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대 1 - 봄.여름
로버트 매캐먼 지음, 김지현 옮김 / 검은숲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늘 책을 읽고, 정말 어지간해서는 읽기 시작한 책을 중간에 덮는 일은 없는 편이다. 도저히 몰입이 되지 않아서 중간에 놓은 책도 몇 권쯤 있긴 하지만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고, 그것이 소설인 경우에는 아무리 재미가 없어도, 몰입도가 떨어져도 끝을 보는 편이다. 그렇기에 아주 재미가 있다, 나를 사로잡았다는 것은 얼마나 늦게까지 다음 날을 걱정하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고 한 장만 더, 한 장만 더를 마음 속으로 외치다 결국은 끝을 보는 책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랫만에, 그런 책을 만났다. 바로 이 책, 소년시대!

 

<소년시대>는 정말 갑작스럽게 나에게 왔다. 보름도 훨씬 전에 서평단에 응모를 했고, 잊고 있었다. 서평단에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받지 못했던 터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가보니 책상 위에 곱게 놓인 책, <소년시대>였다. 밀려있는 책들이 워낙 많아서 바로 읽을 책도 아니었는데 받은 그 날 저녁에 앞부분이나 잠깐 볼까~ 하는 마음으로 손에 든 책을 2권 중반까지 읽고 말았다. 아~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라면서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우리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본질에서 멀어진다.. 누구나 다 그렇다. 어깨에 짐을 지게 된다. 좋은 짐도, 안 좋은 짐도. 여러 가지 일이 우리에게 닥쳐온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다.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불구가 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길을 잃는다. 이 괴상한 미로 같은 세상에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삶 자체부터가 우리에게서 마법의 추억을 빼앗아 가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렇게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드는데 정확히 뭘 잃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는 때가 온다. 마치 예쁜 여자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여자가 당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상황하고 비슷하다고 할까. 그냥 어쩌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p.19

 

이 작품을 딱 꼬집어 성장소설이다, 라고 규정짓고 싶지는 않다. 달력의 날짜야 어떻든 여름의 시작은 방학이라고 믿고 있는 12살 소년 코리. 백여섯 살이나 된 흑인 여왕이 있고, 오케이 목장에서 아이어트 어프의 목숨을 구해준 총잡이도 있으며 강에는 괴물이 살고 있고, 호수에는 비밀이 도사렸다. 보닛에 불꽃이 타오르는 까만 경주용 자동차를 몰고 도로에 출몰하는 유령이 있고, 한물 간 축제에 트럭에 타고 오는 트리케라톱스가 있는 마법의 땅 제퍼에 사는 소년 코리. 그 소년의 봄과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통해 마법이 살아 숨쉬는 기억을 다시 꿈꾸게 하는 멋진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단순이 마법의 힘을 잃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소년이 가졌던 '진실'이라는 것에 눈감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

 

1964년 미국남부의 작은 도시. 아직도 백인과 흑인은 한 데 섞여 있지 못하고, 보안관이 있고, 밀주를 담그고, 작은 마을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가족과 같은 제퍼. 우유를 배달하는 아빠와 소설가가 되고 싶은 소년 코리는 이른 새벽 함께 우유를 배달하던 길에서 괴물이 살고 있다는 깊고 깊은 강물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자동차를 보게 된다. 아빠는 운전석의 남자를 구하려고 차디 찬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몹시 심하게 얻어 맞아 엉망이 된 얼굴, 핸들에 묶인 두 손, 발가벗겨지고 목이 졸린 채 죽어 있는 어깨에 문신을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차는 그대로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 죽은 그 남자의 신원을 밝히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간다. 코리의 아빠는 그 날 이후 죽은 남자의 꿈에 시달리며 야위어 가고, 코리는 사건 현장에 주운 초록색 깃털과 실제였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를 자기를 쳐다봤던 어떤 한 사람의 눈빛을 근거로 제퍼시 안에 살인자가 있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는 코리의 일상, 코리의 가족이야기, 코리와 친구들의 이야기, 1960년대를 살아가는 제퍼시 사람들의 이야기, 흑인과 백인의 이야기, 종국에는 어깨에 문신을 한 채 괴물이 사는 강물로 빠져버린 한 남자의 범인이야기까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어떤 작품은 참으로 낯익어서 반갑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참으로 낯설어서 참신하고도 새롭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반면 또 어떤 작품은 너무나 낯익어서 지루하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너무나 낯설어서 어색하기도 하다. 이 작품은 낯익으면서도 낯설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성장소설의 뼈대에 살인범을 찾는 미스터리의 형태도 곁들였고, 어떤 부분은 초자연현상이나 판타지적 요소도 있다. 그래서 낯익지만 그런 낯익음을 지루하고 뻔하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낯설다. 우리가 관용어구처럼 쓰는 그런 흔한 표현이 아닌 로버트 매캐먼만이 할 수 있는 그런 표현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자연이 우리의 통제를 멋어나면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이 땅을 다스리라고 내려주었고 우리가 이 영토의 주인이라는 믿음에 익숙해져 있다. 밤에 취침등을 켜놓고 자듯이 그런 환상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 그러나 진실은 훨씬 무섭다. 토네이도가 불어오면 우리는 어린 나무처럼 연약햊고, 소중한 집도 홍수 한 번이면 나무토막처럼 쓸려 내려가고 만다. 흔들리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 산이 솟았다 꺼지고 선사 시대의 바다들이 안개로 증발한 곳에 살고 있다. 우리의 몸도 우리가 지은 마을도 영원하지 않다. 애초에 지구 자체도 지나가는 기차일 뿐이니까. -p.158

 

인간의 오만함. 내 마음대로 내 몸을 혹은 자연을 쓸 수 있을거라는 헛된 자신감과 믿음을 꼬집어 내는 문구조차도 멋지고 또 멋지다. 선사시대의 바다들이 안개로 증발한 곳이라니. 지구가 지나가는 기차라니 말이다.

 

“아이들은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 그러다가 정말로 어른이 되면 다시 아이가 되고 싶어 해. 하지만 코리, 선생님이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 듣고 싶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 거란다.”
선생님이 속삭였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비밀이라니 무슨 뜻이지? 우리 엄마 아빠는 어른이잖아. 달러 할아버지, 마셰트 대장님, 패리시 의사 선생님, 로보이 목사님, 귀부인, 그 외에도 열여덟 살이 넘은 사람은 다 어른인데?
“어른처럼 보이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건 가면이야. 그냥 시간의 흙이 덧씌워진 것뿐이야. 그 사람들도 아직 마음 깊은 데서는 아직 어린아이란다. 뛰고 구르고 놀고 싶어 하지만, 덮어쓴 흙이 너무 무거워서 그러지 못하는 거야. 세상이 몸에 감아놓은 모든 사슬을 떨쳐버리고 싶어 하지. 시계며 목걸이며 구두를 벗어던지고, 단 하루라도 벌거벗은 채 강물에서 멱 감고 놀아봤으면 하지. 마음 편하게 있고 싶어 해. 집에 가면 이것저것 다 챙겨주시고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사랑해주는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얼굴 뒤에는 겁에 질린 작은 아이가 있게 마련이란다. 다치지 않으려고 한없이 구석에 틀어박히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p361~362

 

귀머거리로 장님으로 삶을 살아가기란 아주 쉽고, 앞으로 소년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선생님은 말한다. 놀라운 것들로 가득한 퍼레이드 사이를 지나가면서도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보고 지나쳐 버리는 삶.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삶을 천 번이라고 살면서 결코 가보지 못할 나라에서 결코 만나보지 못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해준다. 이 대목에서 문득 <눈먼자들의 도시>를 떠올렸다. 나에게 해가 된다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 그렇게 살아가는 '어른'들. 다들 눈을 뜨고 말을 하고, 귀로 듣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다들 눈이 멀어버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12살 소년 코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을 풀어내면서도 중심을 놓지 않았기에 끝까지 읽고서야 손을 떼게 만든 멋진 책이었다. 유머 넘치는 문장들, 순간순간 감정에 북받혀 눈물을 흘리게도 만드는 힘. 900여 페이지를 읽는 동안 웃다, 울다를 반복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돌아가봤으면 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12살 시절을 회상하게 만들었고, 마법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어른이라는 것이 슬퍼지기도 했다. 그리고 내년이면 12살이 될 내 아이가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자신이 가진 마법의 힘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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