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노래 문학.판 시 12
김정환 지음 / 열림원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김정환의 시는 술술 읽혀지지 않는다. 독특한 문장 표현 때문일까, 시심(詩心)이 옅어져서일까. 아니면 시대와의 정직한 호흡이 가빠서일까. 턱, 턱, 몇 번이고 막힌다. 그럼에도 그의 시를 나는 좋아한다.(그렇다고 그가 펴낸 시집 모두를 읽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나름 특별한 이유가 있다.

87년 최루가스로 눈물 콧물 범벅이가 되던 그 시절, 쾌쾌한 과룸 골방 책꽂이 한 귀퉁이에서 화사한 빛깔의 시집 한권을 발견했다. 주황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새겨진 『황색예수전』(실천문학사, 1983), 입시전쟁을 막 치러낸 내게 ‘황색’예수란 단어는 묘한 흥분을 주었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라는 부제를 읽었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접한 ‘민중시’가 바로 이 시집이었다. ‘탄생의 서’의 한 구절, “사랑을 위하여 당신의 생애를 택합니다.”를 수 십 번 되뇌이고 인용했던 기억이 어제 같다. 김정환 시와의 인연은 이토록 강렬했다.  

그리고 다시 2007년 10월. 그간 전방위 저술가로 부지런히 책을 냈던 김정환시인의 최근 시집 『레닌의 노래』(그래도 출간한 지 1년이나 됐다.)를 읽었다. 이번에도 붉은색 짙은 주황색 바탕의 표지. 다른 게 있다면 흰색 글씨로 제목이 새겨졌고, 어쩐지 정곡을 찌르는 듯 강직한 정직함을 글씨가 품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의 무게를 설익을 정도로 알만한 처지에 이르러, 나는 다시금 어제 같은 그 기억을 가슴 서늘한  ‘지금’으로 마주한다. 

이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혁명가 레닌을,(당시 화면으로 생중계되던 레닌 동상의 추락장면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정말 다들 웃기고들 있었다.) 왜 기억 저편 너머에서 불러냈을까? 그러다 돌연 나는, 시인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한다.

10월27일 전기원으로 일하던 정해진 노동자가 분신했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선위에서 하루 12~13시간을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주 44시간 노동(주 40시간도 아니다)과 작업안전이라는 요구는 얼마나 절박한가. 130 여일 넘게 싸우다가 감전으로 사지가 타들어가듯, 끝내 스스로 불꽃이 되었다. 또 다른 사투가 있었다. 10월31일 새벽 화물연대 노동자가 노동조합 활동보장 등을 요구하며 싸우다가 분신했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했던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전태일. 그는 노동을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이곳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 모두를 변화시켰다. 그가 죽은 것이 아니다.
사회의, 우리 안의 죽음을 그가 태워버린 것이다.
그의 삶으로 피비린 눈물과 찬란한 전망의 비극적인 관계가 극복되었다.
그의 불꽃으로 가장 촉촉한 눈물이 태어났다. 그의 죽음으로 가장 위대한
노동이 태어났다. 그의 사랑으로 가장 실천적인 지도력이 태어났다.
그의 귀환으로, 가장 아름다운 미래전망이 태어났다.
그의 삶과 죽음은, 생각할수록, 희망의 규모를 거대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그의 빈자리는 검고, 그의 자리는 빛난다.
전태일. 그의 이름은 희망이다. 2005년 10월1일.“

-「흉상글-전태일」-

수많은 죽음들이 있었다. 전태일, 그가 빗장을 활짝 열어젖힌 빛나는 전망을 위하여. 그리고 지금, 또 다른 전태일의 자리를 본다. “사회의, 우리 안의 죽음을 태워버리는” 자리이어야 할 죽음들을.

“따져보면
희망이 빛을 바랬던 적은 없다
희망은 역사 바로 그만큼
고전적으로 젊어져왔다
젊음의 고뇌와 역사의 고뇌가
중첩되는
시대를 우리는 지나왔다
그리고
시대는, 젊음은, 시대의 젊음은
그것으로 더욱 찬란하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정치가 우리들 봄날의 대지를 갈아엎는
아름다운 미래 전망이던 때가 있었다.

(중략)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모두를 진지하게 만들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중에서-

그랬다. 한 사람의 죽음이 역사의 전망을 여는 밑거름이 되던 시대가 있었다. 시인의 말대로, 그 죽음이 우리 모두를 진지하게 만들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한 죽음은 시간의 화석이 되어 버렸고, 뒤이은 숱한 죽음마저도 그저 개인의 사정으로 변질된다.

‘우리의 심장은 혁명의 건전지’라고 믿었던 젊음, 시대의 젊음은, 기억 저편의 일이었나? 레닌의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시인처럼, 내 입술에서 부지불식간에 흘러나온다.

“지워지는 것은 짓밟히는 것 

  (중략)

지워지는, 짓밟히는, 메마른
풍경과 질문 위로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액화,
인간의 조직이 일순 너무나 아름다웠던

시절은 화음의 광채로만 남아
생애가 차라리 슬프다는 풍문에 달한다

(중략)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 질문은 결코 메마르지 않는다“ 

 -「레닌의 노래」중-   

한 죽음이 이 땅의 진보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는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짓밟는 것’이다. 현실은 “세상을 건너는 고만고만한 비만의 다리가 되었”고, “생계와 화해한 만큼만/가난하고 안온”하지만, 비록 “화음의 광채로만 남”았을지라도 “인간의 조직이 일순 너무나 아름다웠던 시절”을 기억하자고, 그것이 우리가 멀쩡해지는 시간이며, 삶의 폭압을 감당하는 시간이며, 미래의 전망을 밝히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지금, 또 다른 전태일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촉촉한 눈물을 뿌리며 묻는다. 이대로 그 죽음을 시시하게 청산할 수 없다. 인간의 조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고 싶다.   

당신의 죽음이 이 땅 진보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고이 잠드소서.   2007. 11. 5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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