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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평점 :
가족 소설이라는 설명을 붙인 걸 보고는 이기호 작가의 실제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사실적이라 이게 그럼 소설이라는 이야기인가 소설을 가장한 에세이인가 잠시 아리송했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배우 박정민의 책 <쓸 만한 인간>을 읽고, 바로 이 책을 읽었는데 서평을 쓰려고 생각하니 확실해진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꼰대라는 거였다. 막 30대가 된 배우가 자신이 지나 온 20대를 이야기하는 책이나 이제 막 초등학생, 유치원생의 아이를 두고 종종걸음을 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보면 솔직히 아무 감흥이 없다. 나는 20대를 이미 지나왔으니까, 똑같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렇게 지나친 20대를 밑거름으로 30대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보자고 배우 박정민과 감정을 공유할 수 없으니까. 내 아이는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까, 내 아이는 항해사 아빠와 일하는 엄마 덕분에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고, 학원에 보내지 않는 엄마 덕분에 맨날 집에서 놀았고, 그러다 사회시험에서 76점을 맞고 엄마한테 혼난 적이 있으니까. 나도 엄마가 처음이어서 병원에 갈 때마다 우리 아기가 너무 자주 아픈 것 아니냐고, 무슨 큰 병에 걸린 건 아니냐고 불안해 한 적이 있지만 그건 벌써 20년 전 이야기니까. 그래서 아무 감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걸 돈 주고 사서 봐야 하나, 싶기까지 한 걸 보면 꼰대가 분명한 것 같다.
혹시 지금 막 전투적으로 육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게 다 내 이야기 같고, 우리집 이야기 같을테니까. 막내 재우느라 방으로 먼저 들어간 아내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큰애를 붙잡아다가 재울 준비를 하고 나면 막내와 함께 잠들어 버린 아내를 보는 일, 그렇게 큰애를 재우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와 혼자 멀뚱하니 앉아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부부는 각방 신세. 아직 어린 아이들이 침대에서 떨어질까봐 멀쩡한 침대 놔두고 전부 침대 아래 좁은 공간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자는 풍경이 우리집인 것만 같아서 낯익을 것이다. 게다가 에세이처럼 짧게 짧게 가족의 이야기를 끊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라 쉽게 쉽게 읽히고, 그 사이사이 웃음 포인트들이 들어 있어서 웃다보면 후루룩 한권이 금세 끝나는 책인데 어째 나는 두고두고 찝찝하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그런데 꼰대지만) 남성작가가 쓴 이야기라서 그런지 어딘가 교묘하게 가부장적인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인데 죽자고 덤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몇몇 포인트들이 좀 거슬렸다. 그야말로 딱 몇 개의 포인트이다. 전체적으로는 가정적이고 이해심 많고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와 그의 가족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책 속의 남편인 '나'는 가정적이다. 아내의 마음을 보살피려고 노력하고, 애쓴다는 느낌이 든다. 아내에게 아내만의 시간을 주려고 주말이면 셋이나 되는 아이를 혼자 보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내가 막내를 씻기는 동안 자신은 첫째와 둘째의 잠자리를 봐주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또 동시에 어머니가 집으로 오시는 장면에서 우등고속을 타지 않은 사실이 몹시 애가 타고 부모님의 병원비를 위해 대출을 알아보는 효자이기도 하다. 당연하다. 나도 내 엄마가 우리집에 올 때 우등고속을 타고 왔으면 좋겠고, 부모님이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하면 금전적 도움을 드리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타이밍에 나는 며느리여서 그런지 미리 연락없이 오신 시어머니에 뜨악했고, 병원비 때문에 아내와 상의없이 대출을 알아본 것이 뜨악했고, 그 와중에 아내가 한푼 두푼(진짜 1,2,3만원이라고 찍힌 푼돈!) 모아 만들어 놓은 통장을 받아들고 감동하는 장면을 넣었다는 것에 뜨악했다. 모르겠다, 나라는 여자가 못된 사람인지 어쩐지 그냥 웃어지지가 않았다. 이게 그냥 소설이라면 그래서 남편이 부모님의 병원비라는 과제를 두고 아내에게 감동하는 순간을 만들고 싶어서 만들어 낸 순전한 허구라면 그 감동의 순간을 위해 이런 장치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너무 작위적이고 남성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정말 반찬값을 아껴서 만원, 2만원씩 통장에 넣었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남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을 결국은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남편의 부모님을 위해서 척, 하고 내놓는게 세상 멋진 일이고 감동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는게 웃겼다. 두살 터울의 아이들을 모유수유 하면서 남편 끼니를 챙기겠다고 매번 새밥을 하는 아내를 추켜세우는 장면까지 더하고 보면 여자란, 혹은 현모양처란 이래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