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 차별과 위험으로 박음질된 일터의 옷들
경향신문 작업복 기획팀 지음 / 오월의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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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가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현재, 한국 패션디자이너의 숙명이 될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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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위에 지은 집

 

 

   “추모가 일상이 된 나라대한민국.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매우 걱정스럽다.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느냐 할 수도 있겠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인식되어져야 한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학생으로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야한다. 나의 눈에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 (,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과)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리(axiom)로 알고 배운 것이, 진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이것들은 다 무얼까. 나는 궁금하다. ‘정치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내 정치는 수단이자 도구이지 해답 그 자체는 아니라고 느꼈다. 어떻게 하면 원인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알 수 있을까.

 

   나는 웬델 베리의 <소농, 문명의 뿌리>를 읽고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을 빌려, 나는 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았고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짚어보았다. 그제야, 내가 모래위에 서있음을, 우리가족을, 우리나라를, 아니 전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 바탕이 사상(砂上)임을 알게 되었다.

 

   책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모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이 책의 제목이 이를 잘 나타낸다. <The Unsettling of America: Culture & Agriculture> 미국이라는 나라가, 농업위에 세운 나라임을, 현재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적 가치의 상실로 인해 일어난 것으로 판단한다. 어찌 보면, 하지만 확실히, 미국사()는 세계사 그 자체이다. 미국 이라는 나라는 역사라는 돌이킬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생생한 자연실험장역할을 했다. 다양한 시험이 치러졌고 성공적이었었다. 미국은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웬델 베리는 이러한 성공의 과실을 농업에 뿌리에서 찾는다. 그리고 농업의 재건을 통해 뿌리뽑힌 미국의 치유를 말한다. 나는 농업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책 <사피엔스><소농, 문명의 뿌리>의 비교·대조를 통해서 농업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비평해보겠다.

 

   또한, 나는 <사피엔스>에서 언급된 개념인 상상의 질서를 이용하여 <소농, 문명의 뿌리><젊은 농부 브라운>를 현대사회 문제와 연결시켜 얘기해 보고자한다. 우선, ‘상상의 질서는 무엇인가. 그것은 허구를 믿는 힘이다. 다수가 믿음으로써 그것은 주관적 실재가 된다. 허구는 사실이 된다.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설령 내가 초인적인 노력으로 스스로의 개인적 욕망을 상상의 질서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나는 한 개인에 불가하다. 상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수백만 명의 낯선 사람에게 나와 협력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상상의 질서는 내 상상력 속에만 존재하는 주관적 질서가 아니라 수억 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상호 주관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출처: Pg.175 사피엔스(Sapiens), Yuval Noah Harari ,김영사]

 

 

상상의 질서를 바로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상상했고 자본주의를 상상했고 사회주의를 상상했고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주관적 실재로 만들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며, 어느 때에는 우리를 통제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들에 의하여 휘둘리며 살아가야할 처지에 놓인 것 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중에서도 사회라는 주관적 실재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모든 사회문제는 사회라는 공간속에 존재한다. ‘사회개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단순히 개개인의 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그 자체로 실재한다.

 

   그렇다면 사회개인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회는 구성원들의 합(숫자, 규모) 그 이상의 무엇이다. 현 사회구성원 모두는 죽을 운명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 각각의 구성원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사회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우리의 후손들의 후손들이 죽는 날에도 여전히, 사회는 존재할 것이다. 사회는 일종의 유기체적 생명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사회는 개개인의 합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그리고 이 막강한 사회는 그 속의 작은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C.W.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발췌한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에 대한 비교 예시이다.

 

이런 관점에서 실업 문제를 살펴보자. 가령 인구 10만의 어떤 도시에서 한 사람만 실업자라면, 그것은 그 사람의 개인 문제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성격과 기술, 그리고 그의 직접적인 여러 기회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가령 취업자가 5,000만인 나라에서 1,500만 명이 실업자라면 그것은 공공 문제이며, 어떤 특정 개인에게 주어진 기회의 범위 내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다.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사회구조 자체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정확히 진술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려면 그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제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며, 단지 개개인의 상황과 성격에 대한 고려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출처: Pg.22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 C.W. Mills, 돌베개]

 

   즉, 사회는 객관적 실재이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역사적 맥락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적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고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떤 역사를 거쳐 이 자리에 살게 되었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 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두 책은 서로 상반된 위치 관념을 가지고 있다. <사피엔스>에서는 농부와 집()의 관계를 애착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건축학뿐 아니라 심리에도 큰 영향을 미칠 커다란 혁명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라리는 내 집에 대한 집착을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로 인식하여 농부가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중식적인 되었다는 것이다. <소농, 문명의 뿌리>에서 웬델 베리는 농부와 땅과의 관계를 충성심으로 보았다. 충성심이란 위치에 대한 종합적 인식이자 감각이다. 농부와 땅은 서로 묶여져 있었고 농부는 이것을 벗어나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진다. , 땅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제약되는 동시에 보호받을 수 있었음이다. 하지만 위의 <사피엔스>에서 나타난 땅과 농민의 애착관계는 기계은유를 내포한다. 땅에 대한 애착은 집착이며, 소비재이며, 돈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돌봄과 구분되어져야 한다. , 땅을 사용할 수 있는 원자재로써 다루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 인간을 지배하던 은유는 전원적인 것이거나 농적인 것이었다. 과거의 은유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 것은 탄생·성장·죽음·부식이라는 자연의 순환 주기로서, 인간의 돌봄행위를 통해 잘 보존되었다. 그러나 현대인을 지배하는 것은 기계의 은유다. ······ 기계 은유를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 경외, 존중, 겸양, 기쁨을 제거해 버렸다.

[출처: Pg.122 <소농, 문명의 뿌리>, 웬델 베리, 한티재]

 

 

   여기서 내가 걱정하는 것은 <사피엔스>의 애착관계는 착취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장제일이라는 지금의 시대정신에 뿌리 내려져 있다. 오늘보다 내일 조금이라도 더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지상명제로써 누구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의를 제기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밖의 의견을 묵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웬델 베리가 말했듯이 미래를 식민화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소위 전문가에 맡기며 우리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땅이 분리되고 있다. 애착은 집착을 나타낸다. 땅을 단지 소유물, 부동산 재산증식의 수단으로써 이용하고 있는 많은 국가와 사회가 떠오른다.

 

   <사피엔스>에서는 농업이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유발 하라리가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에서 당겨온 개념으로 토지당 식량생산이 늘어날수록 인류의 수도 증가하여 결국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류가 서있는 토대가 농적가치라기 보다는 오히려 채취·수렵인의 마음과 더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농업혁명이후 인류 개개인의 영양상태가 더욱 나빠졌다는 것을 근거로 농업으로의 전환이 인류 개개인의 행복을 오히려 떨어트렸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Pg.124)

 

   저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또한, 농업에 배치된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Pg.153)”라는 저자의 주장은 정치적 틀이 없는 단순 농경사회에서는 폭력이 만연하였다-15%(Pg.127)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는 당시 농경사회의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이러한 농경 사회에서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국가와 계약을 맺게 되었고 그들은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역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고된 노동을 마치 가축처럼 이어갔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부지런한 농부들은 그렇게 힘들여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토록 원하던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슬프게도 얻지 못했다. 모든 곳에서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연했다. 이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식량으로 먹고살면서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밖에 남겨주지 않았다. (Pg.153)

 

   하지만 이에 대한 전혀 다른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귀족출신 무정부주의자 P.A. 크로포토킨의 <만물은 만물을 돕는다:상호부조Mutual Aid>에서는 농민이 마을 공동체와 협동조합 그리고 길드로 이어지는 농민-결사체를 통해 관습법과 행정법등을 독자적으로 구축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이러한 마을 공동체는 1000년 이상 존속해왔다고 밝혔다. 그리고 농민은 전쟁이나 착취로 그 결사체가 파멸되지 않았을 때는 꾸준히 경작 방법을 개선시켜왔다. 이렇게 농업 스스로를 발전시킨 것 또한 농민이니, 역사의 부수적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까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봉건제도가 마을 공동체의 와해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주가 농민들에게 노예 노동을 부과하는 데 성공했고 ······ 마을 공동체의 독점적 권리였던 것을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는 했지만, 농민들은 자기네 공동체의 두 가지 기본적인 권리, 곧 토지의 공동 소유권과 독자적 사법권만은 그대로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관리는 판결을 승인하고 관습법에 따른 벌금을 징수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Pg.187-<만물은 만물을 돕는다>)

 

······우리의 현 문명과 그 문명이 이룬 모든 성취 및 미래에 대한 약속은 그들이 남겨준 유산이 좀 더 발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이처럼 대단한 성과를 낳은 힘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런 힘을 몇몇 영웅의 천재성이나 거대 국가의 강력한 조직 혹은 군주의 정치적 역량에서가 아니라 바로 상호부조와 지원이라는 흐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마을 공동체에서 작동하는 것을 봤으며, ······ 길드라고 하는 새로운 모델의 형태로 나타났다.(Pg.188)

, 농민은 피지배계층으로써 수동적으로 지배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나 말처럼 일했던 시대가 있었음 잊어서는 안 될것이다. 누구도 소나 말처럼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짐승처럼 부리고 싶지 않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우리가 농업을 멸시하게 된 이유이자 기업가 와 전문가에게 농업을 포기해버린 이유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사람들을 기계 다루듯 하거나 아예 노동에서 배제해 버린다고 하는 것이 이 잘못들을 고쳐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웬델 베리는 말한다.

 

   너새니얼 호손이 쓴 <젊은 농부 브라운>의 이야기 속에 이러한 현대 사회와 농업 사이의 문제의 핵심이 나타나 있다. 세일럼 마녀 사건으로 유명한 바로 그 세일럼 마을에서 벌어지는 농부 브라운의 기존의 상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이야기이다. 브라운은 숲으로 가서 청교도들의 이중성을 본다. 악마와 계약을 할 뻔 한다. 여기서 숲은 이중적의미를 가진다. 진실이 숨겨져 있는 본질(실체)을 감춰주는, 인식을 방해하는, 두려워 꺼려지는, 폭력이 난무하는 자연상태이다. 이는 처음에 언급한 상상의 질서이기도 하다. 숲이 가지는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위선이 폭로되는 공간, 실제를 인식하고 초월하는 공간이자 잘못이 교정되는 공간, Wilderness(주변부, 교정 공간)를 뜻한다. 이 숲 속에서 주인공은 만나는 인물들 보다 본인 스스로에게 더 혐오감을 느낀다. 그것은 치유의식이다.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상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하지만 기존의 상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 상상의 질서는 때론 그것이 주관적 실재성을 얻는 과정 중에 폭력을 수반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브라운에게 고통이 된다.

 

   그러나 <젊은 농부 브라운>에서 나타난 고통스런 자기 인식의 과정의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나는 이 소설이 바로 이 두려움을 극복해내는 젊은 농부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Pg.166 <사피엔스>)

 

그러니 현존하는 가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다. (Pg.177 <사피엔스>)

 

 

세상에서의 위치에 대한 이렇게 추상화된 감각은 또 다른 종류의 혼란스러움의 반영이다. 현대의 전문가와 기업가는 자신들의 도덕적 위치 또한 알지 못한다. 그는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우주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배웠다. 그는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용할 수 있지만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처: Pg.117 <소농, 문명의 뿌리>, 웬델 베리, 한티재]

 

   더 이상 전문가에게 농업을 맡겨서는 안 된다. 이것을 토론할 공론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한번, 농적 가치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우리에 앞서 이러한 고민들을 한 많은 분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P.A.크로포트킨의 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 크로포트킨은 국가 권력만이 아니라 산업의 분권화를 강조했고, 산업화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크로포트킨에게 진보란 각 지역이 만들어진 재화의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것, 지역 내 이용을 위한 생산을 뜻했고, 그는 농업의 중요성을 특히 협동 노동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 이런 관점에서 크로포트킨은 당시 소농과 지방 소공업의 몰락을 경제발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보며 그것을 당연시 했던 자본주의 경제학자와 사회주의자 모두를 비판했다. 그리고 토지와 공장의 독점, 도시로의 집중이 사회에 큰 해를 입히리라 경고했다.

[출처: Pg.92 <청년에게 고함>, P.A.크로포트킨/ 하승우 해설, 낮은산]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부의 근본이 토지이므로 토지세를 통해서 정부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여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가 눈부시게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주기적으로 경제불황이 닥치는 이유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지대를 징수하여 최우선적인 세원으로 삼아야 한다.” 조지는 더 나아가 ······ 토지가 공동소유로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회적으로 부를 공유하자는 것이다.

[출처: Pg.255 미국사 산책 3,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우리는 더 이상 기존의 상상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제도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웬델 베리의 생각과 저서들은 점점 더 신선해진다. 농업은 단지 농업혁명이라고 뭉뚱그려, 생산력의 증가, 인구수의 증가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리 문명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에세이로 우리의 뿌리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단지 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적 가치를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나는 나의 몸을 경외한다. I stand in awe of my body

_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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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and Through the Looking Glass (Paperback)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and Through the Looking Glass 9
루이스 캐롤 지음 / Penguin Books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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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 in Wonderland에서 역설과 모순은 하나의 표식이 된다. 우리는 이 표식을 따라 걷고, 이 표식을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알게 된다. 마치 안내판처럼. 각각의 챕터에는 신비하고도 무서운 표지판들이 줄지어 기다린다. 이 표지판을 따라 걸으며 나는 작가가 역설을 통해 숨기려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고 극화하려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점에서 이 작품은 엄청난 설득력-이야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동화적 언어로 쓰인 판타지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역설을 말하는 힘이다.


    역설은 무논리가 아니다. 역설은 현실 세상을 마주한 거울 세상 속 논리이며, 현실 세상 속 참과 거짓의 대우명제이고 논리적으로는 동치이다. , 좌우가 반전되어 있을 뿐 역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이야기 바깥의 우리는 이야기 속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굴을 보기위해 거울을 보는 것처럼.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은 찰스 루드위지 도지슨(Charles Ludwidge Dodgeson)의 필명이다. 루이스 캐롤이라는 필명만 다를 뿐 아니라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삶(alter ego)까지 루드위지 도지슨과는 거울 속 이미지처럼 대칭적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 this curious child was very fond of pretending to be two people.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이름에 따라 이분법적 삶을 살았던 작가가 소설 속 앨리스의 성격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Who in the world am I?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생각하기에 자아의 일관성(consistent identity)이란 개념은 부족하며, 자아는 사회의 압력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앨리스는 몸의 크기가 커지거나 작아질때, 다른 동물들(인격체들)과의 권력관계 등을 수시로 재정립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자아의 유연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루이스 캐롤은 작가일 뿐만 아니라 유명한 사진작가였다. 그의 창작활동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본 부분은 ()의식이다. 당시 19세기 영국에서 소녀는 일종의 신성함-도덕적, 미적, 육체적 완벽-을 나타내는 이상적 모델이었다. 루이스 캐롤은 앨리스를 비롯한 여러 소녀들을 모델로 찍은 사진을 통해 소녀의 자유스러움이상을 추구했다. 이 부분에 있어 루이스 캐롤이 이상성애자(pedophile)라고 보는 루머가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루이스 캐롤은 소녀가 가진 이상적 특징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압력(필요와 욕망)으로 빚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 작가는 앨리스와 비둘기(Pigeon)와의 대화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But I’m not a serpent, I tell you!” said Alice. “I’m aI’m a” “Well! What are you?” said the Pigeon. and what does it matter to me whether you’re a little girl or a serpent?


단지 달걀을 먹었었다는 이유로 비둘기에게 뱀(serpent)으로 오해받고 있는 앨리스는 끝까지 비둘기의 오해를 풀지 못한다. 비둘기의 시선과 생각은 단적으로 소녀는 어떠해야한다는 사회적 압력과 사회적 기대를 나타낸다. 이러한 압력과 기대는 생각의 자유를 제한하는 프레임으로써 작용한다. , 루이스 캐롤은 사회가 소녀의 순수성을 시험하고, 일방적으로 재단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는 루이스 캐롤이 역설을 통해 현실 모순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비록 아동문학으로 분류되었지만, 이 이야기에 내포된 것은 어른들이 보고싶지 않아하는 부분이다. 1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소설 속의 A Caucus-race(정치풍자), A mad tea party(시간관념), A court of justice(정의론) 등 많은 부분이 오늘날의 사회, 정치, 문화적 비합리성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소설을 읽는 내내 놀랍기도 했고, 동시에 씁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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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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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서평과 느낀 점

                                                                                                 

 

우리는 우리가 딛고 있는 자본주의체제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우리를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올바른 방법인 것처럼,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바로 아는 것 또한, 지금의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민으로써 응당해야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는 많이 부족하다.

이론으로써만 자본주의체제를 공부한다면, 봉건제 붕괴와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어쩌면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등장은 온갖 착취를 당하던 농노, 농민계급이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투쟁의 결과이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 놓치기 쉬운 것을 바로 알게해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생각에 성공적이었다. 쉽게 잘 읽혔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자본주의에서 과연 어디로 갈 것인지 묻고 있다. 물론 여기에 명쾌한 해답은 없으며 저자도 정확이 답하고 있지 않다. 다만, 책의 흐름을 따라 가다보면 저자의 혹은 책을 읽는 독자 본인만의 답이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초기 자본주의에서부터 책의 끝 부분에 나오는 파시즘 까지 자본주의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일련의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앞서 자본주의는 봉건사회에서 투쟁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것은 마치 자본주의 이전까지의 역사는 어둠이요, 악이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체제로부터 인간의 자유가 보장되는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단언컨대 아니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에서 노동자가 착취당했던 것처럼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노동자는 착취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더 자본주의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으며, 그러한 연구 끝에 자본주의가 봉건주의와 마찬가지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역설하였다. 맑스는 혁명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늘날 자본주의는 건재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책은 다시금 자본주의를 살린 새로운 가치 이론인 한계 효용론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은 맑스주의나 고전학파가 노동 비용을 객관적인노동시간으로 측정한데에서 그 상품을 구입함으로 얻을 수 있는 만족의 크기라고 하는 주관적 기준으로 완전히 탈바꿈 시킨 것이다.

이 한계 효용론으로부터 시작된 시장의 확대, 자유경쟁, 독점(트러스터와 카르텔), 잉여자본과 잉여생산, 식민지와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한 부분은 내가 이 책의 백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 왜 사회주의자들이 폭력적인 방법을 통하여야만 공산주의사회(사유재산 폐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한다. 투표를 통한 정권교체 자체를 인정 안 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본가들이 그들 스스로 쌓은 부를 합당한 것(합당하지 않았기에)으로 만들 방법을 파시즘에서 찾았다는 대목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하고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탈환하려 할 때 자본가들은 파시즘으로부터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한 자본주의 딜레마의 끝이 이것이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책을 읽고서 많은 것들이 해소되었다. 책에 나온 이 부분,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 남아 있는 한 과잉 자본은 결코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이 부분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가볍게 읽었지만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니었다. 굉장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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