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중에서 2

제임스 티소 James Joseph Jacques Tissot

[약력]
1836년 10월 프랑스 낭트에서 출생
1859년 살롱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
1871년 파리 코뮌에 가담했다가 런던으로 도피
1902년 8월 브장송 근처 뷔용수도원에서 구약성서의 내용을 묘사한 소묘들을 그리던 중 사망

[활동]
초기에는 고뇌에 찬 작품을 그렸으나 세련된 풍속화와 초상화로 전향하면서 파리의 미술계에서 급속히 성공
그림 외에도 에칭/드라이포인트/메조틴트 등의 동판화들을 많이 제작했으며 칠보 세공에도 관심을 보임
신비한 신앙적 체험 이후 그리스도의 생애를 삽화로 그리기로 결심하고 여러 차례 성지를 순례
1902년「구약성서」의 내용을 묘사한 일련의 소묘들을 그리던 중 브장송 근처 뷔용수도원에서 사망

코린트 [Corinth, Lovis, 1858.7.21~1925.7.12]

독일의 화가.
국적 독일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독일 동프로이센 타피아우
주요저서 《자서전》

동프로이센 타피아우 출생. 1876∼1880년 쾨니히스베르크, 1880∼1884년 뮌헨의 여러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1884∼1887년 파리에서 아카데미 쥘리앵에 다니면서 제작에 종사한 후, 뮌헨·베를린에서 활약하였다. 초기 작품은 P.루벤스, F.할스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적이었으나, 후에 외광파(外光派)회화로 전향하여 독일인상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러나 1911년 갑자기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부터 점차 표현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졌으며 만년에는 석판·에칭의 수작도 남겼다. 저서로 《자서전 Selbstbiographie》 등이 있다.

Manet. Olympia. 1863.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벨에포크

‘좋은 시대’라는 뜻.
원어명 La belle époque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예술·문화가 번창하고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을 한 신사 숙녀가 넘쳐흘렀다. 물랭루즈와 레스토랑 맥심으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꽃의 파리를 이루었다. 그 후 외교면에서나 경제면에서나 쇠퇴와 핍박이 계속되어 1900년대 초의 파리를 아는 사람들은 한없는 애착심을 가지고 이 시대를 ‘좋은 시대’라고 불렀다.

보르프스베데파 Worpswede school

독일의 화파.

1889년 이후 독일 북부 브레멘 근처의 보르프스베데 마을에 시골풍경을 그리기 위해 모인 작가들의 모임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그 근처의 관목·초원·숲·강·다리·풍차·농부들을 19세기초 프랑스 바르비종파를 연상시키는 낭만적·감상적 양식으로 묘사했다.
프리츠 매켄슨과 오토 모더슨이 초기 구성원이었으며, 1890년대에는 나중에 모더존과 결혼한 파울라 베커, 한스 암 엔데, 프리츠 오베르베크, 하인리히 호겔러가 참여했다. 재능있는 여류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 역시 보르프스베데에서 작업했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독일의 시인 릴케를 만났고 1901년에 그와 결혼했다. 2년 뒤 릴케는 작가들과 풍경화에 대해 논하는 〈보르프스베데〉라는 책을 발간했다.
보르프스베데 화가들은 1895년 뮌헨의 글라스팔라스트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매켄슨이 〈광야에서의 설교 Sermon in the Moors〉라는 작품으로 금메달을 받으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1890년대 후반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그들의 성공은 지속되지 못했다. 지방화가인 그들은 프랑스 미술의 새로운 흐름에서 격리되어 있었고 파울라 모더존 베커를 제외하고는 후기 인상주의 회화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여행에서 본 고흐·고갱·세잔의 작품에 영향받은 모더존 베커는 평면성과 단순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예견하게 했다.

잔더 [Sander, August, 1876~1964.4.20]

독일의 사진가.
국적 독일
활동분야 사진
출생지 헤르도르프 안 데이지그
주요작품 《우리 시대의 얼굴》(1929)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독일의 사회상을 다양한 초상사진들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그려낸 사진가이다. 1876년 독일의 탄광촌 헤르도르프 안 데이지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고 아우구스트 잔더도 어려서부터 광부일을 하였다. 슈멕(Schmeck)이라는 사진가가 광산촌의 풍경을 찍기 위해 이 고장을 찾았을 때 그의 심부름을 해주면서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후 오스트리아 린츠에 사진관을 차렸고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독일 쾰른에서 사진관을 경영하였다.
잔더는 사회주의 예술론의 영향을 받아 동시대인들을 사회적 부류별로 폭넓게 찍어나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독일 민중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인물사진 촬영을 계속하였다. 이후 1910년부터 1930년까지 무려 2,500점이 넘는 인물사진을 완성하였다. 1927년 개인전을 열어 이러한 작업을 발표하고, 1929년 《우리 시대의 얼굴 Antlitz der Zeit》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였다. 이어 1936∼1939년에 《독일의 국토, 독일의 민중 Deutsche Lande, Deutsche Menschen》 시리즈를 계속 펴내었다. 그는 이 계획을 45권 총서로 계속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나치정권하에서 사상불온자로 지목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1년부터 잔더는 비로소 독일 사진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하여 1958년에는 독일사진협회 명예회원이 되었고, 1961년 문화상을 받았으며 1964년 4월 20일 사망하였다. 1969년에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잔더는 평생 인물사진만 찍었는데, 그는 그 사진들을 통해 거대한 사회구조 속에 놓여 있는 인간상을 파악하려 하였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인물을 사회라는 조직 속에서 저마다 맡고 있는 사회적 역할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 대신 농부, 변호사, 군인, 벽돌공 등 직업명이 사진제목으로 되어 있다. 또한 잔더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독일 민중 전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거대한 계획을 갖고 추진함으로써 그의 사진들은 역사적인 영원성을 갖게 되었다.

마르케 [Marquet, Albert, 1875.3.27~1947.6.14]

프랑스의 화가.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보르도
주요작품 《친구 아틀리에의 나부》《푀칸의 해변》

보르도 출생. 처음에는 장식미술을 지망하여 파리의 장식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1897년 관립미술학교로 전학, G.모로의 지도를 받았으며, 동문인 H.마티스, G.루오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05년 살롱 도톤에 작품을 출품하던 시기의 초기작품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대담한 묘사법 때문에 마티스와 더불어 포비슴(fauvisme:야수파)의 대표적 작가로 지목되었으나 1912년의 모로코 여행 후 점차 야수파적인 경향으로부터 벗어나 색채의 조화를 중시하는 온아한 작풍으로 전향하였다.
이후 거의 풍경화를 전문으로 그렸으며, 각지를 여행하면서 대체로 강 ·항구 ·다리 등 물이 보이는 정경을 대상으로 한 연작(連作)이 많다. 부드러운 회색 ·녹색 ·청색 등을 주조로 하는 미묘한 배색과 적확한 묘사로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친구 아틀리에의 나부》 《푀칸의 해변》 등이 있다.

보나르 [Bonnard, Pierre, 1867.10.3~1947.1.23]

프랑스의 화가.
별칭 색채의 마술사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미술
출생지 프랑스 파리 교외 센현퐁트네 오 로즈
주요작품 《빛을 등지고 있는 누드》

파리 교외 센현(縣) 퐁트네 오 로즈 출생. 처음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공부를 하였으나, 그림에 흥미를 느껴 틈틈이 아카데미 쥘리앙이나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P.세뤼지에, M.드니, J.뷔야르 등과 가깝게 지냈다. 1889년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고갱의 영향을 받은 그들과 반인상파인 나비파(派)를 결성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흑갈색을 기조로 한 차분한 색감으로 파리시민의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그렸으나 40대에 접어들면서는 회색조에서 서서히 밝은 색조로 이행하였다. 독특한 시각에서 잡는 기지적(機智的) 구도로, 풍경, 멱감는 나부(裸婦), 정물·사람이 모인 부드러운 실내정경 등을, 소박하면서도 감미로운 정감으로 그려, 뷔야르와 함께 대표적인 앵티미스트[親密派]로 높이 평가되었다.
색채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져 60세를 지나면서는 선명한 명색(明色)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며, 차차 대상의 설명에서 벗어나 현란한 명색이 교향(交響)하는 독자적인 색채의 세계를 확립,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프랑스의 르 카네에 은거하여 제작에 몰두하였으며, 전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작품으로는 《빛을 등지고 있는 누드》 등이 알려졌으며, 또 유화 이외에 구아슈(gouache)·수채화·석판화에서도 많은 가작을 남겼다.

뷔야르 [1868.11.11~1940.6.21]

프랑스의 화가.
원어명 Jean-douard Vuillard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퀴소
주요작품 《파리공원》(1894년경) 《모델》(1905~1919)

프랑스 퀴소 출생. 1877년 파리로 이주하였다.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바느질로 생활하는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1888년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가 P.보나르를 알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나비파(派)의 일원으로 출발하였다. 인상파의 영향을 벗어나 고갱의 화풍을 따랐으며, 나아가 형태의 단순화와 색면(色面)의 장식적 배합을 지향하였다.
작품은 어머니와 자식의 정경(情景)이나 실내의 정물과 같은 신변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제재로 삼았으며, 깊이 있는 배색과 애정 깊은 운필(運筆)은 앵티미슴의 대표적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만년에는 약간 아카데믹한 방향으로 기울어, 상류 계급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전기(前期)만한 생기는 없다. 작품으로 《파리공원》(1894년경) 《모델》(1905~1906) 등이 있다.

드니 [Denis, Maurice, 1870.11.25~1943.11.13]

프랑스의 화가.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그랑빌
주요저서 《이론》
주요작품 파리의 샹젤리제관(1922)과 제네바 국제연맹(1939)의 장식화

프랑스 그랑빌 출생.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배우고, 1890년의 샹젤리제의 살롱(앙데팡당展)에 등장하여 차차 인정받고, ‘상징파’ 화가로 간주되었다. 처음에 P.세잔(1839∼1906), 특히 P.고갱(1848∼1903)의 영향을 받고, P.세뤼지에(1863∼1927) 등과 ‘나비파(Nabis 派:19세기 말 고갱의 작화사상에 공명하여 모인 反印象主義 화가들의 그룹)’를 결성하여, 인상파 이후의 신선한 색채감각을 이어받고, 나아가 고갱의 평면적인 표현에 어떤 착상을 담는 정의적인 내용을 가졌다.
그러나 상징적인 경향이 적어지면서 장식적 ·설화적이 되어 그리스도교의 주제를 되풀이했다. 《성가족(聖家族)》《성고(聖告)》《어린이들에게 둘러싸인 예수》 등이 그것이다. 교회당이나 극장에도 대작(大作)의 벽화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퓌비스 드 샤반의 벽화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으며 근대 종교화가로서의 특이한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 장식화에도 손을 대었는데, 주요작품으로는 파리의 샹젤리제관(1922)과 제네바 국제연맹(1939)의 장식화가 있고, 저서에는 《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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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파 [Nabis]

19세기 말 폴 고갱의 영향을 받은 젊은 반인상주의() 화가 그룹

1888년 9월 아카데미 쥘리앙의 간사인 L.P.H.세뤼지에는 고갱의 신기한 작품과 명확한 이론에 감명받고, 아카데미의 젊은 동료들에게 이를 전했다. 이것을 발단으로 실질적인 그룹을 형성하여 1889년 카페 보르피니에서 인상파와 종합주의의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세뤼지에를 중심으로 M.드니, L.보나르, 뷔야르, K.X.루셀, R.피오, P.E.랑송, H.G.이벨, 발로톤 등과 당시 화필을 잡은 조각가 A.마욜이 참가하였다. 나비파란 '예언자'를 뜻하는 헤브라이어(語)의 '나비'에서 따온 명칭으로, 시인 카자리스가 붙였다. 일찍이 인상파 화가들이 카페 게르부아에 모인 것처럼, 나비파는 보라리가(街)의 카페에 모여 토론하였다.
색채분석에 의존하여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인상파의 작품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만큼, 화면을 하나의 창조라고 생각하고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여 자신의 사색을 전개하는 고갱의 작품경향을 새로운 계시로 받아들였다. 평면적인 병렬(竝列)이나 장식적인 구성을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리는 형태나 색채는 오히려 작가의 해석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문단을 움직이던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같은 상징적인 작품을 그리는 O.르동과도 교류하였다.
나비파는 일반적인 성격 속에 다양한 경향을 내포하고 있어, 각 작풍(作風)으로 흘러감에 따라 집회는 자연적으로 해산되고 말았으나, 반인상주의 운동으로서 젊은 세대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후 드니는 평면적인 구성을 발전시켜 장식적인 효과에서 설화화(說話畵)와 종교화를 개척하였다. 반대로 보날과 세뤼지에는 신변 제재를 정감 있게 묘사하여 색채를 정성스레 다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헤켈 [Heckel, Erich, 1883.7.31~1970.1.27]

독일의 화가.
국적 독일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독일 작센주 데베른
주요작품 《호숫가의 여인들》《잠자는 흑인여자들》

작센주 데베른 출생. 처음에는 드레스덴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나 후에 회화로 전환, 1905년 E.L.키르히너와 함께 표현주의운동의 미술단체 ‘브뤼케[橋]’를 조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위생병으로 벨기에전선에서 종군하였다. 1937년 나치스로부터 퇴폐예술가로 낙인이 찍혔고, 1944년 공습으로 베를린의 집과 아틀리에가 파괴되어 많은 작품을 잃었다.
유채(油彩) 외에 판화, 석판(石版)을 표현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1920년 이후부터 점차 온화한 장식적 경향의 화조(畵調)를 보였으며, 풍경화도 즐겨 그렸다. 1949∼1956년 카를스루에미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대표작에는 《호숫가의 여인들》《잠자는 흑인여자들》 등이 있다.

브뤼케파 (Die Brücke)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 단체.

1905년 독일 '드레스덴 실업학교'의 건축학과 학생 4명(그룹의 이름을 지은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 프리츠 블레일, 에리히 헤켈,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이 결성했다. 1906년 이 단체의 가입을 요청한 에밀 놀데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슈미트 로틀루프는 "브뤼케파의 목적의 하나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전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브뤼케파에 속한 화가들은 막스 페히슈타인과 오토 뮐러, 스위스 미술가인 귀노 아미에, 핀란드의 상징주의자인 아크셀리 갈렌 칼렐라, 네덜란드의 야수파 화가인 케스 반 동겐 등이 있었다.
브뤼케파의 미술가들은 원시주의에 영향을 받아 대담한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을 강조한 단순한 양식으로 온갖 다양한 주제들(인물·풍경·초상·정물 등)을 그림과 판화로 제작했다. 키르히너와 헤켈은 드레스덴 민속박물관에서 본 아프리카와 태평양 제도의 미술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 원시주의가 브뤼케파의 양식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브뤼케파 화가들의 작품에는 공포나 불안이 잠재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나타나며, 이런 점에서 그들의 미술은 마찬가지로 원시미술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좀더 서정적인 방식으로 형태와 색을 다룬 프랑스 야수파 화가들과 구별된다. 브뤼케파의 미술은 또한 독일 후기 고딕 양식의 목판화에 보이는 표현적인 단순함과 노르웨이 화가인 에드바르트 뭉크의 판화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06년 드레스덴의 자이페르트 램프 공장에서 열린 최초의 브뤼케파 전시회는 독일 표현주의의 시작을 알린 것으로, 이때부터 1913년까지 정기적으로 전시회가 열렸다(그러나 1911년쯤 브뤼케파의 주된 활동은 이미 여러 회원들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옮겨갔음). 이 그룹은 또한 '명예회원'을 모집하여 그들에게 해마다 보고서를 발행하고 지금은 매우 귀중한 수집품목이 된 판화 원본들을 선사하기도 했다.
회원들 사이의 분열은 언제나 있었지만 1911년 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1913년 키르히너가 〈브뤼케파 미술가 단체의 연대기 Chronik der Kunstlergemeinschaft Brücke〉에 그들의 활동에 관해 지나치게 주관적인 보고서를 실은 것을 계기로 이 그룹은 해체되었다. 브뤼케파의 화가들은 인간의 투쟁과 고통을 다룬 매우 감동적인 유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목판화를 부흥시켜 그것을 20세기의 중요한 표현매체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발라동 [Valadon, Suzanne, 1867~1938]

프랑스의 화가.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주요작품 《푸른 침실》

M.위트릴로의 어머니이다. 원래 몽마르트르의 무용가로서 A.르누아르, H.de 로트레크의 모델이었으나 뒤에 화가로 전향하였다. 주요작품에 파리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푸른 침실》 등이 있다.

블룸즈버리그룹 [Bloomsbury Group]

영국의 작가·철학가·예술가 집단의 이름.
구분 예술단체
설립연도 1906년
소재지 영국 런던 블룸즈버리
설립목적 예술에 관한 담론
주요활동 예술활동, 의견 교환

1906년부터 1930년경까지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영국의 지식인·예술가들의 모임으로서 이 그룹의 중심 인물들이 런던 중심가 대영박물관 근처의 블룸즈버리에 살고 있었던 데서 이 명칭이 유래되었다.
중심 인물은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Roger Fry), C.벨(C.Bell), 화가 덩컨 그랜트(Duncan Grant), 바네사 벨(Vanessa Bell),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Edward Forster),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D.가너트, 전기 작가 G.스트레이치(G.Strachey), 경제학자 존 케인스(John Keynes), 정신과 의사 A.스티븐 등이다. 이들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의 교우관계가 바탕이 되어 자연스럽게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지적(知的) 혼미의 시기에 자유로운 이성(理性), 미(美)와 우정을 존중함을 신조로 삼으면서, 화단과 문단 등에서 형식주의를 타파한 개성 있는 모더니스트들이었다. 각기 자신의 영역에서 20세기 문화의 개척자가 되었고 지성에 대한 신뢰와 세련된 미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를 지나면서 세계공황과 파시즘의 대두로 인한 정세변화 속에서 분산되어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그랜트 [Grant, Duncan James Corrowr, 1885.1.21~1978.5.8]

영국의 후기인상파 화가이며 디자이너.
국적 영국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인도

1885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인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영국 런던에서 교육을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미술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았고 J. E.블랑슈에게 그림을 배웠다. 블룸즈버리그룹과 인연을 맺은 후 평생 함께하여 블룸즈버리그룹을 대표한다.  R. E. 프라이와 함께 영국 화단에 후기인상파(後期印象派)를 받아들였으며, 또한 야수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생생한 색조와 구도, 분석적 형태를 추구하기도 했다.
프라이가 블룸즈버리의 미술가들이 제작한 수공예품을 생산하는 공방을 내자, 디자이너였던 그랜트는 여기에서 직물과 가구, 도자기 등을 제작하였다. 이 공방은 블룸즈버리그룹 동인들의 재정적 협조를 받아 운영되었으나 1919년에 폐쇄되었다.
1919년 런던 그룹에 가입하면서 그의 화풍도 추상화에서 정물화나 풍경화로 바뀌었다. 1920년에 첫 개인전을 열고, 1926년, 1932년, 1940년에 영국 대표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하였다. V.울프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실내 장식가 버네서 벨의 초상화를 다수 그렸다.
블룸즈버리는 런던의 한 지명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블룸즈버리그룹의 중심 인물은 미술평론가 R. E. 플라이, A. C. 벨, 화가 D. 그랜트, 소설가 E. M. 포스터, V. 울프, D. 가너트, 전기(傳記) 작가 G. L. 스트레이치, 경제학자 J. M. 케인스, 정신과 의사 A. 스티븐 등이다. 이들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졸업 후에도 독서회 등을 계속 가짐으로써 자연스레 하나의 서클을 형성하게 되었다.

데이네카 [Deineka, Alexandre, 1899~1969]

러시아의 화가.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러시아 쿠르스크
주요작품 《페트로그라드의 방어》(1928) 《어머니》(1932)

쿠르스크 출생.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잡지 등의 삽화를 그렸으나 점차 현실세계로 눈을 돌려 공장노동자들, 그리고 도시생활 등을 소재로 한 사회상(社會相)을 사실주의적인 필치로 그려 주목을 끌었다. 또 노동자미술가협회를 조직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주요작품으로는 《페트로그라드의 방어》(1928) 《어머니》(1932) 《모스크바 교외》(1941) 《바닷가》(195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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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자리를 찾아서 - 김인성의 영국문학기행 1
김인성 지음 / 평민사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처음 접해보는 김인성씨의 책이고..처음 접해보는 영국기행기다

김인성씨는 글솜씨가 무척 맛깔스럽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영국의 시인들의 대한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게 쓰여져 있고..

시인의 마을 풍경의 소소한 분위기에 대한 묘사도..친근하고 다정한 말투로

책의 전개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유려한 문장력으로 시인의 이야기와 영국의 문화를 이끌어나가다가..

가끔 주제에 벗어나는듯한, 우리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려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해기스라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에서..

"양의 내장을 다져서 귀리죽이나 후추, 향신료 등과 섞어서 양 위장에 꾹꾹 집어 넣은 요리다.

아주 쉽게 말하면 스코틀랜드의 순대 였다.물론 우리나라 순대에 대면 맛도 아니었다.

우리 나라 순대가 단연코 더 맛있는 건 아마 대장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한국 사람들한테 해기스는 별거 아니다."

라는 내용은 왠지 잘 나가는 가수의 노래를 듣다 갑자기 그의 "삑사리"를 듣는 느낌이다.

(대장균때문에 더 맛있는 순대라....정말 즐겁지 않은 비유다..}

 

밀턴의 동성연애에 관한 소문을 다룰때에 작가는 말한다.

"서양의 소녀들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살이 붙고, 비둔해지는데 비해, 소년들 중에는 길고 날씬한 다리와 가는 몸매에 여전히 곱고 아름다운 미성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 이러다 보니 아마 남자들끼리의 애정도 생기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서양풍을 흉내내서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끼리 서로 연애도 하는 모양인데, "글쎄"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동성애에 관한 문제를 단순하게 '영국따라하기'로 몰아버리는 시선에는 불쾌감마저 느껴진다.

 

장님이 된 밀턴의 삶을 다룰때

"그는 자신의 불행한 경험을 작가의 차가운 관찰로 묘사하여 독자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준다.그렇지만 그는 자기 경험만을 파먹고, 자기 의식만을 들여다보며 글을 쓰지는 않았다. 우린 때로 어떤 경험 하나만을 파기만 하는 작가들을 만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 작가들 중에는 6.25 전쟁으로 인한 상흔에 매달리거나. 광주 항쟁에 억눌려 있다든지 분망한 사랑만을 다루려고 하거나, 버림받는 여자들의 인생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가끔은 자기 고통을 넘어서고 , 멀리서 그것을 바라볼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공감하는 바이다...그러나 밀턴의 구체적으로 어느 작품에서 다른 우리 나라 작가들과 차별화를 이루었는지, 에 대한 자세한 예시를 볼수 없음이 아쉽다.('투사 삼손'에 관한 짧은 구절로는 도저히 밀턴의 현실성을 적절하게 넘어선 그 냉철함을 이해하기 힘들다..) 막연하게 대안이 없는 비판을 들은 느낌이라고 할까....

 

"스코틀랜드의 제임스왕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살해 당하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가 웨일즈를 쳐부수러 직접 출전했다는 이야기를 읽을때마다 비틀비틀 가마를 타고 열심히 도망가던 조선의 선조 대왕이 떠올랐다."

라는 부분또한..읽다가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없는 사실도 아니고. 또 작가가 느낀 솔직한 생각을 악의 없이 적었다 하더라고

어쨌든...남의 나라 모습에 굳이 내나라 흠잡는 그런 모습은...

좁은 소견을 가진..소심한 내 눈에는 거슬리는 부분이다...

 

50일 간의 유럽의 미술관을 둘러보며.... 일본 미술에 영향을 받은 반 고흐의 작품을 대했을때..

'반 고흐가 한국의 분청사기나 단원의 그림을 대했으면 그는 틀림없이 무릎을 쳤을것이라는

이주헌씨의 글이 생각난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그들의 화려하고 장대한 문화를 대할때, 작은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약간은 소심해지고 주눅이 드는건 어쩔수 없다.(외국을 나갈때 누구든지 한번쯤은 생각해봤을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문화를 느끼고 알아가는것에 있어....먼저 선행되야 할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존경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책은 재미있다..

다른 어느 기행문보다 특별한 소재이고...중간중간 작가의 재기발랄한 말투에 웃음이 난다.

없는 얘기 한것도 아니고...글의 흐름상..어찌보면 재밌게 쉬어가는 이야기를

비틀어진 시선으로 혼자 왜곡해서 보고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책에 푹 빠져 꼭꼭 씹어나가며 맛있는 글을 소화시키다가..

갑자기....살짝 사래가 들리는 기분.....

많은 맛있는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소화를 잘 시키지 못함은...

어쩌면..이 나이까지도 아직까지 책읽기에 서툴은 나의 미숙함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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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터라겐 > 한미은행장이 아들에게 전하는말...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하고는 동업하지 말거라.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 아이들을 많이 만들어 놓거라.
그 중에 하나 둘은
안 그랬다면 말도 붙이기 어려울 만큼 예쁜 아가씨로 자랄 것이다.



목욕할 때에는 다리 사이와 겨드랑이를 깨끗이 씻거라.
치질과 냄새로 고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거든
주방장에게 간단한 메모로 칭찬을 전해라.
주방장은 자기 직업을 행복해할 것이고

너는 항상 좋은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좋은 글을 만나거든 반드시 추천을 하거라.
너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진다.

여자아이들에게 짓궂게 하지 말거라.
신사는 어린 여자나 나이든 여자나 다 좋아한단다.

양치질을 거르면 안된다. 하지만 빡빡 닦지 말거라.
평생 즐거움의 반은 먹는 것에 있단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거라.
친구가 너를 어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아내가 즐거워할 것이다.

하느님을 찾아 보거라.

만약 시간의 역사(호킨스), 노자(김용옥 해설), 요한복음(요한)을
이해한다면 서른 살을 넘어서면 스스로 서게 될 것이다.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너무 예의바른 사람을
집에 초대하지 말거라.
굳이 일부러 피곤함을 만들 필요는 없단다.

똥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누거라.
일주일만 억지로 해보면
평생 배 속이 편하고 밖에 나가 창피당하는 일이 없다.

가까운 친구라도 남의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속을 보이지 마라.

그 사람이 바로 내 흉을 보고 다닌 사람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도 청춘만큼이나 재미있단다.
그러니 겁먹지 말거라.
사실 청춘은 청춘 그 자체 빼고는 다 별거 아니란다.

밥을 먹고 난 후에는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어주거라.

엄마는 기분이 좋아지고
여자친구 엄마는 널 사위로 볼 것이며
네 아내는 행복해할 것이다.

양말은 반드시 펴서 세탁기에 넣어라.
소파 밑에서 도너츠가 된 양말을 흔드는

사나운 아내를 만나지 않게 될 것이다.

네가 지금 하는 결정이 당장 행복한 것인지
앞으로도 행복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법과 도덕을 지키는 것은 막상 해보면 그게 더 편하단다.

돈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거라.

돈에 눈이 멀어진다.
돈을 너무 멀리 하지 말거라.
너의 처자식이 다른 이에게 천대받는다.
돈이 모자라면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해서 사용해라.

너는 항상 내 아내를 사랑해라.

그러면 네 아내가 내 아내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으면 최소한 세 명의 의사 진단을 받아라.
생명에 관한 문제에 게으르거나 돈을 절약할 생각은 말아라.

5년 이상 쓸 물건이라면
너의 경제능력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사거라.

결과적으로 그것이 절약하는 것이다.

베개와 침대와 이불은 가장 좋은 것을 사거라.
숙면은 숙변과 더불어 건강에 가장 중요한 문제다.

너의 자녀들에게 아버지와 친구가 되거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 것 같으면 아버지를 택해라.

친구는 너 말고도 많겠지만 아버지는 너 하나이기 때문이다.

오줌을 눌 때에는 바짝 다가서거라.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될 것이 눈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락이 거의 없던 이가 찾아와 친한 척하면 돈을 빌리기 위한 것이다.
분명하게 '노'라고 말해라. 돈도 잃고 마음도 상한다.

친구가 돈이 필요하다면
되돌려 받지 않아도 될 한도 내에서 모든 것을 다 해줘라.
그러나 먼저 네 형제나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해줬나 생각하거라.

네 자녀를 키우면서 효도를 기대하지 말아라.
나도 너를 키우며, 너 웃으며 자란 모습으로 벌써 다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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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터라겐 > [퍼온글] 오드리 햅번이 아들에게 들려준 글..

매일 오는 메일중에 사랑밭 새벽편지란 것이 있다. 메일이 넘칠 때는 안 읽기도 하고, 한가할 때는 마음을 열고 읽기도 한다.

오늘 온 메일은 <오드리 햅번이 아들에게 들려준 글>이란 제목이었기에 유심히 봤고, 여기에 옮겨둔다.

 


 

  오드리햅번이 아들에게 들려준 글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위 내용은 오드리 햅번이 숨을 거두기 일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때에 아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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