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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평점 :
<분홍 리본의 시절>, 오랜만에 읽은 한국 소설이다.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는 게 아까워 하루에 한 편씩만 읽을 수 있었다. 예전부터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던지라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서점에 나가 앞부분을 읽어보고 사서 읽어야지 했다. 첫 번째 작품을 읽으면서 내용이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마구 흘렀다. 그리고 이 작가다, 싶었다. 솔직히 작품성에 대해 평을 하라면 굉장히 잘 쓴 작품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 작품을 다 읽었지만 서사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나버리면 어떡하란 말인가, 뭔가 미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쓰려면 정말 엄청난 에너지가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느꼈을 때만 나올 수 있을 듯한 비유의 문장들은 그 미진하다는 느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권여선의 작품에서 서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여름 한낮의 시장 거리는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 그녀가 길바닥에 쓰러져 너울거리는 공기 너머로 본 것은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긴, 이를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이었다."
"남자는 이유를 말하는 대신 햇반 두 그릇을 넣고 일회용 숟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이건 뭐 김치볶음밥이 아니라 김치 찜밥이 되겠네,라고 투덜거렸다. 떡처럼 켜를 이룬 밥 밑에서 김치가 지글거리며 타는 냄새를 풍겼다. 경이로운 냄새였다."
도대체 '아름다운 순댓국 같은 풍경'이라니. '경이로운 김치볶음밥 냄새'라니. 이런 말들을 쏟아내는 권여선의 시선이야말로 경이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한 편 한 편 읽어나갈수록 조금 실망스러워졌다. 앞부분과 같은 독특하고 신선한 비유라든가 인간에 대한 신랄하고 깊이 있는 조망 같은 것이 점점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권여선은 계속 권여선이어서 한 편씩 감탄하며 마지막 장을 덮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직 이 책으로밖에 권여선이라는 작가를 만나지 못했지만 내가 계속 권여선을 읽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읽을 작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만큼, 그 작품들도 조금씩 아껴 읽어야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권여선은 나에게 고마운 작가가 되었다. <분홍 리본의 시절>은 두고두고 아껴가며 몇 번씩 다시 읽는 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