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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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장면을 읽어줌으로써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세상이 좋아져 멀리 살아도 가족들 보러 자주 오는데 넌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냐는 볼멘소리가 들릴 때 난 <후남아, 밥 먹어라>를 읽어주고 싶다. 사촌 동생이 다가오는 봄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나의 부재는 무관심이 아닌 외로움 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명절이 아니어도 자주 만날만큼 친척들과 사이가 좋았다. 엄마는 육 남매 중 다섯째고 아빠는 그보다 형제가 더 많아 가족들이 모이면 늘 잔칫날처럼 시끌벅적했다. 이제는 돌아가신 분이 많지만 사촌의 결혼으로 불어난 가족과 조카뻘 되는 아이들 또한 수십 명이라 챙기려 들면 챙겨야 할 식구들이 엄청나다. 하지만 난 이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이름도 몰라, 결혼식에 가도 이모와 외삼촌 말고는 누가 누군지 하나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일가친지와 친구들의 경조사를 꽤 오랫동안 챙기지 못한 채 살았기에. 겸사겸사 한 번 들를까 싶다가도 망설여진다. 주변에선 집에 가서 가족들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쉬다 오면 되지 주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젓지만, 문제는 거기다. 집.

박완서 작가의 단편 <후남아, 밥 먹어라>에는 이런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소설은 ˝그리움을 위하여˝, ˝그 남자네 집˝ 외 여섯 편의 단편과 함께 <친철한 복희씨>에 수록돼 있는데, ˝공항엔 달랑 조카며느리 혼자 마중나와 있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 속, 후남은 오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나 미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누나의 초청을 받아 이민 간 남자를 만나 미국땅으로 시집갔다. 앤이란 영어 이름으로 불리며 살지만, 피붙이로부터 잊혀질까봐 작은 거라도 기념될 만한 날엔 선물을 보내고, 시시때때로 안부를 챙긴다. 그렇게 조카들의 신상은 물론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환히 꿰뚫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며 살다가, 아버지 부음 소식에 들어간 한국에서 시끌벅적한 환영을 받는다. 매일 같이 진수성찬만 먹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지만, 기운이 나기는커녕 자신의 살림살이며 남편까지 시들시들해지고 피곤증만 깊어지고, 우울해진다. 그러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한국을 찾는다. 치매 앓고 있는 어머니와의 재회장면은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특히, 딸을 못 알아보면서 오락가락한 정신으로도 딸을 위해 밥을 짓고 딸의 이름을 부르며 밥 먹으라고 하는 장면.


“후남아, 밥 먹어라. 후남아, 밥 먹어라.”
어머니가 저만치 짧게 커트한 백발을 휘날리며 그녀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 저 소리, 생전 녹슬 것 같지 않게 새되고 억척스러운 저 목소리, 그녀는 그 목소리를 얼마나 지겨워했던가. 밖에서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나 동무 집에서 같이 숙제를 하고 있을 때도 온 동네를 악을 악을 쓰면서 찾아다니는 저 목소리가 들리면 그녀는 어디론지 숨고 싶었다. 왜 그냥 이름만 불러도 되는 것을 꼭 밥 먹어라는 붙이는지. 하긴 끼니때 아니면 찾아다니지도 않았으니까 그 소리가 꼭 끼니나 챙겨 먹이면 할 도리 다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침에 늦잠 자는 그녀를 깨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늦겠다 어서 일어나라 하면 될 것을 꼭 후남아 밥 먹어라로 깨웠다. 급한 건 학교가 아니라 밥이라는 듯이.
(...)
녹물은 안 들었는지 몰라도 밥 뜸 드는 냄새에는 무쇠 냄새도 섞여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연기가 벽의 균열을 통과하면서 묻혀온 흙냄새도, 그 모든 냄새와 어우러진 밥 뜸 드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아 이 냄새, 이 편안함, 몇 생을 찾아 헤맨 게 바로 이 냄새가 아니었던가 싶은 원초적인 냄새, 이열치열이라더니 음식 때문에 뒤집힌 비위를 부드럽게 위로하는 이 편안한 냄새. 어머니는 왜 아무 연고도 없는 이리로 왔을까. 나는 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이 냄새가 왜 이렇게 좋은가. 어머니는 셋째딸을 낳을 때 또 딸일까봐 산파 비용 아끼려고 쌀 한 말을 이고 시골 친정집에 가서 몸을 풀었다고 한 적이 있었다. 외가는 가난했고 외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그녀는 철나고 한 번도 외갓집이라는 데를 가본 적이 없었다. 난 혹시 이런 집 이런 방에서 이 세상 첫 빛을 본 건 아니었을까.
“나 안방에 조금 누웠다가 밥 먹으면 안 될까.”
“그랴그랴, 몸 좀 녹여라. 뺨이 시퍼렇다. 밥 좀 눌으면 어떠냐. 무쇠솥에 눌은 밥은 별미야. 요샌 시골서도 그런 밥 잘 못 얻어먹어. 야아네서도 전기밥솥을 통째로 들고 왔잖냐.”
후남이는 알맞게 부숭부숭하고 따끈한 아랫목에 편안히 다리 뻗고 누웠다. 그리고 평생 움켜쥐고 있던 세월을 스르르 놓았다. 밥 뜸 드는 냄새와 연기 냄새와 흙냄새가 어우러진 기막힌 냄새가 콧구멍뿐 아니라 온몸의 갈라진 틈새로 쾌적하게 스며들었다. 잠깐만, 어머니가 후남아 밥 먹어라, 다시 한번 불러줄 때까지 잠깐만 눈 붙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지리라. (138~141쪽에서)


한국에 가면 난 여행자도 거기 사는 사람도 아닌 목적지도 없이 떠도는 부랑자처럼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빌어먹다, 미안함과 외로움만 안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설 속 후남이 연고가 없는 낯선 곳, 낯선 냄새도 편하게 느껴진 건 엄마란 존재가 주는 따뜻함 때문일 거라고 중얼거렸다. 공항에 나와 두 팔로 나를 반겨주지 않더라도, 내 이름을 부르며 끼니를 챙겨주는 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 집이고 고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음식냄새와 함께 들려오는 ‘후남아, 밥 먹어라.‘ 이 보다 더 따뜻한 환대가 있을까? 따스한 방바닥에 이불을 덮고 들어가 엄마가 내 이름을 불러 줄 때까지 쉬고 나면, 정말이지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 같은 기분, 이런 환대가 가슴 저리게 그립다.

‘한국와서 살면 좋을텐데...‘
매번 비슷한 마무리 인사에 이 장면을 빌러 낯섦과 외로움은 장소가 아닌 이런 부재에서 온다고 전할까 싶었지만, 가슴 아파할 것 같아 번번이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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