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7
애덤 로버츠 지음, 곽상순 옮김 / 앨피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레드릭 제임슨은 영미권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평론가이다. 그는 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일관된 마르크스주의 평론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데리다나 들뢰즈 등과 동등한 반열에 오르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많은 논문, 저서를 남겼지만 가장 영향력있는 저서는 <정치적 무의식>과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애덤 로버츠의 <트랜스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스>도 이 두 책을 중심으로 프레드릭 제임슨의 이론들과 비평활동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각에선 그의 분석과 이론이 인종학적으로 영미권 백인들의 문학을 중심텍스트로 하여 전개된다는 이유로 '오리엔탈리즘'적인 것으로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영미권 출신의 백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문화권을 지적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최근 영화비평작업에서는 아시아영화를 취급하는 것이 일부 있기도 하다.

프로이드와 마르크스를 이어주는 다리, <정치적 무의식>

영미권, 또는 더 넓게 유럽계통의 이론사조에서 오랜 숙제중의 하나가 있다. 그것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다리를 놓는 것이다. 각각 개별적으로는 중요한 업적이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프로이트는 미시세계인 개인과 가정에, 마르크스는 거시세계인 역사와 사회에 자신들의 연구의 포인트를 잡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이론가들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연결시켜 보려고 노력하였고,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 시도로서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저서를 발표했다. 이 책은 주로 서구의 모더니즘 문학연구를 역사적이거나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한 책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상당히 경도되어서 모더니즘, 리얼리즘과 같은 서구의 문학을 연구하고, 그 문학연구를 경유하여 미시세계인 개인과 가족이라는 곳, 즉 프로이트적인 공간을 연구한 책이다.

아직, 국내에는 대부분의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처럼 번역조차 안되어 있어서 영문학 전공자들이 원서로 읽어낸다고 한다. 하지만, 프레드릭 제임슨은 자신의 책을 의도적으로 너무나 난해하게 쓰는 것 또한 정평이 나있다. 그래서, 많은 국내의 프레드릭 제임슨 연구자들이 골탕을 먹기도 한다고 한다.

헤겔과 알튀셰의 중간을 매개하는 마르크스주의자

프레드릭 제임슨하면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그의 평판을 놓칠 수가 없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때론 헤겔적인 총체성의 이론가라고도 불리는데, 역사와 사회라는 굵직굵직한 거대서사로서 개인을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프레드릭 제임슨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국가장치'와 '억압적국가장치', 토대의 결정에 대한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 토대의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등의 개념으로 국내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낯설지 않은 프랑스의 공산주의 철학자 알튀셰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대체로 프레드릭 제임슨의 이론들은 헤겔을 경유한 마르크스주의인 역사의 합목적성의 세계와 알튀셰 이론의 중간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의 토대결정을 승인하면서도 알튀셰의 상부구조의 자율성도 인정하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중적이기까지도 한 것이 프레드릭 제임슨의 이론세계이다.

그리고, 프레드릭 제임슨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프랑크프루트학파와 샤르트르인데 호르크하이머의 자본주의 문화산업비판과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사상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초기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

피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저서를 내놓았을 때는 상당히 뚱딴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좌파의 우파로의 전향같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거대서사와 거대담론,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총체성을 철저히 배격하는 사조이기 때문이다. 사실 <트랜스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에서도 그 부분은 명확하지가 않다. 정치적 무의식을 연구하던 마르크스주의자가 왜 포스트모더니즘에 심취하게 되고 대표적 이론가가 되었는지.

그런데,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면 원래 문학평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모더니즘연구 등에 집중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모더니즘의 안티테제이자 신테제이기도 한 포스트모더니즘 연구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최초 사용한 사람은 이집트 출신의 미국이론가 하산이다. 그에 의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최초 사용되고, 나름대로 많은 개념화도 이루어지지만 본격적으로 이론적인 모습을 갖춘것은 리요타르,하버마스 등에 의해서다.

특히 리요타르의 작은 책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국내에도 번역 소개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그외 하버마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는 재독한인철학자 송두율씨에 의해 국내에는 최초로 알려졌다.

상대적으로 프레드릭 제임슨의 이론은 국내에서 영향력이 덜해서 깊이없음(depthlessness), 혼성모방 등의 용어가 알려진 정도다. 그의 저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적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국내 미번역상태다. 만일 그의 저서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읽게 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보다 급진적인 것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마르크스주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또는 탁월한 문화평론가이기도 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들을 쉽게 그리고 자주 접근할 기회가 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캉 읽기 정신분석과 미학총서 2
숀 호머 지음, 김서영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라캉이란 이름을 글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약 5년 전이었다. 그 영향력에 비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너무 늦은 것 같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 때문에 5년 전 공들여 읽은 라캉에 대한 지식을 그 맥을 잇지 못하고 끊어 두고 있었다.

그러다 역시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알게 된 철학자가 지젝이며, 지젝의 최대 관심사가 라캉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쯤 되어서야 라캉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이해의 폭을 넓혀 놓으면 책읽기나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라캉은 프로이트나 니체, 마르크스만큼이나 현대의 중요한 이론가자 사상가다. 시기적으로는 다른 세 명에 비해서 이후의 인물이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인물이지만 현대의 인문학 일반, 문화이론, 영화비평 등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물론, 그의 사상의 본령인 정신분석학 분야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최근의 문화이론과 영화이론 등지에서는 라캉이 인용되지 않는 경우를 못 찾을 정도라고 한다. 최근 국내의 C영화지에서 시행한 평론상 수상에서 "라캉을 인용하지 않고는 영화비평을 할 수 없는가?"라고 말했을 정도이며, 세계적인 S영화잡지에서는 라캉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적 영화비평가 그룹이 있을 정도다.

라캉 이론의 에센스들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다

라캉은 생전에 딱 한 권의 책만을 남겼고, 그의 이론의 대부분은 생애 내내 동료 연구자, 제자들과 진행한 세미나기록, 임상연구기록에 남아있다. '에크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아직 영문으로도 완역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워낙에 방대하고 난해한 그의 이론과 글쓰기의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연구자와 저자들이 라캉에 관한 개설서나 읽기 형식의 책을 대단히 많이 내놓았다. 숀 호머의 <라캉읽기>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라캉읽기를 읽기 위한 라캉읽기'라는 점이다. 즉, 아직 초보자들에게 라캉의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어 번역본이 드물기도 하지만 워낙에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여타의 라캉 개론이나 라캉읽기를 읽는 것이 초보자에게는 적당하고, 그전에 '에피타이저'로 읽을 만한 책이 숀 호머의 <라캉읽기>다.

그러나 숀 호머의 <라캉읽기>를 얇고 작은 책이라서 얕봐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라캉 이론의 구조가 잘 설명되어 있고, 주요 용어를 중심으로 그의 이론의 에센스가 잘 저며져 있다. 더구나 번역자 김서영이 일반번역자가 아닌 국내에서는 제법 알려진 라캉 전공자라서 번역이 굉장히 충실하고 좋다는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숀 호머의 <라캉일기>는 꼭 라캉의 이론을 교조적으로 다룬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라캉을 가운데 둔 의미망의 그물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여러 인물들, 예를 들면, 지젝, 크리에스테바, 아리가리, 버틀러 등의 이론도 작은 분량이지만 소개되어 있다.

그 외 특이할 만한 점은 라캉이 직접 취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론의 신봉자들이 취급하는 분야인 문화이론과 영화비평도 상당한 부분 소개되어 있어서 책읽기의 즐거움을 배가된다.

한 가지 흠이자 천만다행 한 점은 그의 생애 후기에 소개되는 수학이론을 사용한 여러 설명들이 이 책에는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난삽한 부분이 생략된 이유는 숀 호머의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이 라캉읽기의 맛보기이고, 실용목적상 문화이론이나 영화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더 진보된 라캉읽기를 원한다면 책 뒤에 소개된 목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라캉이론의 에센스 몇 가지 소개

라캉이론은 사실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생애에 걸쳐 진화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리고 워낙 난해하고 요약을 거부하는 그의 이론의 특성, 원래 정신분석학의 임상소견에서 출발했다는 특성 탓에, 재차 그의 이론을 옮겨적는 사람은 굉장히 임의적(?)으로 요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캉의 이론은 보통 상상계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한다. 어린이가 거울을 보면서 파편화된 것으로서의 자아의 이미지를 확보한다. 그러나 그 자아라는 것은 굉장히 파편화되고 비조직화된 것이다. 우리가 통상, 자아를 통일된 실체로 알고 있는 데에 반하여 라캉의 자아란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자아는 유아기 내내 상상계라고 부르는 동화적인 세계 속을 산다.

그러나 언어를 습득하고,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징계라고 불리는 단계에 진입을 한다. 거칠게 말하면, '언어=상징계'라고 까지 할 수 있는데, 구조주의 사유의 영향을 받은 라캉에게 언어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다시피 언어는 구조화되어 있는데, 라캉에 따르면,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그의 이론과 프로이트의 이론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또 등장하는 것이 실재계와 대상a의 개념이다. 실재계란 상징계 바깥에서 심연처럼 상징계를 지탱하기도 하며, 또는 실재계의 잔여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개념이다. 이렇게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라캉이론의 기본개념이다.

그리고 추가되는 것이 팔루스와 성차의 개념인데,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팔루스는 프로이트 이론의 '남근'과는 의미상 차이를 가진다.

아이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아버지에 의한 거세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럴 수가 없고 아이는 성인이 되고 다른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공포증에 대한 이론이다. 그런데 라캉에 의하면, 이 팔루스(또는 남근)은 의미가 발전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가 존재하며, 팔루스는 의미가 확대되어 해석된다. 팔루스는 일종의 욕망의 대상이다. 팔루스는 단지, 남근으로서만 이해하면 곤란하고, 욕망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베일'이라고 불리는 것 뒤에 팔루스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욕망의 본질이 숨어 있다. 아이가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사회에서 욕망의 실현은 무한정 지연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지젝같은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와 연관시켜 자본주의적 모순을 설명하는 데에도 응용한다.

팔루스와 성차에 관한 이론 때문에 라캉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당하기도 하는데, 숀 호머에 의하면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라캉의 이론은 이외에도 아주 다양한 내용들이 많고, 특히 영화비평이나 문화이론으로 응용을 하면 정말 재미있는 글들이 많다. 관심 있는 분들의 독서를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Q 사회지능 - 성공 마인드의 혁명적 전환
다니엘 골먼 지음, 장석훈 옮김, 현대경제연구원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산업사회가 등장하면서 인간은 노동과 생산의 주체로 떠올랐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의 '지력'이 최우선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지력'이 뛰어난 인간이 더 질적으로 우수한 노동을 제공할 수 있고, 생산의 과정에서도 보다 지배적이거나 통제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는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인간들을 선발하기 위한 측정과 평가의 잣대가 요구되었다. 이런 이유로 등장한 것이 IQ다. 물론 거기에는 사회과학자들의 인간의 능력에 대한 사적이며 현학적 관심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IQ를 통한 인간 능력의 측정은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 인간을 너무 도구적으로 대한다거나 인간의 이지적이거나 이성적인 능력만을 과도하게 우위로 놓는 점이 그 병폐였다. 그리고, 잠재적인 문제점으로 인간에게 단지 지능만을 매개로 우열을 평가한다거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능력만을 과신하는 '이기적 인간'을 주조해 내는 것 등이다.

그런 반작용인지 한 때 EQ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인간의 감성적,감정적 능력을 한 번 평가하여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 중심의 사고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었던 EQ에 대한 관심도 모순점을 드러낸다. 과연 인간의 감성적 능력이라는 것이 평가가 가능한 것이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고, 인간의 감성적 능력이라는 것은 지능과는 달리 상대적이고 동적인 표현이라는 회의도 일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EQ는 한 때의 유행으로 소멸되어 갔으며 인간 능력 측정의 패러다임에서는 여전히 지능중심의 IQ측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성장기의 청소년이나 청년층을 대상으로 관례적으로라도 IQ측정을 하며, 입사 등 사회적 관문의 통과에서 여러가지 이름의 변형된 형태의 IQ측정을 한다.

그런데 대니엘 골먼은 < SQ사회지능 >이라는 책을 쓰면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흔드는 몇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일정한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첫째, 인간은 사회속에 외롭게 섬처럼 고립된 존재가 아니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여러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존재이므로, 마치 '성적표'처럼 IQ평가치를 부여받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우수한 IQ결과를 가지고 있어도 사회적 소통에 실패하면서 사회에서 낙오하거나 버림받는 결과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녀를 단순히 IQ나 EQ가 우수한 '인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소통'가능하고 '협조'가능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둘째, 인간의 '사회지능'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질적 요인이거나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향만이 아니라 '뇌'라는 물질적 존재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동공학적 측면상 감성적이거나 순간적 판단과 관련있는 "로로드"는 뇌의 "편도"와 관계되어 있고,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 지성적 사고, 지속적인 사고를 의미하는 "하이로드"는 뇌의 또다른 특정부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탄생이후 학습하는 사회에서의 영향이나 상호작용의 결과만으로 돌리지 않고 "뇌"의 학습작용과도 새롭게 연관을 시킨 것은 의미가 크다.

그러나. 다니엘 골먼에 따르면 인간의 사회지능이라는 것이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사회지능은 사회에서 겪는 일들의 영향을 받는다. 단지, 그 의미는 마치 바닷가의 바위에 특정한 패턴이 새겨지기 위해서는 바닷물의 썰물과 밀물이 필요하지만, 바위 그 자체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흔히 사회적 영향과 학습의 결과로만 치부될 수 있는 "사회지능"의 의미에 "뇌"와, "뇌"의 여러 부위의 기능이 물리적으로 작용함을 여러가지 문헌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다.

셋째, 다니엘 골먼은 소위 "이기적인 인간"이 설 자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즉, 우수한 능력을 가진 우수한 인간을 목표로 하는 서구사회의 도구적 인간관에 충격을 가하고 있다. 여러가지 사례를 들면서 "공감"하고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타적인 인간"의 우월성을 논하고 있다. 어렵고 슬픈 사람에게 동정의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불의를 보면서 노여워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모인 사회가, 유능하나 이기적인 인간들만으로 구성된 사회보다 낫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타성"이라는 것은 원숭이나 쥐와 같은 동물들도 공유하는 태도라는 것을 동물실험 결과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우선 "이타성"이라는 것이 "이기성"이라는 것 못지 않게 종의 원초적 본능이라는 것이며, 둘째로 인간보다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는 동물들(적어도 포유류)에게도 이타성,동지애,공감능력,정서 등 인간에게만 있다고 믿어지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유래하는 인간중심주의와 인간종의 절대적 우월성의 근거를 흔드는 사례는 그 밖에도 여럿 존재한다.

넷째, 인간의 "사회지능"을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개발할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대니얼 골먼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어둠의 세 유형"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부적응형 인간이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둠의 세 유형"이란 "나르시스형,마키아벨리형,사이코패스(psychopath)형"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세 인간형 공히 타인에게 해를 입히거나 입힐 수 있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인간형이다.

현대사회는 그 문화적 경제적 구조상 필연적으로 "어둠의 세 유형"을 계속 더 많이 만들어낸다. 인간의 "사회지능"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현 사회의 교육 패러다임을 다시 짜서 그러한 현상을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만연한 "악플러"현상에서도 비춰볼 수 있듯이 사회전체적으로 공격적이며 타인의 괴로움에 둔한 인간형이 너무 많이 발현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사회가 성장위주의 사회발전모델을 가속화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의 여러가지 사례와 연구결과를 통해서 보여준 사실들이 그런 현상의 해결을 위한 한 방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다보면 대니얼 골먼의 희망을 읽을 수 있다. 타인과 "공감"할 수 있고, "감정이입"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소통가능하고 타인의 이해를 위해서도 협력이 가능한 인간형을 대니얼 골먼은 꿈꾸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니얼 골먼의 꿈은 서구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사회적 병리현상을 가진 한국사회에서도 유효하다.

"사회지능"이 뛰어난 인간이 더욱 많아지고, 그들이 개인적 능력과 실력에서 뛰어난 인간들과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 - 인문학자 10명이 푼 유쾌한 과학 이야기
김용석.공지영.이진경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똑같은 현상이라고 해도 누가 보는가, 어떤 필터를 통해서 보는가에 달라서 그 결과치는 꽤나 다르게 나오는 것이다. 최근의 과학에서는 반복실험의 데이타가 달라지는 경우조차 있다고 한다. 그 만큼 상대성과 변동성이 세계를 규정짓는 힘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예전의 세계였다면 단일한 격자로, 단일한 시각으로, 일률적으로 세상의 일들을 평가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결과치를 암송하는 데에만 집중해야 되었는데 말이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그런 것들이 많다. 언론과 미디어에서도 1인 저널리즘과 블로그문화의 확산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시각에서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평가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늘었다. 책의 기획에 있어서도 특정 분야의 문외한들이 과감하게도 어떤 분야에 대해서 발언을 하고 질문을 제기한다. <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도 비슷한 경우이다.

워낙에나 과학이라는 분야가 그 학문적 교조성을 넘어서라도 그 난해성과 전문성으로 벽을 높게 올리고 있다. 그래서, 시중의 필부는 물론이고, 배울 만큼 배운 지식인도 자신의 분야가 아니면 과감하게 한 마디 거들기가 어렵다. 그러나, 제작년의 황우석사태에서도 보듯이 작정하고 덤비면 조금 배웠다는 사람이라면 한 마디 거들 수 있는 분야가 ´과학´분야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이 해내는 그런 성과야 내놓지 못하더라도 조금 준비해서 한 마디 거들고, 몇 마디 질문이야 못하랴.

<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에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등장한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김기봉(경기대 교수), 성태용(건국대 교수), 이거룡(동국대 연구교수), 정재서(이화여대 교수), 김어준(<딴지일보>대표), 조광제(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공지영(소설가),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유홍준(문화재청장), 홍성욱(서울대 교수) 등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지식인이 뇌과학, 나노과학, 반도체공학, 입자물리학, 우주론, 우주 개발, 로봇공학, 진화 이론, 유전자 연구, 수학의 10가지 테마에 대해서 해당 분야가의 최고 권위자와 대담을 하고 오철우(<한겨레>기자)가 이를 정리하여 엮고 있다.

뇌와 몸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철학자 김용석과 뇌과학자 신희섭, 미시사와 나노과학을 이야기하는 역사학자 김기봉과 나노화학자 유룡, 반도체공학과 동양철학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성태용과 반도체공학자 유인경, 입자물리학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이거룡과 입자물리학자 손동철, 우주론과 창조신화를 이야기하는 신화학자 정재서와 천문학자 박창범, 우주 개발에 관한 딴지일보 대표 김어준과 위성사업단 단장 이주진의 이야기, 로봇과 인간, 몸 철학에 관한 철학자 조광제와 로봇공학자 양현승의 이야기, 진화 이론에 관한 소설가 공지영과 동물행동학자 최재천의 이야기, 유전자 권력 시대에 대한 철학자 이진경과 생명과학자 황우석의 이야기, 미술과 수학에 관한 문화재청장 유홍준과 수학자 계영희의 이야기까지가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인문학과 과학이라는 분야가 전혀 생소한 분야같지만 맞다아 있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과 학문의 역사를 보면 동서양 막론할 것 없이 근대이전까지는 한 지식인이 인문학과 과학에 똑같이 정통하였다는 사실도 이를 반증하여 준다. 결국,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을 인간을 중심으로 보는 것인지 사물을 중심으로 놓고 보는 지의 차이밖에 없어 보이기도 했다.

최근의 과학이라는 것이 난해한 수학적 기법과 컴퓨터를 비롯한 전문적 도구의 사용의 발전으로 일반인의 이해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지만 그 기본적인 사고의 컨셉의 차원으로 내려오면 범인들이나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도 다가갈 여지가 많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분야가 우리의 생활을 규율하는 중요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개인들도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야만 연전의 황우석사태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더라도 사실관계 자체에 대한 무지로 온 국민이 골탕을 먹는 일이 다시는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다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문학자들의 창으로 바라본 중요 과학분야에 대한 이해라는 기획아이디어는 대단히 돋보였다. 단지 아쉬웠던 점이라면, 일부대담의 내용상 너무 과학사와 과학철학 위주로 쉽게쉽게 가려던 접근법이 눈에 거슬렸다. 대담자가 담당분야에 대해서 사전 준비를 해와서 좀 더 내실있는 접근과 이해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단에 당첨이 되어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구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인간실존의 조건과 한계상황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