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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오 상담소 - 잘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공감!
소복이 지음 / 청어람미디어(나무의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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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듯 그러나 섬세하게 보듬어 주는 온기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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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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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습니다. 수일 동안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죽음을, 삶을, 진리와 희망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를 비추어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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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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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페르미나 다사가 학교에 가는 도중에 발견할 수 있도록 미리 정해진 장소에 편지를 숨겨놓은 다음,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간밤의 사랑으로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종종 출근하곤 했다. 반면에 그녀는 아버지의 경계의 눈초리와 수녀들의 심술궂은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틀어박히거나 수업 시간에 필기를 하는 척하면서 간신히 학교 공책의 반 페이지만을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편지를 짧게 쓰는 것이 시간이 없거나 누군가에게서 급습을 받을 위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성격이기도 했다. 그녀의 편지는 그 어떤 감정의 위험도 피했으며, 단지 항해 일지를 쓰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상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는 데 그쳤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그 편지들은 심심풀이용으로, 자기 손은 불에 넣지 않으면서 뜨거운 불길을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자신의 광기를 그녀에게 전염시키고 싶어 어쩔 줄 모르던 그는 바늘 끝으로 동백꽃잎에 세밀하게 새긴 시를 보내곤 했다. 편지 안에 한 줌의 머리카락을 넣을 용기를 낸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갈구하던 페르미나 다사의 땋은 머리카락 한 움큼은 받지 못했다.(124~125p)

자존심 때문이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지막 말을 삼켜버릴 수 있는 고집 세고 콧대 높은 여자, '페르미나 다사'. 그녀의 13세 모습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깡마르고 서정적이며 사랑을 위해 온전히 미칠 수 있는 어설프고 고집스런 한 남자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재봉틀을 돌리고 있던 그녀를 처음 만난 아주 짧은 한 순간. 그의 나이 17세에 하나의 깊고 선명한 점으로 각인된 이 순간이 그토록 긴 사랑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53년 7개월 11일의 밤과 낮이 지난 때에야 알게 된다는...

작가 마르케스가 부리는 언어의 마술을 제대로 느끼려면 지나치게 글에 몰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진지하다가도 일순 가벼워지고,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사랑의 정열과 고통도 그의 냉소적이고 직선적인 표현 앞에선 한 순간에 우스꽝스러워지고 만다. 너무 차갑지만 않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면 글이 요리하고 있는 상황을 아주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나는 주로 버스를 타고 출퇴근 하는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버스 한 구석에서 시종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킥킥 대는, 점잖지 못한 나를 주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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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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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의 유언장에 적혀 있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다만 그의 글이 희대의 걸작임에는 분명한, 어느 시인을 찾아 '부흐하임'이라는 책의 도시로 떠난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 그는 공룡이며, 아직 책을 낸 적은 없지만 엄연히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하지만 '오름'을 믿지 않는 話者이다.

오름? 오름은, 한 마디로 완벽한 글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온 몸의 마비와 같다.

원고는 마치 화가의 손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탁월한 예술품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기호들은 종이 위에서 마치 발레를 하듯 매혹적인 윤무를 펼치고 있었다. (중략)
너무도 진지하게 파들어가면서도 동시에 쾌활하게 쓰여 있어서 나는 몇 구절밖에 읽지 않고도 열광하며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빠졌다. 마치 어느 아름다운 공룡 처녀와 함께 춤을 추는 듯한 기분이었고, 포도주를 몇 잔 마셔서 얼떨떨해졌거나 천상의 음악소리에 취한 듯한 기분이었다. 내 머릿 속은 마치 저절로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별똥별들처럼 불꽃을 튀기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릿속으로 우박처럼 쏟아져 들어오더니 뇌피질 속에서 쉬익쉬익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머릿속이 킥킥거리더니 점점 나를 웃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큰 소리로 그걸 인정하거나 답변을 하도록 자극했다. (중략) 나는 좁은 길을 걸어가다가 이따금 어깨를 으스대는가 하면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편지를 손에 들고 마구 흔들어대거나 또 이따금 히스테리 환자처럼 마구 웃어대거나 열광해서 발을 마구 구르기도 했다. (중략) 어쩌면 나는 정말이지 주인공이 광기에 빠져드는 연극을 한번 해본 건지도 몰랐다. (1권 본문 38~41p)

이렇게 원고를 보다 자신도 모르게 울다 웃고, 숨을 헐떡이고 입술을 꽉 깨물고, 무릎을 치며 비명을 지르는 일이 바로 '오름'에 도달한 상태이다.
주인공은 이 단 한번의 오름으로 그 글을 쓴 시인을 찾아 장장 2권, 750페이지에 달하는, 여정과 모험, 생명의 위협과 기이한 만남, 의문의 실마리와 그 종말까지를 고스란히 옮겨주고 있다.
부흐하임은 Buch(책) Heim(고향)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갖가지 책들과 책에 관련된 사람들-작가, 출판업자, 고서점, 상인, 책 사냥꾼-이 모여 사는 '책 동네'이다. 

여기에는 바로 '꿈꾸는 책들'이 있었다. 그 도시에서는 고서적들을 그렇게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장사꾼들의 눈에는 제대로 살아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제대로 죽은 것도 아니고 그 중간인 잠에 빠져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은 사실상 과거에 존재했다가 이제는 소멸을 앞두고 있었으며, 그래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흐하임의 모든 책 서가들과 상자들, 지하실들, 지하무덤들 속에는 그렇게 졸고 있는 책들이 백만 권, 아니 수백만 권에 달했다. 오직 무언가를 찾는 수집가의 손에 의해 어떤 책이 발견되어 그 책장이 넘겨질 때만, 그것을 구입해서 거기에서 들고 나갈 때에만 그 책은 새로이 잠에서 깨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모든 책들이 꿈꾸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1권 본문 49~50p)

부흐하임에서 미텐메츠는 흉악한 음모에 빠져 지하도시로 추방되는데, 여기서 그는 지하도시에서 거대한 도서관을 운영하며 꿈꾸는 책들을 돌보고 있는 '부흐링' 족과, 죽었다고 알려진 전설의 책 사냥꾼 '레겐샤인', 결국 이 책이 찾고 있던 잃어버린 시인이자 그림자 제왕으로 불리는 '호문콜로스'를 차례로 만난다.

그림자 제왕은 촛불 아래로 걸어왔다. 오, 내 친구들이여, 그때 처음으로 그의 형상을 보았다.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튀어나오면서 나는 뒤로 멏 결음 물러났다. 그 방 안에 있던 살아 있는 책들도 역시 그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자 뒤로 피했다.
거기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종이로 된 형체가 서 있었다. 그가 한때는 인간이었음을 상기시키는 유일한 표식은 그의 몸의 형태였다. 팔과 다리들, 몸통, 머리, 심지어 얼굴까지 모든 게 다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아주 오래된 색 바랜 종이들을 무수히 첩첩 쌓아서 조합해놓은 형체였다. (중략) 만약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이 갑자기 생명을 얻어 깨어났다고 해도, 지금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이 종이로 만든 거대한 인조 인간처럼 나를 경악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권 본문 218p)


호문콜로스, 그는 한때 쓰는 족족 '오름'의 책이 되어버리는 마법의 손을 가진 시인이자 작가였다. 그러나 책 출판을 위해 부흐하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부흐하임의 보이지 않는 권력자인 '스마이크'에게 걸려들어,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하세계에 갇혀 책 사냥꾼들을 사냥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 거대함과 대적할 수 없는 무력으로 곧 지하세계를 자신의 나와바리로 만들지만, 호문콜로스는 지상의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거리를 여유롭게 거니는 예전의 자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지하도시를 벗어나지 못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도 아니다. 그의 몸은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햇빛을 받으면 타버리고 말아 지상은 곧 죽음이란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에, 한번도 햇살과 바람, 물의 소리를 잊지 못하면서도 그것들이 존재하는 지하 저 위를 넘어다볼 용기조차 없었던, 슬픈 그.

말하지 않아도 그리운 것은, 말로 밖에 내어버리면 더이상 간직하고 있지 못하고 터뜨리고 말게 된다. 호문콜로스 역시 미텐메츠에게서 용기를 얻어 그의 존재를 되찾기 위해 미텐메츠와 지상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 뱀발

1권은 솔직히 좀 지루했지만, 2권은 숟가락을 들고 책장을 넘길 정도로 흥미가 진진하다. 미텐메츠와 호문콜로스의 만남에서부터 책은 급격히 흥미로워지는데, '책의 도시'라는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책'이 빠지지 않고, 책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모든 사건을 꾸미는 이 등 그 어떤 존재도 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책을 통해 잃고 얻는 것들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이다. 제대로 된 '책에 관한 책'인 것.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잠깐, 나도 오름을 느낀 게 아닌가 싶은 착각에 빠졌다. 기쁨과 슬픔이 묘하게 공존하며, 뭔가 놓친 구절이 있지는 않을까 처음부터 다시 찬찬이 읽어볼까, 하는 등등의 아쉬움과 조바심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내게 '오름'을 관통하게 해 준 책이 딱 두 권 있다. 물론 오름의 경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라도 "나 이 책 읽고 제대로 완전히 찌르르~했소."라고 말할 수 있는 책.
그 하나가 신경숙의 <깊은 슬픔>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 기억으로는 3개월 정도 아픔의 바다에서 죽도록 허우적대며 내 감정과 고군분투했었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책이었다.

그리고 하나는 칼릴지브란의 <예언자>. 이 책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방학 선물로 주신 거였는데, 역시 방학 내내 이 책의 여운에 젖어 혼자 기쁘다가 슬프다가, 뭔가 대단한 세상의 이치를 발견한 것처럼 까불어대다가, 인생 별 거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졌다가, 혼자 어린 마음에 분주한 감상의 사치를 즐겼었다.

묘한 것은, 이 두 책이 모두 지금 내 수중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 저기 빌려주다, 나에게로 돌아오지 못한 책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는 꿈꾸는 책들과 살아 있는 책들, 그리고 결국 꿈에서 깨어나는 책들이 존재하는데, 살아 있는 책들은 꿈꾸는 책들과 달라, 기거나 걸어서 이동하고, 호문콜로스를 추종하고, 다른 존재를 위협하거나 죽이기도 하며, 먹이를 두고 서로 싸우는, 지극히 사고가 가능한 책들이다. 다만 그들이 말을 한다는 구절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내 책장의 책들이 꿈에서 깨어난다면, 내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이~ 나는 언제 마저 읽어줄 생각인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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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콤플렉스 - 광기가 남긴 아홉개의 초상
강준만 외 / 삼인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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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과의 거리 두기

정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엔 빨간색 자동차를 보기 힘들었다. 오직 '소방차'만 차체를 빨간색으로 칠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때 어렴풋이 느낀 빨간색은 '구분'과 '금기'의 감정이었다. 여기에 '두려움'을 유발하는 또 하나 고정관념. 빨간색 펜으로 이름을 쓰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낭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입을 찢겼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일화까지 보태면, 빨간색에 대한 거리 두기는 알게 모르게 내 의식 밑바닥에 은근히 똬리를 틀고 앉았나 보다.

1974년 경상도 태생이라는 시대적 공간적 환경은 그럭저럭 '레드 콤플렉스'에 민감하지 않은 인간 형태의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했고, 레드냐 아니냐의 문제에는 관심도가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며칠 전 헬리콥터 세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길래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본 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은 '전쟁이라도 났나.'였다. 내 의식 기제는 여전히 분단 체제의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빛바랜 빨간색은 언제라도 선홍색으로 분할 수 있음에 적이 놀라기도 했다.

 

공포심의 또다른 이름, '레드 콤플렉스'

<레드 콤플렉스-광기가 남긴 아홉 개의 초상>의 머리말에서 강준만 교수는 '레드 콤플렉스'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나라의 사람들이다. 기성 세대들의 경우 그런 상처를 안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기에 그들이 전쟁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끼고 북한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공포심은 이성으로 격파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 공포심이 현실적 체험에 근거한 것일진대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래서 그 공포심은 괴력을 발휘한다. (중략) 우리는 '전시 체제'에 살고 있는 국민이다. 역대 정권들은 행여 국민이 그걸 잊을까봐 끊임없이 '전시 체제'를 강조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걸 정치적으로 악용해 왔다는 데에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레드 콤플렉스'는 공포심의 또다른 이름이다. 분단과 휴전이라는 특수 상황을 이용해 정권을 거머쥔 정부가 통치 메커니즘으로 '공포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역대 정권은 '반공'과 '안보'라는 미명 하에 국민들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고 재갈을 물렸고, 그들이 느끼는 공포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간첩(혹은 빨갱이) 색출'이라는 마녀 사냥으로 국민들을 더 큰 공포심으로 몰아댔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의 그릇된 목소리는 방향 감각을 잃은 채 정권의 깨춤추기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렇듯 색적 정권과 색적 언론이 탄생시킨 색적 인물 아홉 명의 초상화가 이 책 <레드 콤플렉스-광기가 남긴 아홉 개의 초상>에 담겨 있는 것이다.

 

덫에 걸린 자와 빠져 나온 자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인물은 하나같이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레드 콤플렉스'의 덫에 걸려 주저 앉은 사람(박홍, 이문열, 김영삼, 한완상)과, 지금도 계속되는 지난한 색깔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소통을 시도하는 사람(김대중, 리영희, 조정래, 윤이상, 서준식)이 뚜렷이 구분된다.

물론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 인물을 서술한 저자의 프리즘을 통해 형상화 되었기에, 다른 저자에 의해 쓰였다면 다른 시각으로 조명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홉 명의 초상을 묘사하는 데 있어 각 저자들은 시각의 균형을 잃지 않고, 불가항력적인 시대의 그늘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을 허무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그를 치밀하고 영리한 보수주의자로 본다. 그것도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주의자면서도 수상쩍은 이론을 이용하여 자신을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은 가장 중립적인 인사인 체하는, 대단히 자기 변명에 능란하고 영리한 지식인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중략) 그러기에 그는 결국 정치적 무관심도 견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형태의 글쓰기를 통해 현실 정치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것도 보수적인 입장에 심하게 경도되어 있다." / "나는 월북한 아버지를 '원죄'로 가진 이문열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문열 자신도 분단의 희생자였고 냉전 이데올로기의 볼모였다. (중략) 그래서 "먼저 이념과 구체적인 인간과의 관계에 유의하라."(이문열, <변경>에서)는 그의 경고는 그런 '원죄 의식'을 유산으로 가지지 않은 우리들 모두에게 분명 타당한 경고 또는 충고라는 생각도 든다."(최종욱)

이적성 시비에 휘말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는 애초의 시나리오와 협박에 의해 뜯어 고쳐진 시나리오, 두 벌의 시나리오가 탄생하게 된 웃지 못할 사건도 소개된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노리는 '효과'가 현실화되는 메커니즘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위협은 임권택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를 비롯한 영화 제작팀을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시나리오가 수없이 달라지'게 했고 (중략)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또 하나의 반공 영화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감독의 말은 원작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한 구차스러운 변명에 지나지 않았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셈이다."(황광수)

남과 북의 적대적 대립을 거부하고 거시적인 민족애를 추구했던 작곡가, 그토록 돌아오기를 원했던 고국으로 부터 외면 당하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윤이상은 이른바 '황풍'을 일으키며 요란하게 망명했던 황장엽과 극명히 대비된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말 그대로 공포가 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분단 구조(세력) 자체가 그에 대해 공포감 혹은 두려움을 갖게 된다. 남은 것은 그 레드 콤플렉스를 거부하는 자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편견이다. 바로 이것이 '공산주의자'였던 황장엽의 망명은 환영을 받고, 한 번도 공산주의자였던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윤이상은 귀국이 거부당하는 역설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이다."(문부식)

배척이 아닌 극복을 향하여

여전히 분단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다양한 논리와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고 나름 그것들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간첩'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경각심을 환기시키며, 7~80년 대의 단순 논리와 편견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붉은가 아닌가, 얼마나 붉은가 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다음 과정으로의 이행은 그만큼 더뎌지는 게 아닐까. 분단이라는 시대적 환경이 낳은 불행을 극복하는 일은 시대와의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책의 말미에 이르면, 일명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의 희생양으로 지목돼 17년 동안 옥고를 치른 인권운동가 서준식 씨는 우리가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첩'을 입에 올리는 것은 아직도 두렵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간첩'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장기 구금 양심수, 이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간첩'이라야 하는지를, '간첩'이라는 만들어진 이미지 그늘에서 국가가 어떤 인권 범죄를 저질러 왔는지를 정면으로 천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감옥에서 너무도 긴 세월을 보낸 불쌍한 노인들과 억울한 조작 간첩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분단 체제에 마지막 남은 이 금기에 우리가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될 진정한 까닭은 바로 우리 자신이 오랜 불안과 공포와 불신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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