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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다" 미사를 드릴때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백인대장의 종이 병에 걸리자, 예수님을 찾아가서 말씀 드린다. "저희 집이 너무 누추하여 감히 예수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소서. 그리하면 제 종이 나을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감복하여 딱 한 말씀만 하신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그리자 집에 돌아가보니 종이 정말 깨끗히 나았다.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 기적의 말씀을 듣고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렇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당과 교회에 나가고 끊임없이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아쉽지만 없다. "왜 제 딸이 납치되어 살해되어야 했습니까? 그 작은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왜 그 아이를 구해주지 않으셨나요? 왜 그 악당을 벌하지 않으시나요?" 맥은 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한 말씀' 하신다. 오두막으로 오세요.
캠핑을 갔다가 막내 딸이 납치되어 살해당한 맥은 딸의 유해도 찾지 못 하고 딸의 피 묻은 원피스만을 오두막에서 발견한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신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살다가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오두막으로 오세요." 그에게 오두막이란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의 장소였다. 의심 반, 믿음 반의 마음으로 찾아간 그 곳에서 성부인 파파, 성자인 예수, 성령인 사라유를 만나 치유를 받게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직접 만나 오두막에서 주말을 함께 보내게 된 그 기적의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늘에 하느님이 계신데 왜 세상은 이 모양일까? 범죄자가 판을 치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연은 끊임없이 파괴되어 간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 과연 누구를 믿어야한단 말인가? 왜 예수님께서는 방관하고 계실까? 맥의 어린딸은 아무 죄도 없는 정말 순수한 아이였다. 하지만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그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그 작은 아이에게 일어날동안 신은 과연 무엇을 하셨나요? 왜 구해주지 않으셨나요? 힘든일이 생기면 우리는 손을 모아 기도 드린다. 구해주소서- 도와주소서- 구원해주소서- 하지만 신의 답변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구해주기 전에 스스로 구할 수 있는 힘과 기회를 주신다. 우리의 독립성을 위해서다.
미시의 죽음은 정말 슬픈일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슬픈일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신이 일일히 개입해서 모두 바른길로 인도한다면 그건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모든것이 우리가 바라는 데로 나에게 좋은 쪽으로만 흘러간다면 그건 삶이 아니다. 그저 한편의 영화 시나리오일 뿐이다. 미시를 잃은 맥의 마음은 이해가지만 그의 분노는 생각보다 적었다. 내가 맥이였다면, 예수의 얼굴을 본 순간 뺨이라도 한대 때려줄것 같다. 정말 그렇게 사랑하는 내 딸을 가져간 예수!! 얼마나 미운가. 그에 비해 맥은 참 쉽게 치유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책이라서 그런것일테지만, 맥의 분노와 원망은 너무 쉽게 치유되었다. 바로 그것이 예수의 힘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누구나 마음의 오두막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맥 처럼 사랑하는 이를 끔찍하게 잃었던 최악의 고통일 수도 있고 어제 본 중간고사를 망친 작은 고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것, 다른이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아픔과 고통의 순간에 신은 우리를 오두막으로 부르신다. 그 고통의 정점에서 우리는 치유 받을 수 있다. 왜냐면 살아있으니까!! 기도 드릴 수 있는 두 손과 마음이 있는 한, 그리고 그 것들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살이있기 때문에 서로를 용서하고 변화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 하지만 난 신의 존재를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고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싶다면, 더 많이 연구하고 파해치고 알아봐야 하듯이, 신을 더 알고 싶고 신에 더 다가가고 싶다면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의심한다고 해서 토라져버리는 그런 쪼잔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신의 존재 조차도 의심하고 연구하게 만드는 '호기심'과 '상상'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신, 바로 그 분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모든 의심과 고통을 안고 오두막에서 파파가 불러주시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