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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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좋아하는 나는 제목을 보자 마자 그냥 마음에 들었다. 우리집 다른 식구들도 다들 한마디씩 했다. 우리집 얘긴가, 하면서 말이다. 소설집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첫 단편이자 표제인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을 보면서 계속 키득거렸다. 너무 발상이 신선해서 길지 않은 단편 모두를 전부 옮겨 적을 뻔 했을 정도다. 도대체 작가는 뭐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시선이 참신한거지? 하고 궁금해져서 곽재식이라는 작가를 검색해봤다. 화학자이고, 소설가이고 현재는 환경공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라고 한다. 이 정도는 아주 짧은 경력이고 더 자세하게 들어가서 곽재식이라는 사람의 경력으로 책을 쓴다고 한다면 제목은 아마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깊은 지식> 정도가 되지 않을까? 외국어 고등학교 시절에는 중국어를 전공했으면서 카이스트에 들어갔고, 이론화학을 전공하면서 교내 문학상을 두번이나 받았다. 화학자, 환경공학자는 본업이고 작가는 부업에 가깝다고 하는데도 부업이라고 하기엔 출간한 책도 워낙 많고 이 책을 읽어보니 가독성도 좋다. 이렇게 다 가진 사람, 부럽다.

그의 신선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장들을 가져와 봤다.

특히 이 행성에 사는 미생물인 '사람'이라는 생물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고 해야 할 정도다. 태양 제3 행성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류 생물은 식물과 세균이다. 사람은 그 식물과 세균에 기생해서 살아가고 있는 미생물의 일종이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中 9쪽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기 위한 무기를 갖추는 데 소모하는 비용은 대단히 막대하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 어떤 다른 종류의 생명체를 파괴하거나 분해하기 위한 장비보다도, 같은 사람들을 파괴하고 분해하기 위한 장비를 갖추는 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외로움을 많이 타고 무척 연약한 생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더 기괴한 습성이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中 14쪽

대체로 사람이라는 생물은 작은 이익을 두고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투는가 하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이제 그 사람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중략)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산소와 에너지를 담고 있는 몸속의 붉은 액체를 가끔 그저 별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때도 있다. 신비하지 않은가?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中 17~18쪽

<슈퍼 사이버 펑크 120분>이라는 단편에서는 2시간 안에 정보 이용 세금 정산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김박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회사 공용전화에 가장 먼저 반응한 죄로 그 세금 보고서를 내야 하는 담당자로 인식이 되고, 법령을 위반한 죄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120분 동안 각종 서류를 출력하고, 사이트에 가입하고 하는 등의 일들을 해내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이 단편을 읽자마자 떠오른 한 영상이 있다. 처음 봤을 때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았는데 아마 이 영상 속의 아저씨가 김박사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단>이라는 단편은 한 사람의 말이다. 이제 막 출근한 김대리가 과장으로부터 듣게 되는 잔소리의 처음과 끝이 한편의 작품이 되어버렸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라고 시작하는 말은 그 말을 하려는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안했으면 좋겠다. 안 하려고 한 말을 왜 하는 건지, 도대체!!!! 과장은 김대리의 인사를 받은 뒤 열쪽에 해당하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구구절절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읽는 사람조차 진절머리가 난다. 자기는 하고 싶은 말 다 한 다음에, 없었던 일로 치자고 하면 없었던 일이 되나? 어쩜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을까 싶어서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웃기기도 하다.

내가 너무 유치한 이야기라서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딱 까놓고 이야기 해서 내가 김대리보다도 나이도 세 살이 많고, 경력도 4년이 길고, 회사에서는 그래도 회삿밥 몇 그릇 더 먹은 과장이라는 직함도 달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무슨 상급자라고 갑질을 하려거나 그러는 게 아니고, 그냥 내 기분을 입장 바꿔서 순수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판단> 中 137쪽

아침부터 나한테 이런 말 들으니까 짜증 나고 듣기 싫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서 내가 길게는 말 안 하는데, 그냥 사회 생활, 아니 그냥 사람으로 사는 삶에서 가장 기초를 이야기하는 거니까, 한번 생각해보라고.

<판단> 中 141쪽

그래, 김 대리. 이게 무슨 크게 일을 키워서 막 사람을 면박 주고 그래야 될 일은 아닌 것 같고. 오늘 일은 그냥 없었던 셈 치자고. (중략) 나도 그냥 김 대리가 한 그 행동이 도애체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는 안 가. 그렇지만, 뭔가 그 순간만의 이유가 있어서 본의와는 다르게 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일게. 지금 이 시간부터 다 잊을 거야. 그러니 너무 깊게 마음에 담아둘 일이라고 생각하진 말고. 그래. 가서 일하자.

<판단> 中 144쪽

곽재식 작가의 소설집은 신선한 SF였다가 우리 주변의 일상이었다가, 또 어느 순간엔 과학이었다가 스릴러의 느낌을 주기도 하는 상당히 재미있는 소설집이었다. 어느 하나의 주제나 장르만을 고집하지 않아서 참신했다. 혹시 언젠가 작가의 자리에 '곽재식'이라는 이름이 씌여 있다면 아마도 단숨에 집어들어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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