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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평점 :

가마쿠라에 있는 작은 문구점에는 포포라는 아가씨가 살고 있다.
문구점이라지만 기본적인 필기구뿐이다. 사실, 츠바키 문구점을 찾는 이들은 문구류 구입보다는 대필 의뢰를 하러 온다. 할머니는 가문의 열 번째 대필가였다. 포포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에게 대필을 배웠다.
한때는 고리타분한 할머니의 삶이 자기의 미래가 되는 게 싫어 방황하기도 했지만, 외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재능이 거기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일본어로 써 준 글씨를 보물처럼 여기며 기뻐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에서 보람을 찾은 것이다. 할머니들(쌍둥이였다)이 돌아가시고 츠바키 문구점이 비게 되자, 포포는 가마쿠라로 돌아와 문구점을 이어받는다.
포포는 대필을 의뢰하러 온 이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한다. 차 한 잔에 안정을 찾은 손님들은 포포에게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지인이 원숭이를 잃고 상심하고 있을 때 보내는 위로의 편지라든가, 부부가 합의이혼하게 되었음을 이웃들에게 보고하며 잘 살지 못해 미안하고 각자의 삶을 응원해 달라든가, 이십 년 만에 알아낸 첫사랑에게 (상대 배우자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잘 살고 있다고 안부 편지를 전해달라든가….

그렇게 손님이 의뢰를 하고 떠나면, 포포는 한동안 일상생활에서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 사람의 마음으로 살면서 편지를 쓸 대상을 떠올리고, 최적의 편지지와 필기구, 필체. 봉투. 봉인. 우표를 찾는다. 길을 걷다가도 의뢰인의 편지에 가장 알맞은 기분이 들면 펜을 집어 들고 그 자리에서 편지를 쓴다.
그렇게 완성된 편지는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포포의 편지를 받은 의뢰인들은 한결같이 '직접 쓴 것 같다'는 말을 한다. 편지를 받은 사람도 만족스럽다. 대필이지만, 그 안에 영혼을 담아 쓴다면 사람이 전할 수 없는 것도 대신 전해줄 수 있나 보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포포가 쓴 대필 편지를 받은 어머니가 편지를 꼭 안고 편안히 임종을 맞이하셨다는 의뢰인도 있었다.
책 뒤에는 소설에 나온 편지들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다른 종이를 써서, 마치 편지지 느낌이 난다. 각자 조금씩 다른 필체들로 편지가 쓰여져 있다.
여름, 가을, 겨울, 봄의 네 챕터로 나뉘어진 이 소설은 평온하고 단조롭다. 포포와 함께 일 년의 따뜻함과 차가움을 느끼는 듯하다. 무더위와 싸우며 시작된 이야기는, 따뜻한 햇살과 함께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이야기하며 끝난다.

지난 번에 읽은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 시 조찬모임》처럼, 이 책도 '떠나보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앞선 책에서는 지난 사랑에 대한 떠나보냄이라면, 이번 책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나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떠나보냄이다.
포포는 두 번의 절연장을 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대필가로서 누군가와 인연을 끊는 편지를 쓴다는 건 맞지 않는 듯 했지만, 그만큼 질기고 소중한 인연이라 누군가가 '싹둑' 잘라 줘야 한다는 말에 절연장을 수락한다.
절연. 인연을 끊는다.
잔인한 이야기 같지만, 예의와 형식을 갖춰서 보내는 절연장은 그것만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카톡이나 문자로 받는 것보다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얼굴을 보고 말해달라던 작년의 내 부탁 또한 아무래도 예의와 형식에는 어긋났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렇게 싸늘한 답변을 보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문득 미안해진다.
잔잔한 일상 가운데 잔잔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연을 들려 주는 책이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듣고 공감하는 포포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일상을 떠나 잠시 다른 세계로 마음을 돌려 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자처럼, 나도 가마쿠라에 가 보고 싶다. 도쿄 역에서 55분. 도쿄 근교에 있는 조용한 마을...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난데, 연속에서 읽은 두 권의 소설이 도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작중 포포도 도쿄에서 편지지를 사 온다.) 이번에 도쿄 여행을 갔던 게 정말 그냥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츠바키는 일본어로 동백꽃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책을 사서 처음 보여준 분과 동백꽃 이야기를 했었다. 휴대폰 케이스에 있는 꽃이 하얀 동백꽃이었다. 마침 작중 포포와도 같은 나이. 그분에게 이 책을 전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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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양장에, 편지 느낌이 나는 예쁜 표지글씨에, 뒷면 바코드/ISBN/가격 표시바를 세로로 배치한 거에, 민트색 띠지에, 동백꽃과 새 은박에... 제작 점수 100점짜리 책!!!!
"있지, 마음속으로 반짝반짝, 이라고 하는 거야. 눈을 감고 반짝반짝, 반짝반짝, 그것만 하면 돼. 그러면 말이지, 마음의 어둠 속에 점점 별이 늘어나서 예쁜 별하늘이 펼쳐져." 반짝반짝, 이라고 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응. 간단하지?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이걸 하면 말이지,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전부 예쁜 별하늘로 사라져. 지금 바로 해봐." 바바라 부인이 그렇게 말해주어서 나는 그녀에게 팔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천천히 걸었다. 반짝반짝, 반짝반짝, 반짝반짝, 반짝반짝.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마음속 어둠에 별이 늘어나서 마지막에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바바라 부인과 내가 이웃에 살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제대로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바바라 부인과 친해진 것도 천국에서 선대가 그렇게 되도록 보이지 않는 실로 조종했을지 모른다. 선대에게 해준 것보다 받은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옆에서 바바라 부인이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면서 카망베르 치즈를 먹고 있다.
아마 마음 한 켠을 얼버무리면 그대로도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익명 씨는 그렇게 얼버무려서 이어지는 관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겉치레로 관계를 계속해도 더는 서로에게 좋은 일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절교하지 않으면 끊을 수 없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상대를 평생에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만난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p.248
이제 예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 솔직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야. 때로는,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고. 그러나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길 바란다. 솔직하게 살아주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네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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