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틀 슬립
폴 트렘블레이 지음, 이소은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 소설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텼다고 하는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고전 레이먼드 챈들러의 <<박 슬립>>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하는 이 작품, <<리틀 슬립>>은 시작부터 뭔가 다르다. 짧게 툭툭 내던지듯 서술하는 문구,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대화전개. 마치 5~60년대 고전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미국식 사립탐정의 원형을 만들었다는 <<빅 슬립>>의 고독한 탐정 '필립 말로'를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리틀 슬립>>의 탐정 마크 제네비티도 중절모에 트렌치코트의 깃을 올려세우고 담배를 물긴 했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뭔가 날카롭게 사건의 현장을 꿰뚫어보는 그런 느낌의 탐정은 아니다. 사고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려 텁수룩하게 수염을 길렀으며 한쪽눈은 항상 윙크를 하는 것처럼 찡그리고 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끝없이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 신세를 지며 살고 있다. 게다가 그에게는 탐정으로서는 최악의 조건이 있었으니 바로 '기면증'이라고 하는 희귀병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항상 최악의 순간은 정신이 들고 난 바로 다음이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따위의 질문을 비웃고는 싶은데, 나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도 모른다. 제니퍼 타임스는 사라졌고, 내 머릿속은 암흑으로 가득 차 있다. -p.15
지방 검사의 딸이 자신의 손가락이 없어졌다며 자신의 손가락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고 사라졌다. 마크는 제니퍼의 사건을 수사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다시 만난 제니퍼의 손에는 거짓말처럼 손가락이 모두 붙어 있다. 이제 마크는 자신이 맡은 사건이 과연 꿈이었던 건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건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보통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은 같은 조건을 두고 추리를 하는 탐정과 독자가 함께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탐정은 항상 답을 찾아내지만 독자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탐정의 사건수사를 좇아가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탐정은 자신이 겪은 일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사건은 사건대로 꼬여있고, 자신의 상황도 제대로 꼬여 있다. 어느 순간 실컷 두들겨 맞고 택시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누구한테 맞은 건지, 혹은 넘어져서 다친 건지도 구분하지 못한다. 심지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온몸이 마비되어 꼼짝못하고 누워 있는 발작을 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건의 진실을 향해, 그리고 자신이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간다.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커피를 들이 붓거나, 바닥에 머리를 짓찧어가면서까지 사건에 몰입하는 그는 수도없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서도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마음을 굽히지 않는다.
독자조차도 금방 마크에게 일어났던 일이 마크의 꿈이었던가, 현실이었던가 착각할만큼 현실과 꿈 사이를 교묘히 오고가며 사건의 본질을 향해 달려간다. 마크 제네비치라는 탐정이 '기면증'이라는 병에 걸려 간혹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아마도 우리네 인간들이 마크처럼 희귀병을 앓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 특히나 범죄에 관련되었거나 양심에 가책을 느낄만한 일들은 애써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리고 사는게 아닐까 하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싶다.
항상 피곤하고 수시로 졸음을 참지 못해 어디선가 잠들어 버리는 몽롱한 상태의 마크 제네비치의 사건해결은 의욕넘치고 스펙터클한 분위기는 아니다. 읽는 사람까지도 몽롱하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결하고 깔끔한 문장들은 쉽게 술술 읽힌다. 하나의 사건만을 풀어내는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라, 탐정 자신의 꿈과 현실을 구분해 내야만하는 이중 자물쇠는 푸는 그런 느낌의 추리소설, 아주 기발하고 독창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