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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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어쩌면 유일한 버킷리스트는 바로 북카페를 내는 일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섬에다가 서점을 내고 싶어졌다. 사실 섬은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출판사 영업사원인 어밀리아가 앨리스섬에 있는 '아일랜드 서점'으로 카탈로그를 들고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것이지만 책의 시작은 누군가에게 어떤 책을 소개하는 것이다. 책소개가 중간중간 등장하는데 세번째 책이 등장했을 때 그만 울고 말았다.

아일랜드 서점의 주인인 에이제이와 어밀리아의 첫만남은 좋지 않았다. 아일랜드 서점을 맡았던 하비가 죽고 처음으로 방문한 어밀리아는 들아가자마자 서점에 쌓아 둔 책탑을 무너뜨렸고, 괴팍한데다 책에 대한 자기만의 확실한 고집이 있었던 에이제이와에게 어밀리아가 내민 책의 리스트는 전부 맘에 들지 않았다. 사실 섬의 유일한 서점인 아일랜드 서점은 에이제이가 만든 것도 아니었다. 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아내 니콜이 문을 열었고, 그래서 에이제이도 함께 했었지만 니콜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이제 니콜을 그리워하며 혼자 남은 에이제이는 장사에 크게 관심도 없다. 게다가 상당히 편협한 책에 대한 고집 때문에 서점의 매출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에이제이는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에드거 앨런 포의 시집 초판본을 소중히 간직하며 언젠가 정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경매에 붙여 그 돈으로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술에 취해 정신없던 밤 그 책은 사라지고, 그 책 대신 두살짜리 마야가 서점으로 뚝 떨어졌다.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는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정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백 쪽이 넘거나 백오십 쪽이 안 되는 책도 일단 싫어요. TV리얼리티쇼 스타의 대필소 소설과 연예인 사진집, 운동선수의 회고록,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소설, 반짝 아이템, 그리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뱀파이어물이라면 구역질이 납니다. 데뷔작과 칙릿, 시집, 번역본도 거의 들여놓지 않아요. 시리즈물을 들이는 것도 내키진 않지만 그건 내 주머니 사정상 어절 수 없고. 당신 편의를 봐서 말하는데, '빅히트 예정 시리즈' 같은 건 그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안착하기 전까지는 나한테 말도 꺼내지 마쇼. 그리고 로먼 씨, 난 무엇보다 말이죠, 별볼일없는 노인들이 별볼일없는 자기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고 끼적거린 얄팍한 회상록들은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군요.

<섬에 있는 서점> p.25

까다롭고 괴팍한 남자였지만 그는 얼마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홀로 남겨진 것일 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마야를 서점에 두고 간 마야의 엄마는 자신은 비록 아이를 버리지만 아이가 책과 가까이하며 자라길 바랐고, 그래서 서점에 남겨둔다는 쪽지를 남긴 채 섬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싫어하는게 그렇게도 많은 에이제이는 갑작스럽게 두살배기 여자아이의 임시위탁가정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입양까지 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초판본에 대한 관심으로 한번, 그리고 마야의 등장으로 또 한번 아일랜드 서점은 앨리스섬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애초에 니콜을 잃었을 때 섬사람들은 니콜에 대한 슬픔으로 오히려 서점에 드나들기를 주저했지만 이 일련의 두 사건으로는 오히려 서점으로 오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졌다. 우선 경찰인 램비에이스가 드나들었고, 서점에 두고 온 선글라스조차도 맡아두지 않을 정도로 까칠했던 에이제이가 마야를 방치할까봐 앨리스 섬의 엄마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엄마들은 마야를 위해서 책과 구글에서는 배울 수 없는 종류의 지식들을 베풀었고, 그렇게 들러서는 책과 잡지들도 구매하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어떤 일, 그러니까 자기들에게는 벌어지지 않는(혹은 벌어졌어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그런 종류의 일이 벌어지면 마음에 들어했다. 여주인공을 재고 자르고 판단하는 데서 재미를 찾았다. 자식을 버리는 여자는 도를 넘은 거지만, 남편이 끔찍한 사고를 당하면 대체로 환영이다(남자가 죽고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금상첨화다).

<섬에 있는 서점> p.91

에이제이는 돈이 될만한 책이었던 초판본을 잃어버렸지만 세상으로의 무관심, 자기안으로만 굳어져가는 생각을 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마야를 만났다. 그의 곁에는 죽은 동생 대신 가끔 그를 돌봐주던 처형 이즈메이가 있었고, 경찰인 램비에이스가 있었고, 그리고 4년 동안 출판사의 영업사원이었던 어밀리아가 있었고, 그리고 마야가 커나가고 있었다. 작품의 맨 첫장 그가 소개하는 책이 바로 그 마야에게 소개하는 책들임을 알게 되었고, 그 소개말 안에 들어 있던 단어들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에 감동받았다. 그 감동과 작가의 유머감각 덕분에 깔깔깔 웃으며, 살짝 눈물지으며 술술 넘어가던 중에 우리는 또 한번 인생의 시련을 만나듯 에이제이의 시련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분위기에 걸맞게 신파는 아니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했고, 그녀는 그의 환자복 가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힘주어 잡았다. "난 당신이랑 섹스하는게 좋아." 그녀가 말했다. "수술이 끝나고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그래도 당신이랑 섹스해도 돼?" 그녀가 물었다.

"물론이지." 에이제이가 말했다.

"날 경멸하지는 않을 거지?"

"안 해."

<섬에 있는 서점> p.294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 인생은 이 책들 안에 있어, 이 책들을 읽으면 내 마음을 알 거야.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가 다 완벽한 단편집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만큼 읽었다. 성공작이 있으면 실패작도 있다. 운이 좋으면 뛰어난 작품도 하나쯤 있겠지. 결국 사람들은 그 뛰어난 것들만 겨우 기억할 뿐이고, 그 기억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섬에 있는 서점> p.301

누구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서점에 혼자 남겨진 남자는 자꾸만 혼자만의 동굴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를 세상밖으로 꺼내 준 것은 다른 종류의 사랑과 사람들이었다. 매일매일이 단편소설인 것처럼, 어떤 단편은 아무 의미도 존재감도 없이 지나가고 또 어떤 단편은 슬픈 이야기일 수도, 또 어떤 단편은 기쁜 이야기일 수도, 대단히 기억에 남을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단편집이 된다. 한편의 따뜻한 소설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에이제이가 추천하는, 어밀리아가 이야기하는, 경찰이 나오는 소설을 좋아하는 경찰 램비에이스가 만든 북클럽 사람들이 읽는 소설들이 잔뜩 나오는 한권의 두툼한 책카탈로그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사랑하는 작가와 책이름이 나오는 것이 반갑고 잘 모르고 처음 들어보는 작가와 책들을 알아가는 것이 즐거운 그런 소설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딘가 작은 섬에 있는 작은 서점에 가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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