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철학이다 - 에이나 외버렝겟의 행복론
에이나 외버렝겟 지음, 손화수 옮김 / 꽃삽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가 있다. 윌 스미스가 실제 아들과 함께 촬영해 화제가 됐던 이 영화는, 한 가난한 남자가 노력끝에 증권사 직원이 되어 성공한다는 인생역전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갖은 고생을 겪고 마침내 증권사 직원이 된 윌 스미스가 아들을 찾아가 기쁨의 포웅을 하면서 끝난다. 그는 영화의 제목 그대로 행복을 찾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성공이었을까? 아니다. 그에게 행복이란 사랑하는 아들과 둘이서 발 뻗고 맘 편히 잘 수 있는 보금자리를 갖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의 행복은 결국 취업이었다. 번듯한 일자리를 갖는것이 행복의 시작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취업이 누구에게나 행복은 아니다. 누군가는 직장을 때려치우는 것이 행복이고 누군가는 이직을 하는 것이 행복일 수도 있다. 이렇게 100명의 사람이 100가지의 각기 다른 행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다르게 생각하는 소원과 희망이 어떻게 '행복'이라는 단  2글자안에 다 포함될 수 있을까?

작가는 "행복하세요?"라는 딸의 질문에 대부분의 어른들이 멈쩍은 웃음을 짓고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고 대답했다. 그만큼 행복이란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25452X394824는?"이라는 질문과도 다를게없다고 생각한다. 이 두 질문은 모두 어렵다. 알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정답은 있다. 그 정답을 아는 사람은 모든것이 명쾌하다.

모든것의 시작은 그것을 정확히 알아가는것에세 시작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행복을 알아야 한다. 행복을 잊고 사는것이 어쩌면 나을 수도 있다. 행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하고 행복은 그렇게 잡지 힘든것인데 굳이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불행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 아닐까?

하지만 살아있는 이상 행복하지 않고 싶은 사람은 없을것이다. 결국 행복은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가 가야하는 무수한 길과 선택 속에서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만을 선택할 수는 없다. 때로는 불행의 낭떨어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발을 헛딛어서 절망이라는 수렁텅이로 곤두박질치곤 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행복하기로 결심하고 선택한다면, 그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 바로 지금, 현재를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로만 거창한 행복. 사실 책을 읽고 행복의 명쾌한 정답을 알고 싶었지만, 과연 글을 쓴 작가는 행복한가?라는 의문만이 남게 되었다.

좋아하는 격언중에 이런말이 있다. "행복이란 손 닿는 데 있는 꽃들로 꽃다발을 만드는 솜씨다." 결국 행복이란 밖에서 떠돌다 집에 돌아왔을때 비로소 찾게 된 '파랑새'와도 같다. 보이지 않는 꽃으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는건, 기적이다. 하지만 보이는 곳에 꽃들로 꽃다발을 만들면 그건 행복이 된다. 멀리서 찾지 말것. 현재에 충실할것.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말것.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상투적인, 하지만 언제나 해답일 수 밖에 없는 이 진리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 2009 05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밀밭 파수꾼을 떠나며
조이스 메이나드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글은 글로써만 평가되어야 할까, 아니면 글을 쓴 작가의 이력과 함께 평가되어야 할까. 동시대부터 지금까지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으며 나 역시 가장 좋아하는 소설중에 하나로 꼽고 있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 J.D.샐린저에 대해 이러한 의문이 들었다. 은둔형 작가 샐린저에 대해서 세상에 알려진것이 별로 없다. 그저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유명 작가일뿐이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긴 작가가 50이 넘어서 10대의 어린 여자만 밝히는 소아성애자에 글로 젊은 여자들을 꼬셔 짧은 시간 동안 동거를 하고 내쫓아 버리는 사람인줄 알았다면 내가 그의 책을 읽었을까?

문학을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서 어린시절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조이스는 18살에 자서전을 '타임즈'에 실은 덕분에 수많은 편지를 받게 된다. 그 중에는 놀랍게도 당대 유명 작가인 J.D.샐린저의 편지도 있었다. 그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서히 사랑을 느낀 조이스는 예일대학도 중퇴하고 그가 사는 곳으로 날아가서 1년여동안 동거를한다. 하지만 편지로 접하던 사람과 실제의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샐린저는 모든 속세의 인연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영양소만을 섭취하며 세상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나이는 18살인 그녀보다 35살 많은 53살.

샐린저에게 버림받고 혼자 일어서기를 시작한 조이스는 그 후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세 아이를 낳고 이혼을 하게 된다. 책을 꾸준히 써서 생계를 유지하고 '투 다이 포'라는 작품은 영화화되어 니콜 키드만이 주연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평생 샐린저라는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의 편지는 늘 충고가 가득했지만, 자신은 조언자가 아니고 충고를 할 입장도 못 된다고 말했고 누군든지 당신을 이용하려 들거라고 쓰면서도 본인은 예외인것처럼 굴었다. 실은 그녀를 가장 철저하게 이용한 사람은 샐린저 본인이었는데 말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은 많은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읽은 소설중에서 홀든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를 발견한 일이 드물다. 그는 유쾌하고 재밌으며 그러면서도 내면에 패배자 정신이 가득하고 이 사회를 미워했다. 이 책을 읽고 홀든이 왜 그런 성격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것같았다. 홀든은 샐린저의 내면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긍정적인 부분만을 끄집어낸 인물이었다. 그의 편협된 시각도 말도 안되는 조롱도 10대이기 때문에 가능한것들이었다. 하지만 홀든이 그대로 자라서 50살이 된다면 그때는 샐린저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여전히 죽은 남동생과 어린 여동생만을 좋아하고 그 외의 모든 인간을 비웃지만 막상 그 앞에서는 아무말도 못하는 비겁자.

작가의 이력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파울로 쿄엘료와 공지영이 3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을 했거나 말거나, 아멜리 노통이 서양인이면서도 동양에서 자랐다거나, 작가의 이력은 알면 도움이 되고 몰라도 상관이 없는 그런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먼저 읽었다면 난 그 책을 좋아하게 됐을까? 누구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뜻하지 않게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을 뿐이다.

마지막까지 그의 사생활을 비밀로 지켜주리라고 다짐했던 그녀는 결국 모든것을 털어놓았다. 샐린저의 치부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어둡고 수치스러운 과거까지도 모조리 드러내보였다. 이 책을 씀으로 많은 이들의 비난과 협박에 시달렸던 작가도 이제는 정말 떠날때가된 것이다. 샐린저라는 환상에서도, 피해자라고 느꼈던 과거에게도, 모두 떠나 진정한 자신이 되는 길이다. 그녀는 그 시작을 이 책과 함께 열어나갔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생활은 지켜져야 하지만 그래, 이건 책일 뿐이잖아. 그녀는 샐린저의 단 한통의 편지도 실지 않고 단 한 문장도 그대로 따다 쓰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호밀밭을 떠나오길 바란다.

@ 2009 05 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큰 물고기
다니엘 월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죽음을 기다리는 한 남자가 있다. 거인과 대결하고 인어와 사귀었으며 맨손으로 사나운 개의 심장을 꺼내 소녀를 구하고 사람보다 더 큰 메기를 타고 수중세계를 여행한 남자. 입만 열면 무용담이 끊이지 않는, 누구나 좋아하는 그 남자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모두의 사랑을 받고 단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있다.

전 세계를 돌면서 수많은 모험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생에 단 한번 겪기도 힘든 불가사의한 일을 매일매일 겪은 남자는 병이 들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자신이 필요할때 곁에 없었던 아버지였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하면 늘 농담으로 피해버린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엄마와 자신을 남겨두고 전세계를 돌면서 신기한 경험을 하고 병이 들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와 손님방에 들어누운 염치없는 아버지가 미운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가 바랬던 것은 아들의 존경과 사랑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정보다는 단 한명뿐인 아들이 "아버지는 위대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해주길 바랬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하고 꾸며서 아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은 아버지의 그런 점을 오히려 싫어했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어떠한가. 그들도 우리에게 이렇게 위대해 보여지기를 바랬던가. 우리 스스로 아버지는 위대하다, 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나. 누구보다도 강하고 단단하며 항상 올려다봐야 하는 아버지를 바랬던 것도 사실이다. 알고 보면 아버지도 늙고 지치면 죽고 마는 보통 사람일 뿐인데.

애드워드는 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허무맹랑한 이야기들 뿐이다. 너무 빨리 달려서 출발하자마자 도착점에 도달해 있었다던지, 사람보다 큰 메기를 타고 호수 속으로 들어가니 그 곳에 사람들이 집을 집고 살고 있었다던지 하는 얘기들은 누가 들어도 믿지 못할 이야기들이다. 머리 두개 달린 기생, 몇사람의 키만큼 큰 거인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 모든 무용담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건은 그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스스로 아들에게 신화로 남기를 원했던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거면 족하다. 소녀를 구하기 위해 사납게 달려드는 개의 심장을 손으로 꺼낸 이야기는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라고 따질 필요 없이 아버지가 한 소녀의 목숨을 구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미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처럼 죽음마져도 드라마틱하게 맞이한다.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호수로 가서 '빅 피쉬'가 된다. 사람을 구하고 어부들에게 장난을 치기 좋아하는 큰 물고기는 그 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을테지만 사실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다.

우리들의 아버지들 또한 다르지 않다. 평생을 일과 책임으로 살아오다가 큰 물고기가 되어 떠나는 아버지들. 그들이 애드워드처럼 엄청나고 환상적인 무용담을 가지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는 과묵하고 무뚝뚝할 수도 있고 농담과 장난으로 진지함 따윈 찾아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빅 피쉬'이다. 그리고 한 세대의 빅 피쉬는 다음 세대에게, 또 다음세대에게 환상적이고 드라마틱한 세상의 문을 열어주고 호수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이 책의 쓰여진 모든 이야기를 믿도록하자. 아버지의 이름으로 눈을 감으면 그가 만났던 인어를 우리 또한 만날 수 있다.

@ 2009 05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다" 미사를 드릴때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백인대장의 종이 병에 걸리자, 예수님을 찾아가서 말씀 드린다. "저희 집이 너무 누추하여 감히 예수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소서. 그리하면 제 종이 나을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감복하여 딱 한 말씀만 하신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그리자 집에 돌아가보니 종이 정말 깨끗히 나았다.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 기적의 말씀을 듣고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렇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당과 교회에 나가고 끊임없이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아쉽지만 없다. "왜 제 딸이 납치되어 살해되어야 했습니까? 그 작은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왜 그 아이를 구해주지 않으셨나요? 왜 그 악당을 벌하지 않으시나요?" 맥은 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한 말씀' 하신다. 오두막으로 오세요.

캠핑을 갔다가 막내 딸이 납치되어 살해당한 맥은 딸의 유해도 찾지 못 하고 딸의 피 묻은 원피스만을 오두막에서 발견한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신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살다가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오두막으로 오세요." 그에게 오두막이란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의 장소였다. 의심 반, 믿음 반의 마음으로 찾아간 그 곳에서 성부인 파파, 성자인 예수, 성령인 사라유를 만나 치유를 받게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직접 만나 오두막에서 주말을 함께 보내게 된 그 기적의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늘에 하느님이 계신데 왜 세상은 이 모양일까? 범죄자가 판을 치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연은 끊임없이 파괴되어 간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 과연 누구를 믿어야한단 말인가? 왜 예수님께서는 방관하고 계실까? 맥의 어린딸은 아무 죄도 없는 정말 순수한 아이였다. 하지만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그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그 작은 아이에게 일어날동안 신은 과연 무엇을 하셨나요? 왜 구해주지 않으셨나요? 힘든일이 생기면 우리는 손을 모아 기도 드린다. 구해주소서- 도와주소서- 구원해주소서- 하지만 신의 답변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구해주기 전에 스스로 구할 수 있는 힘과 기회를 주신다. 우리의 독립성을 위해서다.

미시의 죽음은 정말 슬픈일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슬픈일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신이 일일히 개입해서 모두 바른길로 인도한다면 그건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모든것이 우리가 바라는 데로 나에게 좋은 쪽으로만 흘러간다면 그건 삶이 아니다. 그저 한편의 영화 시나리오일 뿐이다. 미시를 잃은 맥의 마음은 이해가지만 그의 분노는 생각보다 적었다. 내가 맥이였다면, 예수의 얼굴을 본 순간 뺨이라도 한대 때려줄것 같다. 정말 그렇게 사랑하는 내 딸을 가져간 예수!! 얼마나 미운가. 그에 비해 맥은 참 쉽게 치유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책이라서 그런것일테지만, 맥의 분노와 원망은 너무 쉽게 치유되었다. 바로 그것이 예수의 힘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누구나 마음의 오두막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맥 처럼 사랑하는 이를 끔찍하게 잃었던 최악의 고통일 수도 있고 어제 본 중간고사를 망친 작은 고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것, 다른이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아픔과 고통의 순간에 신은 우리를 오두막으로 부르신다. 그 고통의 정점에서 우리는 치유 받을 수 있다. 왜냐면 살아있으니까!! 기도 드릴 수 있는 두 손과 마음이 있는 한, 그리고 그 것들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살이있기 때문에 서로를 용서하고 변화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 하지만 난 신의 존재를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고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싶다면, 더 많이 연구하고 파해치고 알아봐야 하듯이, 신을 더 알고 싶고 신에 더 다가가고 싶다면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의심한다고 해서 토라져버리는 그런 쪼잔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신의 존재 조차도 의심하고 연구하게 만드는 '호기심'과 '상상'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신, 바로 그 분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모든 의심과 고통을 안고 오두막에서 파파가 불러주시길 기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자연에 순응하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며 번식하고 있는 인간에게 이런 말은 모순일 수 있다. 하지만 어쨋든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곳에는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의 품 같은 조건없는 사랑이 존재 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애인은 떠나버리고 회사는 다니기 싫고 아버지는 자살했고 어머니와는 사이가 껄끄럽기만한 리에. 일상의 도피처럼 '꿀벌의 집'으로 가서 양봉일을 시작하게 된다. 말 그대로 그 곳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모든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떠난 곳에서, 자연에서, 그녀는 치유를 받게 된다. 사람에 지쳤던 마음을, 서로에게 상처 주었던 과거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자연의 품안에서 치유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한다. 나이 들어서 은퇴하게 되면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 지으며 살거라고.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태어나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농사는 그 흙과 함께하는 작업이다. 누구보다 가까이 자연을 대하고 자연과 함께하면서 죽음에 다가서는 것이다. 끝이 아닌, 자연스러운 완성의 과정을 거치는것이 그것이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리에는 양봉을 통해서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언제나 규칙적인 메뉴얼에 따라 움직여야 했던 일상을 벗어나서, 룰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모든것이 변화 무쌍한 그 자연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곧 그 곳에 익숙해지게 되고 그 단조로운 일상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왜냐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 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싱글맘, 폭주족, 거식증 환자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보듬어 주고 치유하는 '꿀벌의 집'. 그곳에는 어떠한 처방과 약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했던 '일상의 고독'이라는 불치병을 말끔하게 치유해주었다.

나 역시 현대인이고 아침에 눈뜨고 일하고 저녁에 잠드는 일상을 살고 있다. 가끔 너무 일이 하기 싫고 날씨가 너무 좋으면 모든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 나무가 많고 동물도 있는, 그런 공기 좋은 곳으로 떠나버리고 싶다. 마천루가 하늘을 가리는 것이 너무 답답한 그런날, 우리는 자연을 꿈꾸게 된다. 그건 아마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회귀본능이리라.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됐을 정도로 벌은 무척 현명한 곤충이다.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면 관찰할 수록 그 경이적인 정교함과 섬세함에 신을 믿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털로 뒤덮인 노랗고 까만 작은 벌레에게 우리는 배울것이 너무나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