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와 비지배 - 마키아벨리의 <군주> 읽기
곽준혁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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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준혁의 <지배와 비지배: 마키아벨리의 <군주> 읽기>(민음사, 2013)는 부제대로 마키아벨리의 <군주> 또는 <군주론>을 장별로 해설하는 책이다. 마키아벨리 전공자인 지은이는 우리가 마키아벨리의 사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주>를 깊이 있게 읽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에게 <로마사 논고> 또는 <정략론>으로 알려진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열 권에 대한 강의>(<강의>)와 <전술론>, <피렌체사>, 희곡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등을 주석으로 삼고 여러 연구자의 견해를 참고하며 <군주>를 꼼꼼하게 독해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을 통해 <군주>에 대해 받는 인상은 당혹스러운 것이다. 거칠게 말해 <군주>는 ‘오독을 고의로 불러일으키는 텍스트’ 또는 ‘오독을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서두에서 제안했던 분류법에 따라 군주국을 분류하지 않았고, 서술에 있어서도 모순과 아이러니를 곳곳에 노출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교황이 이탈리아의 통일을 방해한다고 비난하면서도, 교황(특히 당시 교황의 가문이었던 메디치가)에게 이탈리아를 구원할 가능성이 주어졌다고 말할 때 절정에 이른다.


지은이의 독해를 따라가다 보면 마키아벨리가 정말로 <군주>를 메디치가에 헌정하려고 했는지 의심스러워진다(잘 알려진 대로 장자크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군주들의 음모를 폭로한 인물로 상찬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지적대로 마키아벨리를 ‘악의 교사’라고 부르는 게 정당하다고 느껴질 만큼 냉혹하다. 사랑받는 게 어렵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낫고, 최대한 경멸과 증오를 피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미움을 전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지은이가 정당하게 파악했듯이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군주와 (독재자의 고대적 표현으로 간주되어온) 참주 사이의 구분도 <군주> 속에서는 흐릿해진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혐오스럽기까지 한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아이러니와 이율배반으로 가득한 <군주>,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군주>는 통일 이탈리아의 불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불가능을 가능케 할 우연 또는 돌발을 희망한 마키아벨리의 수사 전략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그람시가 마키아벨리에 대해 내린 ‘조숙한 자코뱅주의자’라는 평가는 이 대목에서 ‘조숙한 루소주의자’라고 바꿔도 좋을 듯하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루크레티우스)의 독자, 고대 원자론의 신봉자인 마키아벨리는 운(포르투나fortuna)을 극복하는 군주(와 인민)의 역량(비르투virtu)조차 운에 얽매여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탈리아를 통합할 만큼 강하지 않지만 분열시킬 만큼의 힘은 있는 교황과 그의 가문이라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결의다.


<지배와 비지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지은이가 J. G. A. 포칵이나 퀜틴 스키너 같은 지성사가(특히 케임브리지학파)의 관점과 달리, 마키아벨리를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승자가 아니라 이기적 개인을 중심에 둔 새로운 공화주의자라고 해석하는 대목이다. (키케로가 대변하는) 정직과 신의 같은 공화국의 미덕이 아니라 ‘새로운 군주’의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이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관점이라는 해석이다.


‘오독을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텍스트’ <군주>는 바로 그 오독 가능성 때문에 끊임없이 읽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가 <군주>에서 ‘현대의 군주’로서의 정당을 끄집어낸 것은 <군주>가 새삼 대단해서라기보다 무솔리니의 마키아벨리 독해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했을 터이지만, 그것 또한 일종의 ‘생산적인 오독’으로 보인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를 ‘마주침의 유물론’ 또는 ‘우발성의 유물론’의 계보에 넣은 것도 같은 방식의 오독이다. 피렌체 공직에 복귀하기 위해 쓰인 <군주>는 마키아벨리에게 ‘실패한 자소서’였지만,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된 <군주>는 바로 그 아이러니 때문에 여전히 강력한 텍스트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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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말을 못하는 겁니다 - 일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말투와 목소리
이규희 지음 / 서사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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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서 장황하게 말해놓고 어딘가 찜찜할 때마다 펼쳐본다. 일머리 만큼이나 중요한 말머리를 키우려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 담겨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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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옥창준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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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을 지구사적 흐름으로 살피면서 ‘제3세계‘로서의 역사적 기억을 객관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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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옥창준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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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 아르네 베스타의 <냉전의 지구사: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에코리브르, 2020)를 읽었다. ‘냉전’과 ‘제3세계’를 탁월하게 연결한 저작이다. 지은이가 밝힌 대로 1970~1980년대의 제3세계 지역에 집중한 것도 옳은 선택으로 보인다. 민족해방의 열기가 어떻게 해방된 사회의 건설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더없이 잘 보여주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탈냉전’과 ‘신냉전’이라는 레토릭이 역사와 현실을 오히려 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전은 전후체제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았다. “’훨씬 더 강한’ 초강대국(물론 힘의 제한은 있었지만)과 다른 초강대국 간 대결(646쪽)”이었던 시기로서 냉전은 끝났다. 하지만 ‘자유의 제국’(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제3세계 전반을 조정하려는 경향과 그로부터 비롯된 개입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냉전은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미중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냉전 질서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자유민주주의 vs. 권위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설정 또한 마찬가지다(반공주의로서의 자유민주주의). ‘정의의 제국’ (지은이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평등의 제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련은 미국과의 군비 경쟁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무너졌다. 고르바초프가 레닌주의의 이상에 충실하고자 했기에 소련의 해체를 가속화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여전히 냉전의 한복판에 놓여 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고도경제성장을 이룬 (그러나 때로 미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찾으려 했던) 한국인은 자국의 특수성과 예외성에만 눈을 돌려왔다. 냉전을 지구사적 흐름으로 살피면서 역사적 기억을 객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그런 의미에서 남북한은 여전히 ‘제3세계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작업에 큰 도움이 된다. 옮긴이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제3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이 개입한 결과는 진정으로 암울했다. 미국은 선한 세력(미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게 믿었겠지만)이 아니었으며, 미국의 급습은 많은 사회를 황폐화시켰다. 제3세계는 스스로 초래한 일의 결과로 향후 재난에 취약해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미국이 생각했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안정적 조합은 남한과 대만이라는 두 반쪽 국가에서만 가능했으며, 1945년부터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약 30개국에 이르는 나라에서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 성적표가 보여주는 인간적 비극의 결과는 적에게든 친구에게든 심대했다. 게다가 이는 많은 국가에 여전히 진행 중인 비극으로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까지 파괴하고도 남을 지뢰와 그 밖의 무기가 배치되어 있는 상태다(647~6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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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 - 인터뷰와 지도제작
릭 돌피언.이리스 반 데어 튠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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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신유물론이 ‘사유의 스타일‘이라고 지나가듯 언급한다. 이 표현은 신유물론으로 묶이는 이론적 담론에 대한 메타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신유물론이라는 상품의 카피 역할을 한다. 신유물론은 늘 새로움을 요구하는 시장의 논리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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