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니바퀴와 괴물 - 경제학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다이앤 코일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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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는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 읽기를, 토요일에는 다이앤 코일의 《톱니바퀴와 괴물》 읽기를 마쳤다. 《어둠의 심장》에 대해서는 오래전 힘겹게 읽었던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 중 콘래드 부분(〈5장. 로맨스와 사물화: 조셉 콘래드에서 플롯 구성과 이데올로기적 봉쇄〉)을 다시 읽고 리뷰를 쓰는 게 좋겠다.


다이앤 코일의 《톱니바퀴와 괴물》(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3)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충격 속에서 예비되고 쓰인 책이다(지은이가 2012년부터 2020년 사이에 했던 강연을 바탕으로 개고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지은이는 주류경제학의 세례를 받은 경제학자로 보인다. 하지만 지은이 스스로 밝혔듯이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기에(영국 재무부 소속 경제학자로 이력을 시작해 《인디펜던트》의 기자로 일했고 BBC 신탁 부위원장, 영국 경쟁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맨체스터대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과거의 이론에 경도되지 않고 보다 실질적이면서 현실에 바탕을 둔 교육과 정책 수립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는 경제학과 경제학자에 대한 힐난(“경제학자들은 현실을 너무 몰라.”)을 되받아치는 한편, 경제학과 경제학자가 놓치는 부분(“경제법칙은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아.”)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 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경제학의 수행성(performativity) 또는 반영성(reflexivity)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했는데도 경제학자들은 이를 면밀하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경제학자들은 행동주의를 이론 틀에 수용하긴 했어도(행동경제학), 신고전학파 또는 한계효용학파의 전제인 수확 체감의 법칙(생산을 위한 요소의 투입이 지속될수록 생산량이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에 여전히 매여있어 수확 체증의 법칙(생산을 위한 초기 투자액은 크지만 한계생산비용이 0에 수렴하는 경향)이 강하게 작동하는 디지털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경제이론이 글로벌 금융위기와 팬데믹, 디지털 경제와 인공지능의 부상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보다 강하게 말하면 ‘정세[conjoncture]’)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은 ‘그저 이론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학은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기업(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국가와 자본)에서 정책과 경영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현실을 더욱 나쁜 방향으로 주조할 것이기에, 지은이는 경제학이 보다 나은 측정 기준(metrics)을 고안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류경제학의 철학적 전제인 공리주의, 방법론적 개인주의, ‘분리 프로토콜(경제학을 사실에, 철학을 당위의 자리에 올려놓고 경제학이 공평무사한 사실을 다룬다고 간주하는 태도)’, 개인을 톱니바퀴에, 사회를 기계장치에 빗대는 은유, 일종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상호 의존성과 자기 반영성이 강한 디지털 경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때, 그리고 그동안 뒷전으로 밀려났던 후생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부활시킬 때 금융위기와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보다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이를 집약하는 용어가 바로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다. 지은이는 오래된 용어인 정치경제학의 부활을 제안함으로써, 경제학이 ‘사실’에 입각한 (기술적인[technical]) 학문이 아니라 공공의 의무를 다하는 (정치적인[political]) 학문임을 천명한다.


《톱니바퀴와 괴물》은 지은이가 경제학계 ‘내부’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지은이는 경제학자가 현실의 ‘외부’에 있을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는 걸 덧붙여야겠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을 사회문제의 태풍의 눈으로 보고 연구했던 사회학자, 인류학자 들의 연구가 어느 정도 학계에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단적으로 지은이는 경제학의 수행성을 이야기하면서 도널드 매킨지(Donald Mackenzie)의 연구(《카메라가 아니라 엔진이다: 금융모델은 어떻게 시장을 형성했는가(An Engine, Not a Camera: How Financial Models Shape Markets)》 등)를 직접 언급한다.


디지털 경제의 행위자들이 톱니바퀴(Cogs)가 아니라 괴물(Monsters)이라는 지은이의 은유는 미셸 칼롱(Michel Callon)이 〈경제적 시장이 사회적인 것의 증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소고(An Essay on the Growing Contribution of Economic Markets to the Proliferation of the Social)〉에서 다룬 ‘사회적인 것의 증식’과 ‘호모 이코노미쿠스 2.0’에 상응한다(매킨지와 칼롱은 브뤼노 라투르, 존 로 등과 함께 행위자연결망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을 구성하는 데 기여한 [ANT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인간 행위자들’이다). 수행성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측정 기준 또는 계측학이라는 문제로 넘어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론의 구축이 현실의 구축으로 직결된다는 것이 수행성 개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지은이는 ‘실질 GDP[real GDP]’의 관념성/비현실성을 지적하는 한편, 경제를 계측할 새로운 척도를 개발해야 할 필요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1장만 잘 넘어가면 2장부터는 비전공자도 비교적 순조롭게 읽을 만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6장에서 사회주의 계산 논쟁을 언급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완벽한 계획경제를 달성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소화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은, 기술진보를 ‘진보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희망을 유보시킨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계산이라는 관점에서 시장경제 옹호자와 계획경제 옹호자가 같은 전제를 공유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하나 보크만의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냉전시대 경제학 교류의 숨겨진 역사》[홍기빈 옮김, 글항아리, 2015] 또한 참고할 만하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잘 읽히게끔 다듬어졌고 주석도 비전공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이 덧붙인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reflexivity를 ‘반영성’이 아니라 ‘반성성’으로 번역한 것과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국가경제학’으로 번역한 것이 그렇다. 전자는 ‘반영’이라는 개념을 놓치고, 후자는 《자본(론)》의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강신준 교수의 주장에 의지하는 바람에 지은이가 사회 참여적인 경제학의 부활을 제안하는 뉘앙스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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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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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예전에 북스피어판을 읽어서 패스. 표제작 <숨>은 문장이 정갈하니 아름답고,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각각 시간여행과 다세계 해석을 명민하게 풀어낸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매체이론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볼 단편이다(또한 이 단편에는 우리 기억의 왜곡과 일그러진 자아상을 냉정하게 돌아봄에 따른 섬뜩함이 따라붙는다). 늘 그렇듯 김상훈 선생의 번역에 많이 빚진다.


선집에 일관된 문제의식은 자유의지로 보인다. 우리가 물리적 객체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주체인 것은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이 제아무리 허구더라도 우리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우리가 해야 할 일>, 95쪽)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테드 창의 소설을 하드 SF라는 범주로만 독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테드 창은 기술진보 속에서 인간이 겪는 딜레마를 신중하고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결국 소설은 인간이 쓰고 읽는다는 것, 그것을 깊이 인식하고 쓴다는 것에 테드 창 소설의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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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 모세 - 서구 유일신교에 새겨진 이집트의 기억 프리즘 총서 1
얀 아스만 지음, 변학수 옮김 / 그린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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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그 사람 모세와 유일신교>에 대한 유대인 이집트학자의 긴 주석.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의 기억에 천착하는 이 책은,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제공한 건 다름 아닌 우리 유대인이 아닌가 라는 저자의 인식을 드러낸다. 역사(또는 역사적 기억)란 고통(트라우마)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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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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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송이버섯의 상품화 회로를 길잡이 삼아 그에 연루된 다양한 배치(또는 연결망)를 명민하게 탐색한, 여러모로 ‘올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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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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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로웬하웁트 칭의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노고운 옮김, 현실문화, 2023)는 이제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린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간이 망쳐놓은 세상에도 어떻게 생명이 자라나고 생존할 수 있는지를 면밀하게 탐색한 민속지다. (보통은 작가거나 신문 기자, 편집자인) 눈 밝은 독자들이 이 책의 존재를 알아보고는 기꺼이 ‘올해의 책’으로 올려놓고 있다.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잠식당해 죽어가는 지구’라는 이미지에 절망하기보다, 폐허가 된 산업비림 속에서 더욱 잘 자라는 소나무와 공생하는 송이버섯(트리콜로마 마쓰타케)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인간 대 비인간, 문명 대 자연이라는 이분법을 가로지르려는 서술이 그 어떤 대안보다 희망적으로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지은이는 ‘협력적 생존’이라는 말로 독자들을 송이버섯의 세계로 이끄는 데 성공한 듯하다).


많은 독자가 지적하듯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내부이자 외부인 ‘주변자본주의적(pericapitalist)’ 장소가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적인 공간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송이버섯이 보여주듯, 인간이 인위적으로 생산할 수 없고 자본주의적 생산 회로에 편입될 수 없는 생명체라도 자본주의라는 ‘번역 기계’를 통해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이야기한, “언뜻 보면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으로 보이지만 “형이상학적인 교활함과 신학적인 변덕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인)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채집인으로서, 중간 구매자로서, 수출업자로서, 또 도매상과 소매상으로서, 마지막으로 최종 소비자로서 소나무-송이버섯의 연합 또는 ‘배치(assemblages)’에 개입하고, 그 자체로 송이버섯의 상품화 회로라는 배치의 일부로서 움직인다[비록 최종 소비자의 손에서는 ‘선물(gifts)’로 쓰인다고 하더라도]. 애나 칭은 그 과정을 특정한 도덕감정 없이 되도록 담담하게 기술하며, (도나 해러웨이와 마릴린 스트래선과의 지적 연결망 속에서) ‘패치(patches)’ 또는 ‘패치성(patchiness)’이라고 부르는 ‘부분적인 연결(partial connections)’의 배치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세계 끝의 버섯>은 내용적으로 이종간 얽힘(interspecies entanglements)을, 형식적으로 학제간 연구를 다루지만 여전히 인류학적 저작으로 남아있다. 이는 송이버섯 채취에 연루되어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미국 오리건주의 미엔인과 몽인 등을 비롯해, 버려진 숲에 개입하는 일본의 마쓰타케 크루세이더스, 중국 윈난성의 츄슝이족 등)의 생활을 노련한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살펴보는 대목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때 여러 인간과 비인간, 공식적 지식과 비공식적 지식을 가로지르는 것은 지은이가 여러 차례 강조하는 ‘불확정성(indeterminacy)’과 ‘불안정성(precarity)’이다. 지은이의 관점을 요약하자면, 우리의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모두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잠식당했다고 느낄 때, 바로 이 두 가지 조건이 이 책의 부제인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물론 단일한 진보의 서사를 거부하는 지은이는 마르크스에게서 ‘소외’ 개념만을 뽑아내려 할 뿐, 어셈블리지 이론 같은 동시대 이론적 담론의 자장 안에서 작업한다. 그렇기에 애나 칭은 ‘인식(cognition)’이 아니라 ‘알아차림(noticing)’을 강조하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라 할 만한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은 지금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조건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여기서 나는 지은이가 ‘알아차림의 기술’이라고 칭한, 진보에 대한 서사 없이 현재를 직시하는 태도를,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여전히 불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유효한 ‘인지적(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기술(techniques of cognitive mapping)’로 바꿔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 책을 ‘포스트휴머니즘 인류학’의 표본으로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을 넘어서.


“내가 여러분에게 버섯을 건넬 순 없지만, 나를 따라 이 프롤로그 서두의 시에서 예찬한 ‘가을 향기’를 음미해보길 바란다. 이 향기는 일본에서 매우 귀히 여기는, 향이 진한 야생 버섯인 송이버섯 냄새다. 송이버섯은 가을의 상징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 냄새는 여름의 풍요를 상실한 슬픔을 환기시키지만, 가을의 날카로운 강렬함과 고조된 감수성 또한 불러일으킨다. 전 지구적 진보의 풍요로운 여름이 끝날 때, 이러한 감수성이 필요할 것이다. 가을 향기는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부재하는 보통의 삶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 책은 20세기에 안정성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던 근대화와 진보의 꿈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나보다 앞서 많은 분석가가 이미 그러한 꿈을 분석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그런 꿈에 기대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 같이 알고 있다고 여겼다. 이제 내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근대화와 진보의 꿈에 대한 비판 대신, 그런 발판 없이 사는 삶에 상상력을 동원해 도전해보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송이버섯 진균이 갖는 매력에 마음을 연다면, 송이버섯은 우리를 호기심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호기심이야말로 불안정한 시대에 협력해 생존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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