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2033 유니버스 : 지하의 노래 - 상 메트로 2033 유니버스
쉬문 브로첵 지음, 김윤희 옮김 / 제우미디어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한 동안 종말은 냉전 시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미국과 소련이 팽팽하게 대치하던 그때, 사람들은 언젠간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해 전 세계가 핵폭발로 불바다가 되리라는 상상을 떨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지하에 벙커를 만들고 식료품을 준비해 머지않을 파국에 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자 제3차 대전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고(또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던 이들은 억압적인 체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여겼고) 더 이상 파국적인 전쟁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배반당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것 같다. 한 동안 유행했던 '역사의 종말' 혹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았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퍼진 지금, 역사는 갈 곳을 잃은 채 공허한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억압과 폭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국지적인 규모로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라고 믿었던 것이 또다시 디스토피아임이 밝혀졌을 때, 특히 국가가 통째로 증발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구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이 자신들의 앞에 놓인 '자유로운' 체제가 다시금 자신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쉬문 브로첵의 『메트로 2033 유니버스: 지하의 노래』는 국내에서 잘 알려진 게임 <메트로 2033>과 그 원작인 소설 『메트로 2033』을 기본 골격으로 한 확장 이야기 중 하나다. 이 '확장 이야기'라는 게 흥미로운데, 게임에 확장팩이나 DLC가 있는 것처럼 소설에도 부가 에피소드를 붙이는 것이다. 영문 위키백과를 보면 universe of metro 2033이라는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이고, 항목 안의 도서목록을 보면 수십 권의 메트로 2033 확장 소설이 나와 있다. 저자들은 주로 러시아 사람들이고 그들의 소설은 러시아의 주요 도시인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그 등을 주 무대로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이 밀라노 같은 이탈리아 도시를 무대로 한 소설도 있다(어째선지 한국을 제외하고는 메트로 시리즈는 대부분 동유럽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확장 세계관'에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수십 권의 소설이 나올 정도일까. 그건 지하철만이 우리의 세계가 되리라는 황폐한 세계관이 갖는 매력 때문은 아닐까. 


  세계가 핵전쟁으로 파괴되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하철 안으로 대피하고 난 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는 지하철뿐이 되었다. 지하철역은 일종의 도시국가가 되었고 역과 역 사이에는 교류도 있지만 분쟁도 발생해, 급기야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뒤죽박죽이 되어 사실과 전설이 뒤섞인 채 그나마 과거를 희미하게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나돌 뿐인 세계. 이런 황량한 세계가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인기를 얻는 것은 아마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태와 구소련의 붕괴라는 역사적 외상(트라우마)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후쿠시마 사태 이전까지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발전 사고로 기록되는 체르노빌은, 오늘날에 와서는 일종의 '종말 관광지'로 부각돼 전시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체르노빌을 통해 우리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어렴풋이 엿본다. 불타버린 인형,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 녹슨 철골을 드러내는 폐허들. 여기에 구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에 이은 자본주의 국가의 출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기대했지만, '가진 자들의 자유'만이 보장된 세상. 그러니까 이미 파국을 겪은 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파괴된 세계의 가장 새로운 버전이 '메트로 2033 유니버스'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러시아 지하철이 핵전쟁에 대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동유럽의 대지를 밟는 이들에게 그보다 더 가까운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하의 노래』는 원래 제목이 '피테르'라고 한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이면서 오늘날에도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그를 배경으로 하기에, 페테르부르그의 약자인 '피테르'를 제목으로 삼은 듯하다. 원서가 두꺼운지 상,하권으로 나누었는데 상권에는 주인공이 메트로의 전쟁에 휘말리고 음모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가 간신히 살아나오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지상의 폐허를 오가며 쓸 만한 물건을 가져오거나 방사능으로 오염된 돌연변이와 싸우는 '헌터'인 주인공 이반은 결혼을 약속한 연인에게 줄 선물을 구하러 버려진 역에 갔다가 곤경을 겪는다. 이반은 위험을 무릅쓰고 선물을 구해 돌아오지만, 자신의 역에서 발생한 수수께끼의 사고로 인해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상권은 주로 메트로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극중 묘사를 보면 볼수록 대체 페테르부르그의 메트로가 얼마나 클지 궁금해졌다. 전형적인 클리셰도 조금씩 보이지만, 이국적인 분위기와 문체, 속도감 있는 전개 덕분에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권에서는 페테르부르그 메트로가 좀 더 상세히 드러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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