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변화를 이끄는 방법
해 가 갈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어떤 일이든 시간을 투입할 수록 가정 생활이든 직장 생활이든 요령이 생겨 낯설음이 없어지고 적은 시간으로도 더욱 효율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그런데 유독 변화만은 그렇지 않다. 가정 생활은 내가 주체이니 익숙한게 좋다는 식으로 변화를 거부하면 되지만, 직장 생활은 내가 객체이니 거부할 수도 없고 시간이 갈수록 적응도 어려워진다.
'변화에 대해 뭐라고 강변할까, 설마 변화해야 생존할 수 있다라는 식의 뻔한 얘기는 아니겠지'라고 주절 주절거리면서 펼쳐 든 책의 첫 도입부에서부터 시선을 끈다. 변화가 보존의 반대가 아니라고?
1. 변화는 보존의 반대가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변화를 보존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와 보수를 대척점에 놓듯이 변화와 보존을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상에 놓여있는 것으로 여긴다.
우 리는 그렇게 사랑해온 것들을 한순간에 잃지는 않을까 두려워한다. 즉 익숙했던 일상의 평화가 깨지는 것, 다른 말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특히 이 변화가 우리가 여태껏 사랑해왔던 것을 잃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더 그렇다. ... 우리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더 중요한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더 중요한 B를 보존하기 위해 A를 바꾸는 것이다. 왜냐하면 B가 A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흔히 변화와 보존을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변화는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거이요, 반대로 보존은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마 치 변화와 보존이라는 단어를 두고 언어 유희를 하는 것 같지만 변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 처럼 끊임없이 변한다. '상전벽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은 그 유래가 몇 백년은 되었을 거다. 그 옛날에서 세상의 변화가 있었는데 요즘같은 속도의 시대에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세상이 변하는데 보존하고 싶은게 있다고 끌어 안고만 있어서는 그것은 퀴퀴한 냄새나는 것이 되고 폐기처분 대상이 될 것이다. 변하는 세상에 맞추어 변화를 가해줘야 보존이 가능하다.
2. 변화에 무조건 적응하기 보다는 적응과 예상을 적절히 절충시켜야 한다. 우리 선조가 동굴에 적응만 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동굴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진보는 더 나은 환경을 상상하고 주변 상황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쓴 바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책에 나오는 노숙자에 대한 얘기는 변화에 대한 적응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재밌는 예이다.
누 가 나에게 이 사회에서 적응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노숙자라고 말하겠다. 노숙자들은 여러 열악하고 힘든 상황에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만큼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래를 예상하고 움직일 줄 아는 능력이다.
3. 변화에 대한 저항은 생존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라고 한다.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을 잠재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이루려고 하므로 가장 원활하게 일이 진행되는 방법을 택해 그 과정을 고정시키고 더 이상 바꾸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이라는 것은 에너지로 영양을 취하는 변화 저항 세력이다. 이것이 생명에 대한 진정한 정의가 아닐까 싶다. 반대로 죽는것은 어떠한가? 죽는다는 말은 환경이 원하는 대로 적응하는 것, 즉 저항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 것이다. 조직은 효율화된 업무방식을 고착화하려는 경향이 있고 한편으로는 변화에도 순응해야 하는 모순을 가지므로 융통성을 갖고 극한으로 몰고 가서는 안된다.
변화에 대한 이 세 가지 풀이는 무릎을 치게 만든다. 변화를 너무 왜곡된 렌즈를 통해서 켵눈질로만 봐왔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이런 이해를 통해서 어떻게 타인을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주제가 이어진다.
1. 권력, 힘으로 움직이기
2. 확신, 합리적으로 타이르기
3. 참여,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끌어들이기
4. 수용, 타인의 말 받아들이기
힘 으로 움직이기가 성공확률이 높은 편이라는 글을 읽는 순간 섬뜩해지지만 곧 이어지는 글을 읽고는 안심하게 된다. 이 방법은 말 그대로 권력- 책 후반부에는 권력과 권위를 구분하고 있고 그 취지를 살펴봤을때 권력이 적당한 것 같다-이 있어야 하고,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권력를 부려 돌아가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쉬운 해결책으로 보이는 이 방법은 결국 큰 손해를 가져온다.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 권력에서 권위로 넘어가듯 자발적인 판단력, 결단력, 창의성 등을 더함으로써 단순노동에서 창작행위로 넘어갈 수 있다.
직 원 개개인의 자율적인 창의성이 강조되는 시기에 권력을 휘둘러 변화를 도모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임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힘이 아닌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 합리적으로 타이르는 방법 - 아마 공자라면 이 방법을 가장 선호했을 것 같다 -은 기업에서 가장 많이 쓰이지만 가장 효과가 없는 방법이라고 한다. 이것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결론이다.
그 럼, 수용과 참여는 어떨까. 이 책에서도 참여를 타인을 변화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꼽는 것 같다. 여기에도 약간의 반전이 있다. 뭔가 변화를 이루려면 우선 그 변화에 관련된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오류라고 한다. 그럼 지지도 없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해답은 지지는 협동하며 함께 움직이다 보면 생긴다는 것이다. 이를 합리화의 원칙이라 부른다. 우리가 한 행동을 바탕으로 믿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쉽게 조종당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다"라는 로베르 뱅상 줄의 지적이 타인을 변화로 이끄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 책은 세 명의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과 글쓰기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앞의 직관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접하다 뒤로 갈수록 심오한 접근과 사유가 나오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오해를 씻어주는 세 가지와 타인을 변화로 이끄는 방법만으로도 현실에서 꽤 쓸모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