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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거울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로제 그르니에의 대표적 단편집들 중에서 한두편씩을 추려 다시 한 권으로 펴낸 단편소설집. <물거울>이라는 제목도 그의 유명한 단편집 중 하나의 제목이라고. 책 말미에 붙은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이 책 뿐만이 아니라 로제 그르니에의 문학 전체에 대한 감상이 잘 나와있다. 믿을만한 번역가 답게 '비평'이 아닌 '감상문'을 잘 써주셨는데, 사실 그의 느낌과 내 느낌은 그다지 비슷하지는 않다.
'나직나직', '아주 단순하고 약간 쓸쓸한', 바람이 조금씩 통하는 서늘한', 등등의 객관적인 느낌은 동감하지만 아무래도 이 소설들을 읽고서 마음에 파문이 일기에는 내가 아직 너무 젊은(!)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간결한 듯 심중 깊은 메세지를 받아들이기에 나는 머리로는 알아 들을 지언정 가슴속 울림은 그만 못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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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생각하면 그저 살아가며 겪는 해프닝들이랄 수도 있는 사건들에서 노작가는 '인생이란 허무한 것', 하지만 그 '허무함'이 바로 인생이 주는 '애틋한 묘미'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르니에가 말하는 '허무함'은 마음이 스산해지는 가운데에서도 결코 절망적이거나 자포자기 체념식은 아니다.
-- 이런저런 일을 통해 산다는 게 이렇게 허무한 거라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암울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또 남은 삶이 다할 때 까지, 이렇게 크고 작은 허무함은 계속해서 반복 될테니 오히려 무디어 지는 게 낫지.
아니, 무뎌지기 보다는 애틋함으로 가슴속에 차곡차곡 묻으며 일생이라는 성벽에 벽돌을 하나씩 얹어간다고 생각하면 돼. 침착하자구. 조바심 낼 필요 없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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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단편 하나하나가 모두 가을날의 저물녘 같은 분위기 인 것은 틀림없다. '나아감' 보다는 '허무러짐', '사그라듦' 이라는 말이 훨씬 가까운 글들이니까. 하지만 이미 말 했듯이, 적어도 나는 아직 아니다. 나도 이제는 여기저기서 주워섬긴 덕에 인생이란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거의 본능처럼 느끼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 '허무에 대한 관조'를 향해 알듯말듯한 거부감을 느끼며 온전히 내 것으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난 아직 '삶'을 미처 경험하지 못한 풋내기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한없이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 십상인 소설들을 줄잡아 읽은 후에 오히려 '난 아직 아닌걸!'하는 반동 에너지를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 작가의 뜻이 아니였을까 하는 신비로움과 함께 책 한 권을 통해 얻은 수확이 크기만 하다. 아픔과 절망, 상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공허함, 같은 주제를 다루고도 한없이 우울증에 빠지게 만드는 글이 있는가하면 이렇게 '소리없이 큰 숨을 들이켜고 이 '허무'를 포용하라'는 글도 있으니, 이것 역시 '희망'을 이야기하는 독특한 방법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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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네마 천국>을 연상시킨다는 그르니에의 72년작 '시네 로망'을 보고싶다. 그리고 1차대전 즈음 프랑스 전원을 배경으로 한 가문의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렸다는 '겨울 궁전' 도 보고싶다. 차츰 나이를 먹고 그르니에의 글과 좀 더 가까이 지내다 보면 나 역시 김화영교수처럼 오랜 친구나 지기보다도 그르니에의 책 속에서 더 가까운 친화력을 느끼며 편안하게 될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