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중에서 2
제임스 티소 James Joseph Jacques Tissot
[약력]
1836년 10월 프랑스 낭트에서 출생
1859년 살롱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
1871년 파리 코뮌에 가담했다가 런던으로 도피
1902년 8월 브장송 근처 뷔용수도원에서 구약성서의 내용을 묘사한 소묘들을 그리던 중 사망
[활동]
초기에는 고뇌에 찬 작품을 그렸으나 세련된 풍속화와 초상화로 전향하면서 파리의 미술계에서 급속히 성공
그림 외에도 에칭/드라이포인트/메조틴트 등의 동판화들을 많이 제작했으며 칠보 세공에도 관심을 보임
신비한 신앙적 체험 이후 그리스도의 생애를 삽화로 그리기로 결심하고 여러 차례 성지를 순례
1902년「구약성서」의 내용을 묘사한 일련의 소묘들을 그리던 중 브장송 근처 뷔용수도원에서 사망
코린트 [Corinth, Lovis, 1858.7.21~1925.7.12]
| 독일의 화가. |
|
| 국적 |
|
독일 |
| 활동분야 |
|
예술 |
| 출생지 |
|
독일 동프로이센 타피아우 |
| 주요저서 |
|
《자서전》 | |
동프로이센 타피아우 출생. 1876∼1880년 쾨니히스베르크, 1880∼1884년 뮌헨의 여러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1884∼1887년 파리에서 아카데미 쥘리앵에 다니면서 제작에 종사한 후, 뮌헨·베를린에서 활약하였다. 초기 작품은 P.루벤스, F.할스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적이었으나, 후에 외광파(外光派)회화로 전향하여 독일인상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러나 1911년 갑자기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부터 점차 표현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졌으며 만년에는 석판·에칭의 수작도 남겼다. 저서로 《자서전 Selbstbiographie》 등이 있다.

Manet. Olympia. 1863.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벨에포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예술·문화가 번창하고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을 한 신사 숙녀가 넘쳐흘렀다. 물랭루즈와 레스토랑 맥심으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꽃의 파리를 이루었다. 그 후 외교면에서나 경제면에서나 쇠퇴와 핍박이 계속되어 1900년대 초의 파리를 아는 사람들은 한없는 애착심을 가지고 이 시대를 ‘좋은 시대’라고 불렀다.
보르프스베데파 Worpswede school
독일의 화파.
1889년 이후 독일 북부 브레멘 근처의 보르프스베데 마을에 시골풍경을 그리기 위해 모인 작가들의 모임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그 근처의 관목·초원·숲·강·다리·풍차·농부들을 19세기초 프랑스 바르비종파를 연상시키는 낭만적·감상적 양식으로 묘사했다.
프리츠 매켄슨과 오토 모더슨이 초기 구성원이었으며, 1890년대에는 나중에 모더존과 결혼한 파울라 베커, 한스 암 엔데, 프리츠 오베르베크, 하인리히 호겔러가 참여했다. 재능있는 여류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 역시 보르프스베데에서 작업했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독일의 시인 릴케를 만났고 1901년에 그와 결혼했다. 2년 뒤 릴케는 작가들과 풍경화에 대해 논하는 〈보르프스베데〉라는 책을 발간했다.
보르프스베데 화가들은 1895년 뮌헨의 글라스팔라스트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매켄슨이 〈광야에서의 설교 Sermon in the Moors〉라는 작품으로 금메달을 받으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1890년대 후반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그들의 성공은 지속되지 못했다. 지방화가인 그들은 프랑스 미술의 새로운 흐름에서 격리되어 있었고 파울라 모더존 베커를 제외하고는 후기 인상주의 회화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여행에서 본 고흐·고갱·세잔의 작품에 영향받은 모더존 베커는 평면성과 단순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예견하게 했다.
잔더 [Sander, August, 1876~1964.4.20]
| 독일의 사진가. |
|
| 국적 |
|
독일 |
| 활동분야 |
|
사진 |
| 출생지 |
|
헤르도르프 안 데이지그 |
| 주요작품 |
|
《우리 시대의 얼굴》(1929) | |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독일의 사회상을 다양한 초상사진들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그려낸 사진가이다. 1876년 독일의 탄광촌 헤르도르프 안 데이지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고 아우구스트 잔더도 어려서부터 광부일을 하였다. 슈멕(Schmeck)이라는 사진가가 광산촌의 풍경을 찍기 위해 이 고장을 찾았을 때 그의 심부름을 해주면서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후 오스트리아 린츠에 사진관을 차렸고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독일 쾰른에서 사진관을 경영하였다.
잔더는 사회주의 예술론의 영향을 받아 동시대인들을 사회적 부류별로 폭넓게 찍어나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독일 민중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인물사진 촬영을 계속하였다. 이후 1910년부터 1930년까지 무려 2,500점이 넘는 인물사진을 완성하였다. 1927년 개인전을 열어 이러한 작업을 발표하고, 1929년 《우리 시대의 얼굴 Antlitz der Zeit》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였다. 이어 1936∼1939년에 《독일의 국토, 독일의 민중 Deutsche Lande, Deutsche Menschen》 시리즈를 계속 펴내었다. 그는 이 계획을 45권 총서로 계속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나치정권하에서 사상불온자로 지목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1년부터 잔더는 비로소 독일 사진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하여 1958년에는 독일사진협회 명예회원이 되었고, 1961년 문화상을 받았으며 1964년 4월 20일 사망하였다. 1969년에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잔더는 평생 인물사진만 찍었는데, 그는 그 사진들을 통해 거대한 사회구조 속에 놓여 있는 인간상을 파악하려 하였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인물을 사회라는 조직 속에서 저마다 맡고 있는 사회적 역할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 대신 농부, 변호사, 군인, 벽돌공 등 직업명이 사진제목으로 되어 있다. 또한 잔더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독일 민중 전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거대한 계획을 갖고 추진함으로써 그의 사진들은 역사적인 영원성을 갖게 되었다.
마르케 [Marquet, Albert, 1875.3.27~1947.6.14]
| 프랑스의 화가. |
|
| 국적 |
|
프랑스 |
| 활동분야 |
|
예술 |
| 출생지 |
|
프랑스 보르도 |
| 주요작품 |
|
《친구 아틀리에의 나부》《푀칸의 해변》 | |
보르도 출생. 처음에는 장식미술을 지망하여 파리의 장식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1897년 관립미술학교로 전학, G.모로의 지도를 받았으며, 동문인 H.마티스, G.루오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05년 살롱 도톤에 작품을 출품하던 시기의 초기작품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대담한 묘사법 때문에 마티스와 더불어 포비슴(fauvisme:야수파)의 대표적 작가로 지목되었으나 1912년의 모로코 여행 후 점차 야수파적인 경향으로부터 벗어나 색채의 조화를 중시하는 온아한 작풍으로 전향하였다.
이후 거의 풍경화를 전문으로 그렸으며, 각지를 여행하면서 대체로 강 ·항구 ·다리 등 물이 보이는 정경을 대상으로 한 연작(連作)이 많다. 부드러운 회색 ·녹색 ·청색 등을 주조로 하는 미묘한 배색과 적확한 묘사로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친구 아틀리에의 나부》 《푀칸의 해변》 등이 있다.
보나르 [Bonnard, Pierre, 1867.10.3~1947.1.23]
| 프랑스의 화가. |
|
| 별칭 |
|
색채의 마술사 |
| 국적 |
|
프랑스 |
| 활동분야 |
|
미술 |
| 출생지 |
|
프랑스 파리 교외 센현퐁트네 오 로즈 |
| 주요작품 |
|
《빛을 등지고 있는 누드》 | |
파리 교외 센현(縣) 퐁트네 오 로즈 출생. 처음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공부를 하였으나, 그림에 흥미를 느껴 틈틈이 아카데미 쥘리앙이나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P.세뤼지에, M.드니, J.뷔야르 등과 가깝게 지냈다. 1889년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고갱의 영향을 받은 그들과 반인상파인 나비파(派)를 결성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흑갈색을 기조로 한 차분한 색감으로 파리시민의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그렸으나 40대에 접어들면서는 회색조에서 서서히 밝은 색조로 이행하였다. 독특한 시각에서 잡는 기지적(機智的) 구도로, 풍경, 멱감는 나부(裸婦), 정물·사람이 모인 부드러운 실내정경 등을, 소박하면서도 감미로운 정감으로 그려, 뷔야르와 함께 대표적인 앵티미스트[親密派]로 높이 평가되었다.
색채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져 60세를 지나면서는 선명한 명색(明色)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며, 차차 대상의 설명에서 벗어나 현란한 명색이 교향(交響)하는 독자적인 색채의 세계를 확립,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프랑스의 르 카네에 은거하여 제작에 몰두하였으며, 전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작품으로는 《빛을 등지고 있는 누드》 등이 알려졌으며, 또 유화 이외에 구아슈(gouache)·수채화·석판화에서도 많은 가작을 남겼다.
뷔야르 [1868.11.11~1940.6.21]
| 프랑스의 화가. |
|
| 원어명 |
|
Jean- douard Vuillard |
| 국적 |
|
프랑스 |
| 활동분야 |
|
예술 |
| 출생지 |
|
프랑스 퀴소 |
| 주요작품 |
|
《파리공원》(1894년경) 《모델》(1905~1919) | |
프랑스 퀴소 출생. 1877년 파리로 이주하였다.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바느질로 생활하는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1888년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가 P.보나르를 알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나비파(派)의 일원으로 출발하였다. 인상파의 영향을 벗어나 고갱의 화풍을 따랐으며, 나아가 형태의 단순화와 색면(色面)의 장식적 배합을 지향하였다.
작품은 어머니와 자식의 정경(情景)이나 실내의 정물과 같은 신변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제재로 삼았으며, 깊이 있는 배색과 애정 깊은 운필(運筆)은 앵티미슴의 대표적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만년에는 약간 아카데믹한 방향으로 기울어, 상류 계급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전기(前期)만한 생기는 없다. 작품으로 《파리공원》(1894년경) 《모델》(1905~1906) 등이 있다.
드니 [Denis, Maurice, 1870.11.25~1943.11.13]
| 프랑스의 화가. |
|
| 국적 |
|
프랑스 |
| 활동분야 |
|
예술 |
| 출생지 |
|
프랑스 그랑빌 |
| 주요저서 |
|
《이론》 |
| 주요작품 |
|
파리의 샹젤리제관(1922)과 제네바 국제연맹(1939)의 장식화 | |
프랑스 그랑빌 출생.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배우고, 1890년의 샹젤리제의 살롱(앙데팡당展)에 등장하여 차차 인정받고, ‘상징파’ 화가로 간주되었다. 처음에 P.세잔(1839∼1906), 특히 P.고갱(1848∼1903)의 영향을 받고, P.세뤼지에(1863∼1927) 등과 ‘나비파(Nabis 派:19세기 말 고갱의 작화사상에 공명하여 모인 反印象主義 화가들의 그룹)’를 결성하여, 인상파 이후의 신선한 색채감각을 이어받고, 나아가 고갱의 평면적인 표현에 어떤 착상을 담는 정의적인 내용을 가졌다.
그러나 상징적인 경향이 적어지면서 장식적 ·설화적이 되어 그리스도교의 주제를 되풀이했다. 《성가족(聖家族)》《성고(聖告)》《어린이들에게 둘러싸인 예수》 등이 그것이다. 교회당이나 극장에도 대작(大作)의 벽화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퓌비스 드 샤반의 벽화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으며 근대 종교화가로서의 특이한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 장식화에도 손을 대었는데, 주요작품으로는 파리의 샹젤리제관(1922)과 제네바 국제연맹(1939)의 장식화가 있고, 저서에는 《이론》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