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처네 (반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막연히 글을 쓰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 생각했다. 각 글에 맞는 원칙이라며 세운 구호는 -‘시는 거짓됨없이, 소설은 치밀하게, 수필은 깊은 마음을 담아’다. 수필이라면 내 시선이 담기고, 그 시선에서는 분명 깊은 마음이 자연스레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접한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는 지은이의 깊은 마음을 넘어선, ‘깊은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처음엔 바쁜 시간을 쪼갤 자신이 없어 침대 맡에서 읽었다. ‘누비처네’의 뜻이 뭘까, 생각하다 스르륵 잠이 들면 꿈 속에선 자연스레 평안한 그림들이 그려지곤 했다. 감각을 곤두서게 하는 세련되고 산뜻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읽고 읽을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서 자꾸 더 읽게 되는 수필이었다.

 

오늘은 몇몇 편을 소리 내어 읽었다.

<누비처네>를 읽는데 드문드문 목이 잠기더니 결국 혼자 울어버렸다. 회사 일이 위태하여 첫째가 태어나도 얼굴 한번 비추지 못하는 아비가 있고, 그 아비에게 몰래 소액환을 부쳐 면을 세워주는 아비의 아비가 있다. 푸른 달빛을 흠뻑 받으며 걸어가는 길에 새 누비처네가 있고 누비처네에 쌓여 키득거리는 간난 아이가 있고 아이를 업은 어미가 있으며 단란한 그 행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아비가 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과거 언젠가, 꼭 내 할아버지가 그러셨을 것 같고 아빠와 엄마가 그런 길을 한번쯤은 걸어보셨을 것 같았다. 아니 이 따뜻하고 정겨운 ‘누비처네 행렬’을 보며 어쩌면 지금부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을 두고 백의민족이라 하였던가. 하얀 한복 차림의 사람들을 아무리 떠올려보려해도 형광물질이 가득 들어가 눈이 부시게 하얀 양복 특유의 색감은 아닌 것 같다. 목 선생은 내가 쉽게 찾아내지 못한 ‘우리네’의 흰빛을 억새꽃 속에서 찾아준다. 정성과 인내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옷자락은 여인들의 마음이 보이고 그윽하게 빛이 나는 억새 마냥 따뜻하게 하얗다.

억새꽃의 흰빛은 냉담(冷淡)의 빛이 아니다. 내색은 않지만 견뎌 낸 자신을 고마워하는 조선 여인들의 마음이 깃들인, 메밀 짚을 태워서 내린 잿물에 바래고 또 바랜 무명 피륙 같은 흰빛이다.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강변 자갈밭에 길게 펼쳐 널은 흰 무명필을 본 사람은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무명필이 널리기까지의 길쌈 공정과 앞으로 홍두깨 다듬이질을 거쳐 옷이 기워지기까지 남은 침선 공정(針線工程)이 얼마나 여인네들의 노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순전히 남정네들의 자긍심을 남루하게 둘 수 없는 여인의 마음, 억새꽃 빛깔에서는 그런 마음씨가 느껴진다. (p.52-억새의 이미지)

 

기억 속에 마음 떨리게 한 소녀가 있다. 순임, 그녀에게 쇠똥을 줍게 한 문경 양반이 밉다. 들꽃같은 아이에게 쇠똥이라니. 저도 모르게 정이 뚝 떨어졌다.

쇠똥을 줍던 순임의 몸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그게 늘 궁금했다. 순임에 대한 내 유년의 애틋한 마음을 상실한 것은 쇠똥 때문이었다. (p.188-꽃 냄새)

그러던 어느 날 열여덟 혹은 열아홉 아이 둘이 좁은 논둑길에서 스친다. 순임에게선 들깻잎 냄새와 여자의 냄새가 났다. 꽃 냄새 같은 은은한 방향(芳香). 이제 순임에게 따라붙던 쇠똥의 기억은 사라질 수 있을까. 저자는 뒤늦게 알게 된 사실 하나를 읊조리며 순임을 기억한다. 쇠똥이 미량일 때는 꽃 냄새 같은 향기가 나더라며. 논둑길에서의 그 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젊은 날, 골목 어귀에 도착하면 가슴에 안기는 안도감에 나는 턱없이 행복했다. 팔소매에 토시를 끼고 하루 종일 공문서를 작성하다 늦은 밤에 돌아오는 가난한 도청 서기의 처지에 개선장군처럼 마음이 격앙되어서 구멍가게에 들러 라면땅이라든지 새우깡 한 봉지를 사 들었다. 반드시 우리 애들을 주겠다는 마음도 아니다. 빈손이 부끄러워 서 든 전리품 대용이다. 뉘 집 애라도 만나면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밤이 늦어서 골목 안에는 애들이 없었다. 집에 들어와서 곤히 잠든 내 새끼 머리맡에 놓곤 했다. (p.443-동구)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마음은 그랬던 거구나. 누구이건 만나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떨쳐낸 기분 좋은 가뿐함을 나누고 싶었던 거구나. 내 아버지도 그랬던 걸까. 자꾸 마음이 두둑하게 불러온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익숙한 거리-동구에 다다르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던 이상한 기분도 실은 ‘마을 어귀’ 특유의 포근함 덕분이었구나.

 

산등성이 들판을 보면서 이젠 나도 소년을 떠올리고, 미처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어린 소년이 자꾸 ‘나’를 기다렸듯이.

봄에 산나물을 뜯으로 육백마지기에 올라가면 소년이 멀리서 호각을 불면서 산토끼처럼 달려와서 “나는 산감 아저씬 줄 알았잖아”하고 시무룩해서 내가 일러준 대로 산불조심을 당부하더라는 것이다.(p.133-약속)

황사가 ‘바람꽃’으로 보이는 그 어린 소년에게 왜 그는 돌아가지 못하였나.

 

책을 읽다가 잘못 제본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연암서가’쪽으로 메일을 따로 보냈다. 바람꽃이 부는 들판을 쏘다니는 소년인양 이제나 저제나 답 메일을 기다렸는데. 마침 연락이 왔다. 인쇄가 되면서 아예 긴 부분이 잘못되었노라며 수정된 본문을 첨부해주었다. 하마터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글을 읽을 뻔 하였는데, 돌아온 메일의 글을 붙여 읽어나가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들어왔다. 오래 달인 곰국처럼 뿌우연 진국이 우러나왔다. ‘그래, 이것이 목성균 선생님의 수필답지!’ 목 선생의 수필을 알게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그 맛을 알아본다.

 

수필에게서 날카롭고 참신한 맛만 느낀다면 한 사람의 작품을 오래 읽지는 못할 것이다. 참신함이 머릿 속의 쨍-하고 깨울 수는 있어도 여러번 만나다보면 지치게 될지 모르니까. 한 편 두 편 읽어나갈수록 쓴 사람의 일상이, 인생이 우러나와야지, 그 깊이가 한없이 깊어지는 걸 느껴야지 오래두고 곱씹을 수 있지 않을까. 목성균 선생님의 수필집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언제고 펼쳐 깊은 향기와 맛을 음미할 수 있을 테니까. 구질구질하게 낡은 ‘누비처네’에서도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행복한 달빛을 떠올리는 사람이...나, 될 수 있을까?

 




p.s. 연암서가의 답 메일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마침내 만나야 할 ‘아저씨’를 만났다면 ‘소년’이 이 기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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