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토지 전12권 세트
박경리 원작, 토지문학연구회 엮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날 TV를 보다가 드라마로 시작된 '토지'를 보게 됐다.
십년이 넘은 예전에 드라마로 토지를 보고
그 이후 다시 십년 전 쯤 13권으로 묶여 출판된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드라마로 토지를 보면서 그 줄거리를 엮어나가지 못해
궁금한 이후 얘기를 참지 못하고 다시 책을 꺼내 읽었다. 

조금씩 기억을 떠올리면서 책에 다시 빠져든다.
전체 4부로 엮은 열세권의 책 중
평사리에서 어린 시절의 서희를 다룬 내용이 1부이다. 

근대화로 접어들면서 신분제가 철폐되었어도
봉건제도의 구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평사리 최참판댁과 마을 사람들.
한일합방이라는 시대의 국가적 변화보다
윤씨부인, 별당아씨, 최치수, 서희로 이어져오는 평사리의 지주,
최참판댁의 변화가 삶에 더 큰 영향을 받는 마을 사람들. 

동학우두머리 김개주의 죽음으로 시작한 죽음시리즈는
1부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최참판의 재산을 노린 몰락한 양반 김평산과
종의 신세에 분개하면서 신분상승을 노린 하녀, 귀녀에 의해
그들에 의해 살해된 최치수의 허망한 죽음.
최치수의 살해죄로 죽임을 당하는 위의 두사람과 씨를 빌려준 칠성.
아버지의 죽음 이후 서희를 지켜줘야 할
윤씨부인과 김서방, 봉순네의 괴정으로 인한 한순간의 죽음. 

죽음 외에 1부에 담겨진 중요한 얘기는
김개주와 윤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최치수의 배다른 동생, 환과 집을 나간 별당아씨,
서희 엄마로 인해 혼자 남겨진 서희와
중심을 잃은 최참판댁의 재산을 노린 먼 친척 조준구와의 갈등,
이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섭게만 성장해 가는 서희
이런 것들이다.  이외에...? 

1부의 마지막은 나라를 빼앗긴 나를 찾기 위해 의병으로 나선
일부 마을사람들이 싸움에서 패하고 다시 평사리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최참판댁에 버려진 서희와 함께 간도로 이주하면서 
배경을 평사리로부터 간도로 옮기고 있다. 

1부를 덮으면서 죽음이 가장 크게 머리 속에 남는다.
그 죽음에서 종이라는 신분을 벗고자 상전의 씨를 받았다 속이려다
상전을 죽이기 까지 한 귀녀를 나는 깊이 이해하고 있다.
다른 여인에게 보낸 남편의 마음을 견디지 못해
강탈을 부리고 강팍해진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음도 강팍하게 맞은 강청댁에게 아픈 동정을 느낀다.
비뚤어진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면서
시니컬한 지식인으로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만 살다간
최치수에게도 같은 외로움을 갖는다. 

토지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람들.
억척같은 임이네,
부드럽고 남을 해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실리를 버리지 못하는 이평,
잘난 외모로 섬세한 감성의 남자로 월선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한 채
강청댁을 멀리하고 자기보다 잘난 월선에게 위축되는 용이,
김평산의 아내 함안댁이 자살한 나무와 새끼를 챙겨더는 약삭빠른 봉기,
유림의 전형적인 인물 김훈장,
그 모두에게 나는 까닭모를 아픔과 이해와 공감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서희와
소설의 끝까지 서희와 함께 할 길상과 봉순은 또 어떤가. 

내가 속하지 않은 세상에 있는 이들이기에
그들이 가진 인간의 간악한 본성과 범죄에도 관대한 건 아닌지.
아니면 점점 세상이나 사람에 대해 관조만 하게 되는건지.
 

이후 드라마의 내용이 궁금해서 시작한
토지읽기는 드라마와 무관하게 계속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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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불연속 -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共進化)
브루스 매즐리시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첫번째 불연속 - 지구는 우주의 중심
  불연속성을 연속으로 변화한 사람 Nicolaus Copernicus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의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조각> 

두번째 불연속 - 인간은 신을 닮게 창조된 존재
  Charles Darwin
  <신이 천지를 창조할 때 보장했던 인간의 우월한 지위를 박탈하고
  인간도 동물의 후손일 뿐> 

세번째 불연속 - 인간은 의식, 자아가 지배하는 우월한 존재
  Sigmund Freud
  <자아 혹은 의식에 의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으로 누적된 어떤 법칙에 종속된 존재> 

네번째 불연속 - 인간은 기계의 창조자, 일방적 관계
  저자? Bruce Mazlish
  <인간은 인간만의 본질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어 과학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기계가 인간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기계도 (인간의 욕망에 의해) '진화'할 것이며, 인간의 삶에서
  기계를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 

사실 네번째 불연속을 벗어나 연속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위의 첫번째, 두번째 것처럼 명쾌하지 않다.
첫번째, 두번째의 것이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인 반면에
저자가 나타내고자 한 인간과 기계에 대한 논제는
역사와 철학, 문화적인 부분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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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 까치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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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얘기이다.
좀 더 넓게는 다양한 시선으로의 역사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이유는 동쪽으로 갈 수 없어서이다.
16세기 동쪽을 차지한 오스만투르크 때문에
중국과 인도와의 무역을 할 수 없어 새로운 商路를 개척해야 했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결과는 단적으로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1518년 2,510만명에 달하던 멕시코 인구가 1622년에는 75만명으로,
아메리카 전체로 확대해서 추정하면
1520년 7,500만명이던 인구가 1620년에는 500만명으로,
정복전쟁 전 1,000만명이던 잉카제국 인구는 1630년 경 60만명으로 감소한다.
스페인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정복자들에 의해
몰살당하고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진 육체는
대서양을 건너온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문명과 야만, 주체와 타자 등과 같이 이분법화된 구도에서
문명과 주체는 야만과 타자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고 교화시켜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맘대로 약탈하고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라틴아메리카를 연구하는 이성형 교수는
미각자본주의의 대표주자인 설탕과 커피를 예로 들어
그 속에 숨겨진 라틴-아프로-아메리카의 모습을 보여준다.
B.C 8000년 경 남태평양 뉴기니에서 시작된 사탕수수 재배는
B.C 6000년 경 필리핀과 인도로 들어온다.
이미 기원전 400년경 인도에서 설탕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중국은 7세기에 당태종에 의해 인도로부터 제당법을 배워온다.
이렇게 전파된 설탕은 아랍인을 통해 8세기에 유럽으로 전파되고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로 사탕수수 모종이 전해지게 된다.
설탕의 감미로운 맛에 길들여진 유럽인은
사탕수수가 잘 자라는 아메리카에서 다량의 설탕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탕수수 플렌테이션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흑인 노예를 도입한다.
유럽인의 풍족한 식탁을 채우기 위해 국가들도 노예제를 공인한다.
토픽이라는 사람은 설탕은 "아시아의 작물, 유럽의 자본, 아프리카의 노동력,
아메리카의 대지가 결합된 진정한 국제적 작물"이라고 얘기했단다.
커피도 마찬가지... 

이러한 예를 들어 써 내려간 50개의 짧은 글에서 아픔을 읽는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물 일 뿐이라지만
감추어진 이야기가 너무 많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후 몇년이 지난 1806(?)년에 일어난
흑인을 중심으로 해서 성공한 아아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보다 더 큰 의미를 가졌지만-국가독립, 자치권 획득, 시민 혁명-
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던가.

아라파트가 이틀 전 11월 11일 사망했다.
부정을 축재한 권력자의 부패한 면모를 가졌지만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그의 인생사를 보면서
우리가 배운 정의로운 이스라엘, 테러로 이미지화된
호전적이고 침입자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교공부를 생각한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더불어 나눔을 실천할 것인가
기억되기 위하여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승자가 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정의를 배우지 못하고 세상은 승자만을 보여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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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과학적 한계 - 의문화 1
에드워드 골럽 지음, 예병일.신좌섭 외 옮김 / 몸과마음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최근 의도에 의해 구입한 책이 똑 떨어져버려 대략 난감해 하다가
1년전쯤 구입해 책장에 쳐박아 둔 책을 꺼내들었다.
제목의 느낌도 딱 그렇듯이 그다지 재미 없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오호~~~ 생각보다 재밌다. 

20세기 초 평균연령이 35세였다는 사실(어디선가 들었겠지만 잊었었지^^),
겨우 19세기 중반에 위생이나 공중보건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는 사실도
새삼 재밌다.
'풍속의 역사'에서 재미로 남겨진 비위생적인 파리의 거리,
베르사이유 담장의 오물, 그걸 피하기 위해 시작된 하이힐의 유래 등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17세기 산업혁명은 사람들의 경제적 발전을 유도하고
17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시민혁명으로 사람들의 정치적 성장을 이끌어
그 시대는 왠지 어지러운 발전의 궤도를 달리고 있고
뭔가 근대의 문턱을 넘어 과감한 시대적 변화가 있었을 법한데
19세기, 20세기초만 하더라도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조기 사망이 가장 평균 연령을 낮추는 가장 큰 원인이었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유도한 페스트, 두창과 같은
감염성 질병의 시대였다는 건 좀 생소하다.

사망이나 질병의 정확한 원인은 알지 못한 채 19세기 중반
채드윅과 같은 인물에 의해 공중보건법이 만들어지고(1848년)
열악하고 빈곤한 근로자들의 환경이 개선되면서
불과 5년 후(1953년) 근로자 지역의 연간 사망률은
1천명당 30명에서 13명으로 줄어든다.  공중보건과 위생의 승리!

그 이후 루이 파스퇴르나 조지프 리스터 등에 의해
질병의 세균설이 등장한다.
기존에 의학을 지배하던 비과학적 생기론을
과학을 의학에 활용함으로써 의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세균의 발견으로 시작된 세균학에 이어 제너의 종두법,
파스퇴르의 콜레라, 탄저병, 광견병 등의 예방,
베링의 디프테리아 예방 등으로 의학이 눈부신 발전을 하면서
면역학이 등장한다. 
베링의 디프테리아 치료가 성공한 것이 1889년이었으니
1세기보다 짧은 기간동안 의학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해 주었다. 

19세기 중반에 세균의 존재를 안 이후 150년이 지난 지금 의학의 모습은 어떤가.
저자는 군산복합체와 비교하며 의료-산업복합체라는 용어를 빌려쓴다.
의료에서 사람이 소외받고 있으며,
과학을 등에 입은 의학은 환자가 아니라 질병과 죽음만을 상대로 하고,
일부 가진 자의 특이성 질병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감염성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의학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좀 낭만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지 싶다. 

그럼에도 모두를 위한 의학도 필요하지만
특수 질병에 대한 의학도 과학을 빌려 발전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못하고
또한 철학이 담기지 않은 무분별한 과학이나 의학으로
저자의 생각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못한 채
그저 의학의 역사와 몰랐던 부분들을 들추면서 쏠쏠한 재미를 느꼈을 뿐이다.

 에드워드 골럽 지음/예병일 외 옮김, 몸과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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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 다 빈치 코드의 비밀
마가렛 스타버드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에 많은 영향을 미친 책.
예수의 아내, 마리아의 존재와
종교에서 마리아라는 여성성을 제거한 정통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티첼리, 안젤리코 등의
그림, 건축, 얘기 속에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는 정황들.
숨겨진 진실을 지켜오기 위해 애써온
알비파, 장미십자회, 템플기사단, 프리메이슨 등등...

흥미로운 소재임에도 그다지 흥미있게 읽지 못했다.
글의 흡입력이 떨어져서?
인용한 정황 증거들의 설득력이 약해서?
그건 아니지 않나 싶다.
예수가 결혼을 했고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내게 놀라움을 안겨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통교회가 감추고자 했던 종교에서의 여성성이라는 게
내 생각에 큰 변화를 야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내게 남겨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라는 믿음이
예수의 신부가 있고 없음에 따라 변하지 않을 것이고
마가렛 스타버드가 말한 것처럼
서구문화를 폭력적으로 이끌어온 남성 중심의 종교가
여성성을 받아들인다 하여
세상이 화해와 포용의 무드로 전환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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