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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캐비닛 ㅣ 문학동네 소설상 12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공기업의 부속 연구소에서 일하는 '나'는 할 일이 없다. '개껌이라도 질근질근 씹어먹고 싶은 처절한 무료함'을 가진 나는 일종의 행정직을 맡고 있지만, 하는 일이라곤 고작 연구소에 필요한 물건을 싣고 온 트럭에서 물건을 꺼내 서류상의 갯수와 맞는지를 확인하고 도장을 찍은 뒤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하면 끝나는 단순한 일이다. 오전 업무가 아니라 하루의 업무가 그걸로 끝이다. 4대 보험에 나름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회사이건만 나는 그저 화분처럼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하릴 없이 앉아 있다 쫓겨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 걱정, 긴장감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며 이런 저런 취미생활을 하던 중 '13호 캐비닛'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는게 시간인지라 비밀번호 열쇠의 0000부터 맞춰나가기 시작한 나는 칠천팔백예순세 번 만에 자물쇠를 열었다. 그 안에는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 입안에 도마뱀을 키우는 사람, 매우 긴 잠을 자는 사람 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괴이한 현상들을 몸소 체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서류가 모아져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그 사람들을 연구하는 권박사의 조수가 되어 그들의 전화를 받으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나는 토포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나는 잠자는 걸 좋아하고 또 잠이 들면 깨어나기를 싫어하니까. 사실 나는 그저 토포의 늪에 한 번쯤 풍덩 빠져보고 싶다. 회사만 안 잘리고, 월급만 제대로 나오고, 보험금이나 적금통장에 '빵꾸'만 안 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인생을 왜 그딴 식으로 사냐'라는 식의 잔소리만 안 듣는다면, 모든 것을 잊고 그저 한 육 개월쯤 푹 자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토포러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들에 계속 신경을 쓰기 때문에 토포 상태에 빠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토포에 빠지려면 왕창 망가져서 모든 게 폐허가 되거나, 아니면 나는 모르겠으니 배 째라 이렇게 배짱 좋게 무책임해지거나, 둘 중에 하나는 돼야 하죠. 이것저것 걱정하고 그러면 절대 안 돼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폐허를 가질 용기도, 무책임을 가질 용기도 없어서 우리는 항상 피곤하고 지쳐 있는데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 p.78
한참 4당5락이라는 말이 있었다. 네시간을 자면 붙고 5시간을 자면 떨어진다고. 산업이 발달하고 잠들지 않는 도시가 계속되면서 현대의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니다. 밤이고 낮이고 돌아가는 세상. 남들보다 덜 자고, 저 많이 움직여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푹 잔다는 것을 두고 '세상 모르고 잔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잠이나 쿨쿨 자고 있는 사람이라면 현대 자본주의의 선봉에 설 자격이 없다는 뜻도 될지 모른다. 지긋지긋한 집을 나가겠다면서 빨래 해 놓고, 학교에서 돌아 올 아이를 위해 간식을 준비해 놓고, 청소 해 놓는 여자는 집을 못 나간다고 한다. 몇 일이고 몇 달이고 깊은 잠에 빠져 세상을 버릴 수 있는 토포러가 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우린 전부는 커녕 단 한 시간도 버릴 용기가 없다.
"혹시 타임머신 같은 게 발명된다면 당신이 삭제한 1998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돌아가고 싶어요. 솔직히 1998년에서 기억나는 거라고는 홍당무밖에 없지만."
"무섭지 않나요?"
"무서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절은 없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않을 거에요. 우리는 행복한 기억으로 살죠. 하지만 우리는 불행한 기억으로도 살아요. 상실과 폐허의 힘으로 말입니다." -p.107
우리들의 기억은 믿을만한 게 못 된다. 가끔 아주 오랜 기억들은 조금씩 윤색된다. 어딘가는 조금 더 아름답게 꾸며지기도 하고 어딘가는 삭제되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지는 것이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고치는 사람들을 메모리자이커라고 부른다. 너무나 불행했던 기억이라서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진 과거를 그들은 또 찾고 싶어 애쓴다. 우리가 꼭 아름다운 기억만을 먹으며 살아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영원히 마법사를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법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꿈꾸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마법은 너무도 흔하다. 따라서 마법사도 흔하다. -p.141
피터팬이 웬디와 함께 팅커벨을 만났을 때였던가. 사람들이 요정을 밎는 마음이 있어야 요정을 되살릴 수 있다고. 아는 만큼 보이고, 믿는 대로 보인다고 했다. 사실 의심병에 걸려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들이지만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한다고 말들 하지만, 어디 신은 본 적이 있어서 믿는가?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을 것이고, 그 외에도 온갖 미신까지 합한다면 본 적이 없어서 믿지 못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눈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p.182
우리는 매 시간을 낭비없이 살겠다고 하는 일이 계획을 세우는 일이다.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며 일찍 일어나 출근하기 전에 운동을 하고, 균형잡힌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해서 회사에서 또 열심히 일을 한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성공해보겠다고, 남들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고 아둥바둥 살다보면 우리가 시간을 아껴 쓰는 만큼 잃어버리게 되는 것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돌연변이, 혹은 사회 부적응자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캐비닛 13호. 어쩌면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무한경쟁의 사회 속에서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조각들이 그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착한 아이가 되고, 돈 잘 버는 남자가 착한 남자가 되고, 쭉쭉빵빵 8등신 몸매를 가진 여자가 착한 여자가 되어버린 세상. 공부 잘하는 반장과 공부 못하는 말썽꾸러기가 싸우면 반장 말이 진실이 되기도 하는 이상한 세상. 우리가 더 이상하게 돌아가기도 한다는 걸 모르고 캐비닛 13호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이상하다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