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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콤플렉스 - 광기가 남긴 아홉개의 초상
강준만 외 / 삼인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빨간색과의 거리 두기

정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엔 빨간색 자동차를 보기 힘들었다. 오직 '소방차'만 차체를 빨간색으로 칠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때 어렴풋이 느낀 빨간색은 '구분'과 '금기'의 감정이었다. 여기에 '두려움'을 유발하는 또 하나 고정관념. 빨간색 펜으로 이름을 쓰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낭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입을 찢겼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일화까지 보태면, 빨간색에 대한 거리 두기는 알게 모르게 내 의식 밑바닥에 은근히 똬리를 틀고 앉았나 보다.

1974년 경상도 태생이라는 시대적 공간적 환경은 그럭저럭 '레드 콤플렉스'에 민감하지 않은 인간 형태의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했고, 레드냐 아니냐의 문제에는 관심도가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며칠 전 헬리콥터 세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길래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본 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은 '전쟁이라도 났나.'였다. 내 의식 기제는 여전히 분단 체제의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빛바랜 빨간색은 언제라도 선홍색으로 분할 수 있음에 적이 놀라기도 했다.

 

공포심의 또다른 이름, '레드 콤플렉스'

<레드 콤플렉스-광기가 남긴 아홉 개의 초상>의 머리말에서 강준만 교수는 '레드 콤플렉스'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나라의 사람들이다. 기성 세대들의 경우 그런 상처를 안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기에 그들이 전쟁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끼고 북한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공포심은 이성으로 격파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 공포심이 현실적 체험에 근거한 것일진대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래서 그 공포심은 괴력을 발휘한다. (중략) 우리는 '전시 체제'에 살고 있는 국민이다. 역대 정권들은 행여 국민이 그걸 잊을까봐 끊임없이 '전시 체제'를 강조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걸 정치적으로 악용해 왔다는 데에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레드 콤플렉스'는 공포심의 또다른 이름이다. 분단과 휴전이라는 특수 상황을 이용해 정권을 거머쥔 정부가 통치 메커니즘으로 '공포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역대 정권은 '반공'과 '안보'라는 미명 하에 국민들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고 재갈을 물렸고, 그들이 느끼는 공포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간첩(혹은 빨갱이) 색출'이라는 마녀 사냥으로 국민들을 더 큰 공포심으로 몰아댔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의 그릇된 목소리는 방향 감각을 잃은 채 정권의 깨춤추기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렇듯 색적 정권과 색적 언론이 탄생시킨 색적 인물 아홉 명의 초상화가 이 책 <레드 콤플렉스-광기가 남긴 아홉 개의 초상>에 담겨 있는 것이다.

 

덫에 걸린 자와 빠져 나온 자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인물은 하나같이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레드 콤플렉스'의 덫에 걸려 주저 앉은 사람(박홍, 이문열, 김영삼, 한완상)과, 지금도 계속되는 지난한 색깔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소통을 시도하는 사람(김대중, 리영희, 조정래, 윤이상, 서준식)이 뚜렷이 구분된다.

물론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 인물을 서술한 저자의 프리즘을 통해 형상화 되었기에, 다른 저자에 의해 쓰였다면 다른 시각으로 조명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홉 명의 초상을 묘사하는 데 있어 각 저자들은 시각의 균형을 잃지 않고, 불가항력적인 시대의 그늘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을 허무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그를 치밀하고 영리한 보수주의자로 본다. 그것도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주의자면서도 수상쩍은 이론을 이용하여 자신을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은 가장 중립적인 인사인 체하는, 대단히 자기 변명에 능란하고 영리한 지식인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중략) 그러기에 그는 결국 정치적 무관심도 견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형태의 글쓰기를 통해 현실 정치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것도 보수적인 입장에 심하게 경도되어 있다." / "나는 월북한 아버지를 '원죄'로 가진 이문열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문열 자신도 분단의 희생자였고 냉전 이데올로기의 볼모였다. (중략) 그래서 "먼저 이념과 구체적인 인간과의 관계에 유의하라."(이문열, <변경>에서)는 그의 경고는 그런 '원죄 의식'을 유산으로 가지지 않은 우리들 모두에게 분명 타당한 경고 또는 충고라는 생각도 든다."(최종욱)

이적성 시비에 휘말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는 애초의 시나리오와 협박에 의해 뜯어 고쳐진 시나리오, 두 벌의 시나리오가 탄생하게 된 웃지 못할 사건도 소개된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노리는 '효과'가 현실화되는 메커니즘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위협은 임권택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를 비롯한 영화 제작팀을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시나리오가 수없이 달라지'게 했고 (중략)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또 하나의 반공 영화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감독의 말은 원작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한 구차스러운 변명에 지나지 않았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셈이다."(황광수)

남과 북의 적대적 대립을 거부하고 거시적인 민족애를 추구했던 작곡가, 그토록 돌아오기를 원했던 고국으로 부터 외면 당하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윤이상은 이른바 '황풍'을 일으키며 요란하게 망명했던 황장엽과 극명히 대비된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말 그대로 공포가 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분단 구조(세력) 자체가 그에 대해 공포감 혹은 두려움을 갖게 된다. 남은 것은 그 레드 콤플렉스를 거부하는 자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편견이다. 바로 이것이 '공산주의자'였던 황장엽의 망명은 환영을 받고, 한 번도 공산주의자였던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윤이상은 귀국이 거부당하는 역설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이다."(문부식)

배척이 아닌 극복을 향하여

여전히 분단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다양한 논리와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고 나름 그것들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간첩'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경각심을 환기시키며, 7~80년 대의 단순 논리와 편견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붉은가 아닌가, 얼마나 붉은가 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다음 과정으로의 이행은 그만큼 더뎌지는 게 아닐까. 분단이라는 시대적 환경이 낳은 불행을 극복하는 일은 시대와의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책의 말미에 이르면, 일명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의 희생양으로 지목돼 17년 동안 옥고를 치른 인권운동가 서준식 씨는 우리가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첩'을 입에 올리는 것은 아직도 두렵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간첩'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장기 구금 양심수, 이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간첩'이라야 하는지를, '간첩'이라는 만들어진 이미지 그늘에서 국가가 어떤 인권 범죄를 저질러 왔는지를 정면으로 천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감옥에서 너무도 긴 세월을 보낸 불쌍한 노인들과 억울한 조작 간첩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분단 체제에 마지막 남은 이 금기에 우리가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될 진정한 까닭은 바로 우리 자신이 오랜 불안과 공포와 불신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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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탄 화물선이 침몰했다. 가족은 모두 죽고 나는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의지해 태평양을 표류한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구명보트와 약간의 구급식량, 조명탄과 구명조끼, 밧줄, 낚시 도구, 메모지와 볼펜, 호루라기, 빗물받이, 바다 그리고 벵골 호랑이 한 마리.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이름의 16세 인도 소년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을 정리하고 가족이 모두 캐나다로 이주하기 위해 올라탄 화물선의 침몰과 함께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길고 지루한 표류를 시작한다. 227번의 밤과 낮이 바뀌는 동안 '생존'을 위한 그의 투쟁은, 먹고 살기 위한 노력과 동시에 거대한 몸집의 맹수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노력, 두 가지로 정리된다.

심심찮게 마주치는 상어떼와 때때로 불어닥치는 폭풍우, 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벵골 호랑이 사이에서 피신 몰리토 파텔, 즉 파이, 그는 말한다.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라고.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공포심이라고.

공포심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명민하고 배반 잘하는 적이다. 관대함도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접근해, 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공포심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 언제나. 우리는 잠시 차분하고 안정되고 행복을 느낀다. 그러다가 가벼운 의심으로 변장한 공포심이 스파이처럼 어물쩍 마음에 들어선다. 의심은 불신을 만나고, 불신은 그것을 밀어내려 애쓴다. 하지만 불신은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보병과 다름없다. 의심은 간단히 불신을 해치운다. 우리는 초조해진다. 이성이 우리를 위해 싸우러 온다. 우리는 안심한다. 이성은 최신 병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뛰어난 기술과 부인할 수 없는 여러 번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성은 나자빠진다. 우리는 힘이 빠지고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초조감에 끔찍해진다.

이렇게 공포심은 우리 몸에 깃들고, 몸은 무서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이미 인식한다. 벌써 폐는 새처럼 날아갔고, 창자는 뱀처럼 스멀스멀 빠져나갔다. 이제 혀가 주머니쥐처럼 축 늘어지고, 턱은 그 자리에서 덜컹댄다. 귀는 들리지 않는다. 근육이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처럼 떨리고, 무릎은 춤추듯 흔들린다. 심장은 지나치게 경직된 반면 괄약근은 지나치게 이완된다. 몸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분이 서로 떨어진다. 눈만 제대로 작용한다. 눈은 언제나 공포심에 쏠려 있다.

곧 우리는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마직막 연합군인 희망과 신뢰를 버린다. 이제 스스로 배패한 것이다. 인상에 불과한 공포심이 승리를 거둔다.

이것은 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추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피하려 하고 심지어는 잊으려 하는 고요한 어둠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더 심한 공포의 공격에 노출된다. 우리를 패배시킨 적과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으므로. (p203~204)

피신의 말처럼, 벵골 호랑이와 구명보트에서의 동거는 누가 봐도 최악의 상황이지만, 이 책 <파이 이야기>는 상황을 심각하게 구석으로 몰아붙이거나 긴박하게 위기와 절정의 파도를 넘나들지 않는다. 극적인 반전도 없다. 책을 잃는 동안 마치 물 위에 떠 출렁이는 부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작가 얀 마텔의 무심한 듯 유머와 솔직함이 잘 버무려진 화법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섣부른 판단을 금하게 만들고, 400페이지에 달하는 꽤 많은 텍스트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못하게 읽는 사람을 바짝 긴장시키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애써 가르치려 들지는 않지만 때때로 허술한 뒷통수를 내려치는 인생에 대한 관점도 무척 인상 싶다.

책의 끝 부분에는 기사회생으로 멕시코 해안에 닿은 파이를 만나기 위해 파견된 일본 조사관과의 대화가 녹취를 정리한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227일간 파이가 겪었던 사실들, 작은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의 동거, 바다 위에서 발견한 식인섬, 이 모든 불가사의로부터 살아남은 파이를 도무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던지는 파이의 짧은 말은 나를 충분히 긴장시켰다.

"호랑이는 존재해요. 구명보트도 존재하고, 바다도 존재해요. 당신의 좁고 제한된 경험에 그 셋이 다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거기서 벌어진 일을 믿지 않으려는 거예요." (p307)

좁고 제한된 경험에 그들이 다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 한다는 말. 어쩌면 내가 외면하는 것들은 나의 좁고 제한된 경험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튼, <파이 이야기>는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 남느냐에 조바심 내기 보다는, 어떻게 함께 살아내는 지에 더 관심이 가는 묘한 책이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파이의 충고대로라면, 결국, 쫄지 않으면 우리는 이기는 거다. 공포심만으로 패배하지 말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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