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 - 인터뷰와 지도제작
릭 돌피언.이리스 반 데어 튠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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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로지 브라이도티, 마누엘 데란다, 캐런 버라드, 퀑탱 메이야수를 신유물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설정하고, 신유물론 개념의 교집합으로 '횡단성'과 '수행성'을 지목한다. 그들이 신유물론에 관심을 갖고 이를 지지하는 까닭은 페미니즘이 처한 이론적 곤경, 즉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사회구성주의 사이의 진동을 신유물론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들은 이분법을 근대의 상징으로 간주하며 격렬하게 비난하고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대체하기 위해 '횡단'(들뢰즈·가타리)과 '간행'(버라드)을 거듭 강조한다. 이들의 이론적 태도는 신유물론으로 묶이는 이론적 담론이 (분과학문으로서) 철학이라기보다 (학제간연구로서) 문화연구의 연장선에 놓이며, 그 자체로 문화이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저자들은 물질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재현을 거듭 부정하면서 (양자역학을 문화이론으로 치환하는) 버라드를 따라 '윤리-존재-인식론'의 담론적 헤게모니를 주장한다.


저자들과 그들이 분석하는 이론가 다수가 이분법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메이야수는 여기서 제외하는 게 맞을 듯하다.) 이들이 의식하지 않은 채 겨냥하는 맞수는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횡단성은 변증법의 나선형 전진(즉 역사의 진보)을 대체하기 위해, 수행성은 담론적 실천과 물질적 실천을 매개 없이 결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책 마지막 장의 제목 '남(여)성의 종말'은 신유물론에서 도출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을 요약한다. (지배-피지배 관계를 함축하는) 범주 자체의 소멸, 개체화된 다수의 수평적인 연결, 흐름으로서의 대중(자율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용어로는 다중), 반재현주의로서의 반대의주의. 저자들은 아나키즘 운동과 정체성 정치를 하나로 만듦으로써 정당 없는 사회운동을 옹호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유물론 입문>의 저자가 신유물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퀑탱 메이야수 대신 제인 베넷을 배치한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메이야수는 (비록 하먼과 갈라서기는 했지만) 물질의 선차성과 우발성의 필연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관계로부터 물러나는 입장을 고수한다. 흐름이나 간행, 횡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보다 생기론이 신유물론에 더 잘 부합한다.


주석이 지나치게 상세한 것 같아 처음엔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읽다 보니 반대 의견도 충실하게 소개하려는 성실함이 돋보였다. (옮긴이가 들뢰즈·가타리와 차이점보다 친연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 해러웨이가 들뢰즈·가타리의 동물 논의에 몹시 불쾌해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해러웨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유목을 강조하면서 정착생활과 반려종을 힐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동물에 조금도 관심이 없으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갖다 쓴 것에 불과하다고 항의한다. 해러웨이와 들뢰즈·가타리 사이의 거리는 옮긴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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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 극소 채석장 시리즈
베르너 하마허 지음, 조효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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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마허의 <문헌학, 극소>(조효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는 ‘문헌학philology’을 해체주의 이후의 해체주의로서 탈-언어화하는 작업이다. 하마허는 독서 불가능성의 알레고리(폴 드 만)를 반복함으로써 아이러니, 자동인형(기계장치)의 반복성, 이율배반, 반성하는 의식으로서 자기의식, ‘세계정신으로서의 니힐리즘(야콥 타우베스)’, 보편/범주에 대한 거부와 같은 해체주의의 공리를 정확하게(그리고 모호하게) 반복한다.


언어의 탈언을 ‘위한’ 투쟁은 언어의 폭력적인 규정을 통해 언어의 존재 조건(아무것도 아님)을 무화하려는 시도, 즉 나치즘과의 투쟁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해체주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즉 유대인) 없이 말끔한 세계라는 가짜 유토피아에 맞선, 세속화된 세계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또는 유토피아를 무화하는 유토피아주의)로서 지금도 “세계 내전과의 대결을 결코 피할 수 없다(209~210쪽, 옮긴이 해제)”.


다시 말해 (세속화된 유대철학으로서) 해체주의와 (탈세속화된 반유대주의로서) 나치즘이라는 두 유령이 벌이는 “불꽃들의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160쪽, 르네 샤르의 시 <도서관이 불탄다>). 자크 데리다, 폴 드 만, 베르너 하마허, 아비탈 로넬 등 해체주의자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소중한 논적으로서 끈기를 가지고 세심하게 다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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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 극소 채석장 시리즈
베르너 하마허 지음, 조효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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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된 유대철학으로서) 해체주의의 유령이 (탈세속화된 반유대주의로서) 나치즘이라는 유령과 벌이는 “불꽃들의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짧지만 강력한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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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공상 혹은 환상 - 기본소득을 넘어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기
김공회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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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보다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 결론에서 힘이 떨어지는 감이 있어 아쉽지만,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관점을 고수하며 기본소득론을 면밀하게 살피는 미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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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공상 혹은 환상 - 기본소득을 넘어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기
김공회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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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회의 <기본소득, 공상 혹은 환상: 기본소득을 넘어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기>(오월의봄, 2022)는 기본소득 등의 ‘기본론’이 18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적 분기마다 분출했던 인민 대중의 불안정한 삶에서 비롯하며, 그것이 갖는 즉자성과 보수성은 자본주의의 논리와 역사성, 다시 말해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부재와 관련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단순히 맹목이라고 비난하지 않고, 기본소득론이 역사적으로 내세웠던 “기본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임노동제의 정착, 복지정책의 형성, 소득세제를 비롯한 조세제도의 확대와 같은 형식으로 반영되면서 인민 대중의 삶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여기서 복지정책 또는 ‘사회적인 것’의 발명이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 포섭과 연관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적은 분량 안에서 주제의식을 소화해야 할 필요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나선형 전진에 부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다시금 기본론이 남한을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제출되는 현상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알려주는 징후다.


이 책은 기본소득론을 역사적·비판적으로 살펴보는 미덕이 있는 반면, 결론에 이르러서는 관행적으로 ‘민주주의’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분석의 힘이 급작스럽게 떨어지는 듯하다. 저자의 주장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기본론의 요구를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부정적으로 수용하는 민주주의 체제란 코포라티즘 체제에 다름아니다. 국가장치를 매개로 한 계급 간 타협인 코포라티즘 체제가 반드시 민주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기본소득론자들이 국가에 대해 이중적인 관점을 드러내는 것(급부를 지급할 때는 강한 국가를, 그 밖의 개입에 대해서는 약한 국가를 요구)은 옳게 지적했지만, 국가장치의 효율성에 집중한 나머지, “국가는 누가 운영하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괄호 친 결과일 것이다. 이를 대신하는 말이 ‘민주주의’ 또는 ‘공화국’일 테지만, 오늘날 민주주의가 처한 곤경을 생각하면 충분하지 않은 답변이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이 갖는 곤란함은 경제를 곧바로 정치로, 또 정치를 곧바로 경제로 번역할 수 없다는 근본적 난점에 따른 것이다. 즉 둘을 매개(또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을 빌면 ‘약호전환’)하는 제3항이 필요하다. 이 제3항은 바로 정당,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을 빌면 ‘현대의 군주’인 정당이다. 이 자리는 현재 남한에서 부재한다(그렇다면 기본소득당은 무엇일까? 기본소득당은 의고적으로 표현하자면 인민주의 정당일 뿐이다. 인민 대중의 즉자적인 고통에만 주목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점에서는 정파연합정당인 정의당도,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노동당이나 진보당도, 녹색정치를 제시하는 녹색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김공회의 기본소득 비판은 ‘당의 부재’라는 동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며, 그와 같은 한계를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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